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선생님과 이재철 목사님의 양화진 목요강좌에서 이어령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었다.
"10대-20대 애들에게 성경을 읽히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구약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뉘앙스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나이의 감수성과 통찰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참 많다.
20대에 읽었던 '고통의 문제'와 지금 읽은 '고통의 문제' 역시 다르다.
활자는 같지만 독자에 의해서 책의 가치는 달라진다는 사실을 또 한번 깨달았다^^
C.S. 루이스가 본문 중에 이런 얘기를 한다.
친구들과의 즐거운 만남, 허영을 채워 준 소소한 일들, 휴일이나 새로운 책에 빠져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심각한 병일지도 모르는 복부의 갑작스런 통증이나 우리가 전부 전멸할지도 모른다고 위협하는 신문 머릿기사가 등장하며 상황을 뒤집어 버린다. 작은 행복은 산산히 부숴진다. 이런 장난감들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되며, 나의 행복은 다른 세상에 있고, 유일한 진짜 보배는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을 거두면, 하루나 이틀 정도는 그를 의식적으로 의지하며 올바른 원천에서 힘을 끌어오는 피조물로 산다. 그러나 위협이 물러가는 순간, 전 본성은 대번 그 장난감들을 향해 달려가 버린다.' (요약)
하나님의 선하심을 내가 믿고 있다면 나에게 다가오는 좌절과 고통들은 하나님의 확성기이며, 욥의 말처럼 정금같이 나아가기 위한 연단의 과정일 거라고 믿고 이겨내야 할 것이다.
밑줄긋기
하나님의 전능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내재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지,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지 말도 안되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령 "하나님은 한 피조물에게 자유의지를 주시는 동시에 안 주실 수 있다God Can give a creature free-will and at the same time withhold free-will from it"는 말은 하님에 관해 어떤 내용도 전달해 주지 못합니다.
상호모순 되는 일은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약한 피조물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도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장애물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전능하시다고 해도 상대적으로 독립적이며 '가차없는' 자연을 창조하지 않고서는 자유의지를 가진 영혼들의 사회를 창조하실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선함
만약 그가 선하지 않다면(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에서 선하지 않다면), 혹시 그에게 순종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서워서 순종하는 것 - 전능한 악마가 있다면 그에게도 똑같이 이런 마음으로 순종하려 들겠지요 - 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별 관심 없는 삶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무조건 행복하기만을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친구와 연인과 자녀들에 대해서는 엄격한 태도를 보이며, 그들이 다른 사람과 불화를 일으키는 비열한 방식으로 행복해지느니 차라리 고통받는 편을 바랍니다.
꾸벅꾸벅 졸면서 여러분이 그 나름대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연로한 할아버지의 인자함이나 양심적인 치안판사의 냉담한 박애주의, 손님 대접에 책임감을 느끼는 집주인의 배려로서가 아니라, 소멸하는 불로서, 세상을 창조해 낸 사랑으로서, 작품을 향한 화가의 사랑처럼 집요하고 개를 향한 인간의 사랑처럼 전제적이며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처럼 신중하고 숭고하며 남녀의 사랑처럼 질투할 뿐 아니라 꺾일 줄 모르는 철두철미한 사랑으로서 여기 계십니다.
우리는 만드신 주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물론 이 목적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우리를 그의 사랑이 '아주 기쁘게'머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시려는 데 있습니다.
피조물로서 신의 속성에 참여하며 신의 생명을 반사하는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인간의 악함
여러분이 비겁하고 겁 많고 오만하며 나태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별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이웃의 복지가 당신의 안전이나 자존심이나 안락함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은 탓일 뿐입니다.
동물의 고통
"이 동물에게 고통이 일어났다"고 해야지, 흔히 말하듯이 "이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와 "느낀다"라는 말에는 우리처럼 감각 그 너머에서 그 감각들을 '경험'으로 조직할 수 있는 '자아' 내지는 '영혼', 또는 '의식'이 있다는 전제가 은근슬쩍 깔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능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내재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지,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지 말도 안되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령 "하나님은 한 피조물에게 자유의지를 주시는 동시에 안 주실 수 있다God Can give a creature free-will and at the same time withhold free-will from it"는 말은 하님에 관해 어떤 내용도 전달해 주지 못합니다.
상호모순 되는 일은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약한 피조물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도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장애물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전능하시다고 해도 상대적으로 독립적이며 '가차없는' 자연을 창조하지 않고서는 자유의지를 가진 영혼들의 사회를 창조하실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선함
만약 그가 선하지 않다면(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에서 선하지 않다면), 혹시 그에게 순종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서워서 순종하는 것 - 전능한 악마가 있다면 그에게도 똑같이 이런 마음으로 순종하려 들겠지요 - 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별 관심 없는 삶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무조건 행복하기만을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친구와 연인과 자녀들에 대해서는 엄격한 태도를 보이며, 그들이 다른 사람과 불화를 일으키는 비열한 방식으로 행복해지느니 차라리 고통받는 편을 바랍니다.
꾸벅꾸벅 졸면서 여러분이 그 나름대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연로한 할아버지의 인자함이나 양심적인 치안판사의 냉담한 박애주의, 손님 대접에 책임감을 느끼는 집주인의 배려로서가 아니라, 소멸하는 불로서, 세상을 창조해 낸 사랑으로서, 작품을 향한 화가의 사랑처럼 집요하고 개를 향한 인간의 사랑처럼 전제적이며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처럼 신중하고 숭고하며 남녀의 사랑처럼 질투할 뿐 아니라 꺾일 줄 모르는 철두철미한 사랑으로서 여기 계십니다.
우리는 만드신 주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물론 이 목적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우리를 그의 사랑이 '아주 기쁘게'머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시려는 데 있습니다.
피조물로서 신의 속성에 참여하며 신의 생명을 반사하는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인간의 악함
여러분이 비겁하고 겁 많고 오만하며 나태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별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이웃의 복지가 당신의 안전이나 자존심이나 안락함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은 탓일 뿐입니다.
동물의 고통
"이 동물에게 고통이 일어났다"고 해야지, 흔히 말하듯이 "이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와 "느낀다"라는 말에는 우리처럼 감각 그 너머에서 그 감각들을 '경험'으로 조직할 수 있는 '자아' 내지는 '영혼', 또는 '의식'이 있다는 전제가 은근슬쩍 깔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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