일상 (49) 썸네일형 리스트형 20220704_나의 계획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알 수 없다. 추측조차 할 수 없다. ‘하나님의 계획을 추측한다’는 행위에는 나의 뜻을 이루려는 교묘한 속셈이 슬쩍 뭍어 있을 때가 많다. 그 속셈이 뭍어 있는 시도는 처참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것은 나의 경험이다. 나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거대한 포장지로 나의 욕망들을 예쁘게 싸서 리본까지 묶은 후에 기도를 하곤 했다. ‘이것이 당신의 계획이오니 나를 통해 이루소서, 아멘?’ 웃기고 있었다. 모든 지식 중에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으뜸이라고 했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 얘기였다. 지금은 저 문장의 희미한 그림자 정도는 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의 위대함과 나의 무지함은 비교 대상이 아니지만… 나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은 그의 영광 앞에서 마른 낙엽처럼 바스.. 드라이브 마이 카 (스포) (스포 있음) 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는 1.5편을 봤습니다. 아사코는 다 봤고, 328분의 런닝 타임을 가진 '해피아워'는 아직 중간 정도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해피아워에 비해서는 짧은 179분의 런닝타임입니다. 왜 좋은지 모르겠는데 나도 모르게 계속 집중하게 되는 영화. 이 감독의 영화를 보며 90년대의 왕가위가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의 내용과 주제는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대단한 사건이나 반전 등이 등장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 집중하게 됩니다. 감독이 관객을 끌고가는 연출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이 영화의 원작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이라고 합니다. 90년대부터 하루키의 팬이였고, .. 메멘토 모리 이어령 교수님이 천국으로 가셨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분의 신간들이 마른 하늘에 우박이 떨어지듯 출간되고 있다. 본인이 마지막을 준비하며 많은 분들과 협업하며 준비한 책들인 것 같다. 생전에 난 그 분을 만날 기회가 한 번 있었다. 불과 1년 전 쯤인 것으로 기억한다. 개인적으로 바쁜 일이 생겨 그 놀라운 기회를 놓쳤다. 내가 천국에 가기 전까지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다. 그래도 지인이 이어령 교수님와 오랫동안 통화하는 내용은 한 번 들었다. 강의과 매체를 통해 들어본 그 목소리 그대로였다. 전화기를 뚫고 나오는 묵직하고도 예리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이어령 교수님이랑 통화해요?" 라고 반사적으로 이야기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 분은 참 똑똑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되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into the wild 요새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다시 읽고 있다. 자아 실현은 자아 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가능하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프랑클 박사는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잊을수록 그만큼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과잉 의도에 대해서도 말했다. 불면증 환자가 잠을 자려고 노력할수록 잠을 이루기가 더 힘들어 진다는 이야기다. 성공을 위한 과잉 의도도 마찬가지다. 프랑클 박사는 어떠한 형태의 과잉 의도도 성공하기 어렵다고 이야기 한다. 과연 그런걸까? 그렇다면 적당한 의도의 기준을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 또한 프랑클 박사는 '인간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가치 있는 목표와 자유의지로 선택한 일을 위한 노력과 투쟁이지, 긴장 없는 상태가 아니다.' 라고 이야기 했다. 이 시대에.. 명료한 사고 나의 사고가 명료하지 않기에 명료한 글을 쓸 수가 없다. 현대 사회를 '잘' 살아가기에 나는 너무나 비겁하다. 나의 비겁함은 스스로를 향한다. 난 세상과 마주하여 직면하기보다는 적당히 회피하며 나를 보호하는데 급급했다. 나의 이 비겁함은 나 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좋은 사람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해결 방법을 찾지는 못하겠다. 한 때는 기독교에서 위안을 찾았고 자기계발에서 해법을 찾으려 했고 워커홀릭하며 중심을 비껴가는 삶을 선택했었다. 난 스스로와 다투며 내가 가진 문제점들을 깨달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과제인 해결 방법은 찾지 못하고 있다. 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내게 주어지는 하루하루의 과제들을, 혹은 재앙들을 우걱우걱 씹어 삼킬 뿐이다. 씹어 삼키는 내 눈빛에는 희망이 부재하다... 불평등 SNS 계정들은 고된 일상에서 잠깐 반짝인 순간들을 더욱 반짝이게 편집하여 공유한다. 단 한 시도 반짝일 틈이 없는 생활인들은 고된 삶의 무게가 부여한 퀭한 눈빛과 생기를 잃은 피부를 가진 낯선 얼굴 앞에 잠깐 소외감을 느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생활 전선으로 나간다. 노력이 부족해서 힘든 생활을 하게 됐다고 하기에 그들은 너무나 열심히 살았다. 단지 운이 없었거나 돈이 순환하는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어리석은 방법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그 결과에 핑계를 댈 수는 없다.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이 원하지 않았던 역기능 가정에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그들이 극복하기에는 버거운 삶의 무게를 그 작은 어깨로 짊어져야 했기에 도저히 사회의 주류로 나갈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무교가 크리스찬에게 고함 2022년 7월 4일, 저는 현재 크리스찬으로 돌아왔습니다. 징징대던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박제를 해 놓는 '안티 크리스찬'이였던 과거의 생각들입니다. 예수는 3년의 공생애 기간 동안 그 시대의 약한 자들을 대변해 주었다. 여자, 어린이, 세리, 이방인, 귀신들린 자, 병자 그 예수를 따른다는 지금의 크리스찬들은 개인의 구원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위로해 주는 신. 날 이해해 주는 신. 내가 병신 같이 살아도 날 사랑해 주는 신. 이해는 된다. 이 험한 세상에서 그러한 위로 조차 없다면 견뎌낼 재간이 없는 거지. 하지만 스스로를 진짜 크리스찬이라고 믿으면 곤란한다. 나는 크리스찬이 되길 바랬지만 성경 말씀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할 수가 없었다. 기도도 해보고,.. 무의미 의미를 얻고자 했던 무의미가 가련하다의미를 위해 흘린 무의미의 그 눈물들이 애처롭다의미의 약속들에 자기도 속했을거라 기대했던 무의미의 순진함이 쓸쓸하다 잠 못 이룬 새벽 4시 36분의 시간 또한 무의미 하니 참 곤란한 일이다태어난 게 무의미 하니 죽음 또함 무의미하다. 역시 곤란한 일이다아무도 보지 못 할 이 비명도 무의미하니 모든 인생이란 참으로 무의미하다 이전 1 2 3 4 ···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