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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폴 투르니에] 모험으로 사는 인생



모험으로 사는 인생

저자
폴 투르니에 지음
출판사
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 2000-08-01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B-6080 양장본 | 383쪽 | 210*148mm (A5)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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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으로 사는 인생 - 폴 투르니에 - 


#제1장. 인간 특유의 본능 


- 모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 질적인 모험과 양적인 모험 

  : 사람은 '가치 세계'에 살고 있다. 자신에게 언제나 추진력을 주는, 궁극적인 것에 대한 내적인 욕구는 가치와 질적인 것을 체험해 보고자 하는 열망이다. 그러나 이 열망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을 늘 질적인 것에서 양적인 면에서 보충하고 싶어한다. (신나는 모험이 될 만한 일을 직업으로 택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많은 봉급을 주는 데로 돌아서게 된다.)



#제2장. 가상 모험과 실제 모험 


- 우리는 '동일시' 라는 것을 웃어 넘겨서는 안 된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정상적인 현상이자 강력한 사회적 힘이다. 또한 이것은 모험의 본능에 대한 하나의 귀중한 분출구로서, 이런 분출구가 없다면 이 본능은 개인이나 국가로 하여금 자신이나 남을 위험에 빠뜨리는 방향으로 나가도록 몰아감으로써 더욱 심각한 피해를 낳게 될 것이다.

(동일시 예 :소설, 카니발같은 축제, 영화, 라디오,텔레비전,서커스,축구 시합을 응원하는 팬들, 지지하는 정당이 단 두석이라도 더 차지하게 되면 '우리가 이겼다'라는 사람들 etc) 


- 아이의 놀이는 전부가 훌륭한 모험이다. 특히 자기가 혼자 만들어낸 놀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도 아이의 미래를 미리 추적해볼 수 있다. 어린 시절에 모래 장난을 하며 새로운 나라를 세우곤 했던 료티 원수(프랑스 장성, 식민지 행정가)의 경우 처럼 말이다. 아이의 놀이는 그 아이가 자라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학교 성적보다 더 잘 알려준다. 잘 노는 아이는 장차 자기 일에서도 성공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동의 참된 의미는 모험에 대한 욕구를 실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많은 사람들이 모험에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마련인 소멸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는 이들이 자기의 열정에 다시 불을 지펴 줄 어떤 자극제, 어떤 새로운 활력소를 찾고 있는 것을 도처에서 본다. 이들의 삶은 한 가지 일에서 다른 일로,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광적으로 열중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들이 여러 가지를 추구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일들의 효율성이 크게 떨어진다.....실제로 이런 대의 명분은 활동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 사람은 일하고, 잠자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먹고, 성을 즐기고, 이러한 것이 끝없이 반복된 생활을 한다. 계속해서 사람이 늘어나고, 기계가 늘어나고, 책이 늘어나고, 배워야 할 것이 늘어나겠지만, 인류는 인간 본성의 좁은 한계를(우주 공간에 나가 있다 할지라도)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상을 새로이 생각해 내더라도 언제나 소크라테스 이전의 뭐라는 철학자, 혹은 어떤 중세 수도승이 전에 이미 생각했던 것이라고 누군가가 지적해 줄 것이며, 그에 대한 반론과 그 반론에 대한 반론 역시 이미 나와 있다고 말해 줄 것이다. 삶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 유행은 모험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이며, 모험만이 제공해 줄 수 있는, 정말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만의 개인적인 모험을 하고 싶어하는 갈망이다. 이 갈망은 남과 같은 내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 되고자 하는, 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갈망인 것이다. 


- (어떤 교파이건 간에) 이들은 교리적인 논쟁 끝에 설복당해 마침내 그 교리를 받아 들여 고수하고 있다. 이들이 이 교리를 옹호하는 것은 이것이 또한 자신의 삶에 가치를 주는 영적인 모험과 떨어질 수 없는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신이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연약한 자, 자신의 모험을 하지 못하고 남의 모험만을 따르는 자뿐이다. 그 외의 사람들은 당신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교리만이 아니라 자기들의 보화와 모험도 수호하고 있는 것이다.


