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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료한 사고 나의 사고가 명료하지 않기에 명료한 글을 쓸 수가 없다. 현대 사회를 '잘' 살아가기에 나는 너무나 비겁하다. 나의 비겁함은 스스로를 향한다. 난 세상과 마주하여 직면하기보다는 적당히 회피하며 나를 보호하는데 급급했다. 나의 이 비겁함은 나 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좋은 사람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해결 방법을 찾지는 못하겠다. 한 때는 기독교에서 위안을 찾았고 자기계발에서 해법을 찾으려 했고 워커홀릭하며 중심을 비껴가는 삶을 선택했었다. 난 스스로와 다투며 내가 가진 문제점들을 깨달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과제인 해결 방법은 찾지 못하고 있다. 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내게 주어지는 하루하루의 과제들을, 혹은 재앙들을 우걱우걱 씹어 삼킬 뿐이다. 씹어 삼키는 내 눈빛에는 희망이 부재하다...
불평등 SNS 계정들은 고된 일상에서 잠깐 반짝인 순간들을 더욱 반짝이게 편집하여 공유한다. 단 한 시도 반짝일 틈이 없는 생활인들은 고된 삶의 무게가 부여한 퀭한 눈빛과 생기를 잃은 피부를 가진 낯선 얼굴 앞에 잠깐 소외감을 느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생활 전선으로 나간다. 노력이 부족해서 힘든 생활을 하게 됐다고 하기에 그들은 너무나 열심히 살았다. 단지 운이 없었거나 돈이 순환하는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어리석은 방법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그 결과에 핑계를 댈 수는 없다.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이 원하지 않았던 역기능 가정에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그들이 극복하기에는 버거운 삶의 무게를 그 작은 어깨로 짊어져야 했기에 도저히 사회의 주류로 나갈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무교가 크리스찬에게 고함 2022년 7월 4일, 저는 현재 크리스찬으로 돌아왔습니다. 징징대던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박제를 해 놓는 '안티 크리스찬'이였던 과거의 생각들입니다. 예수는 3년의 공생애 기간 동안 그 시대의 약한 자들을 대변해 주었다. 여자, 어린이, 세리, 이방인, 귀신들린 자, 병자 그 예수를 따른다는 지금의 크리스찬들은 개인의 구원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위로해 주는 신. 날 이해해 주는 신. 내가 병신 같이 살아도 날 사랑해 주는 신. 이해는 된다. 이 험한 세상에서 그러한 위로 조차 없다면 견뎌낼 재간이 없는 거지. 하지만 스스로를 진짜 크리스찬이라고 믿으면 곤란한다. 나는 크리스찬이 되길 바랬지만 성경 말씀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할 수가 없었다. 기도도 해보고,..
무의미 의미를 얻고자 했던 무의미가 가련하다의미를 위해 흘린 무의미의 그 눈물들이 애처롭다의미의 약속들에 자기도 속했을거라 기대했던 무의미의 순진함이 쓸쓸하다 잠 못 이룬 새벽 4시 36분의 시간 또한 무의미 하니 참 곤란한 일이다태어난 게 무의미 하니 죽음 또함 무의미하다. 역시 곤란한 일이다아무도 보지 못 할 이 비명도 무의미하니 모든 인생이란 참으로 무의미하다
신뢰_Ruthless TRUST - 브레넌 매닝 - 이번에는 전혀 다른 그리스도인 무리에 대해 말해보자. 불확실한 상황에 고통받고 회의에 시달리며 답 없는 의문으로 고민하는, 사면초가에 싸인 신자들 무리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온전히 마음을 빼앗긴 자들이지만 인간의 자유가 불러올 불행이 우려되어 늘 고뇌한다. 한 여자는 내게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강요하지 않는다고들 말하지만 나는 그런 정중함이 필요 없다"고 말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싶고 그 안에 들어가려 해도 왠지 안된다. 그들에게 가장 좌절을 주는 말은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믿음이 쉽게 오지 않기 때문이다. 끝내 오지 않을 때도 있다. 다행히 그들은 믿는 척하기를 거부한다. 그 바람에 체념하고 신앙공동체의 아웃사이더가 되어야 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
분노, 멸시, 욕설 일상에서 늘 행하는 나의 3가지 습관인 분노, 멸시, 욕이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에서 말하는 3가지의 악이였다. 난 이책을 이미 한 번 읽었었는데 그 때에는 이 내용들이 가슴에 들어오지 않은 것을 보면, 당시 나의 비뚤어진 자아는 진리와는 더불어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분노에는 강한 자기 의와 상한 자아가 있다. 멸시는 분노보다 더 의지적으로 상대방을 깎아 내리는 것이며, 예수가 말한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의 '라가'인 욕설은 파괴적이고 해로운 영혼의 침해이며 그 안에는 분노와 멸시가 모두 들어있다. '달라스 월라드' 는 말한다. "남들을 그런 태도로 대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자세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 나라와 전혀 상치되기 때문이..
회심의 시작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세상 속에서 상처만 받아온 나의 고통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놀라운 치유의 스토리, 벅차오르는 감동, 어둠 속에 밝히 보이는 빛과 같은 형태의 깨달음이나 회심은 아니였다. 사실 나의 회심의 경주는 아직도 치열하게 진행중이다. 나는 나의 '죄'를 깨달았다.2012년 말부터 교회를 다니며 듣게 된 '죄', '회개', '원죄' 같은 단어들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둥둥 떠다니는 연기 같았다. 나는 나를 단련하여 어서 빨리 정금으로 만들어 줄 신앙을 원했지 둥둥 떠다니는 단어들이 가득한 신앙을 원하지는 않았다. 난 갈급했다. 하나님이 갈급한 것이 아니라 내 상황을 변화시켜 줄 실체가 갈급했다. 내 갈급함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여도 상관..
고도를 기다리지 않으며 안타까움만 가득했던 과거에 연결 된 줄을 과감히 끊어야 한다. 내가 끊지 않는 다 한들 너덜거리는 그 줄은 곧 끊길 수 밖에 없다.빛 바랜 과거의 신념은 허상 이였다. 허상 앞에 엎드려 구걸했던 그 밀도 깊은 시간들은 깊은 후회로 남았다. 후회가 만든 상처는 죽음만큼 깊었다.그렇지만 다 끊어야 한다. 많이 늦은 시간이지만 지금이라도 깨달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나의 단절은 새로운 연결로 이어질 것이다.난 더 이상 '고도'를 기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