#제3장.. 좋은 일 궃은 일 


- 동종 요법(많이 쓰면 건강한 사람이라도 환자 비슷한 증상을 일으키는 약제를 환자에게 조금씩 써서 치료하는 방법)이나 정신 분석, 혹은 인격 의학 분야 뿐만 아니라 기술이나 우주 정복, 또는 재즈에 몰두하는 사람, 자연력 숭배론자, 신지학자, 반전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모두 자기의 이상을 옹호하는 것은 자기의 모험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모험이야말로 바로 이런 이상에 대한 헌신이며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고 전향시키기 위한 분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이상이 똑같이 가치 있다거나 모험의 목표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모험이기만 하면 어떤 모험이건 상관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절대로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진리를 위해, 정의를 위해, 타당한 대의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확신이 없이는 그 어느 것도 모험이 될 수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모험에 대한 본능이 있으며, 좋든 나쁘든 모든 집단적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일종의 맹목적인 힘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자신의 노력을 바칠 만한 목표에 전심으로 자신을 바칠 수 있는 자는 복 있는 자라고 말하고 싶다.


- 식민지에 있다가 귀환한 사람들이 고국의 새로운 생활에 다시 적응하며 겪는 커다란 어려움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유럽에 살만한 공간이 충분치 않고 사람들이 모두 서로의 발을 밟고 다닐 정도라고 느낀다. 물론 이들은 식민지에서 특권을 누렸고 불행히도 그런 삶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이상의 문제가 있다. 즉,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새로 탄생하는 여러 나라에서 그들의 삶은 모험이었던 반면, 유럽에서는 판에 박힌 틀에 자신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 모험은 바람과 희망에 있는 것이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다. 파스칼은 '승리가 아닌 분투만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우리는 사물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에 대한 추구만을 추구할 뿐이다" 라고 말했다.


- 종교의 첫 번째 조건은 우리가 인생의 법칙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적인 생활은 계속되는 새로운 탄생으로만 이루어진다. 사람의 가슴이 산발적으로나마 계속해서 뛰려면 개화, 새로운 선지자, 새로운 모험이 있어야만 한다. 


제4장. 뛰어들기


- 모험은 언제나 자체로 소진되고 있기 때문에 모험의 갱신, 모험의 정기적인 회복이 필요하다. 


- 그러나 정작 어느 분야의 개척자는 일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육감에 의존해야 하는 아마추어들이다. 사도베드로는 어부로서 어느결에 교회의 지도자로 승격되었다. 칼뱅은 법률가로 개혁 신학의 초석을 놓았다. 파스퇴르는 화학자면서 그 시대의 다른 어떤 의학자보다 더 의학의 지평을 넓혔다. 파스칼은 수학자면서 다른 많은 수학자와 마찬가지로 철학을 풍요롭게 했다. 가장 넓은 영역에 걸친 아마추어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폭발적 모험의 시기인 르네상스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아마추어는 자기 취향에 따라 자기 일을 선택하는 사람이며, 이 일이 직업이 된다 해도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좋아하기 때문에 자신을 완전히 바치고 이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 이들은 내가 즐기는 동안에 일한다. 인생으 내게 거대한 체스 놀이와 같다. 체스 놀이도 사실은 패할 위험과 이기고 싶은 소망이 함께하는 모험이다. 그러나 체스 놀이를 하는 사람에게는 늘 이번에 지더라도 다음에 다시 이기리라는 희망이 있다. 한편 인생은 단 한 번 벌이는 경기다. 모두가 직관적으로 인생이라는 엄청난 도박에 대해 알고 있다. 즉, 말의 모든 행보, 선택, 모든 개인적 결단, 모든 전략, 자신을 내던지는 모든 모험이 경기의 남은 부분을 결정할 것이며 그 결과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선수가 시합에 걸려 있는 대가를 의식하면 할수록 그는 말을 움직이는 데 더 망설이게 된다. 체스 결승전에서도 시계를 두고 선수들이 생각할 시간을 제한한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을 모험으로 알면 알수록 여기에 걸려 있는 대가와 말을 움직이는 위험을 더욱 의식하게 되고, 따라서 말을 쓰는 데 망설이게 된다. 


- 내가 첫 번째 책을 낼때 원고를 친구 여섯 명에게 보였고, 그들은 수고스럽게도 모두 베른에 모여서 하루를 꼬박 나와 함께 원고에 대해 논의했다. 그 중 아무도 내게 그것을 출판하라고 권하지 않았다. 한 명이 첫 장을 기고문 형식으로 의학 잡지에 보내 반응을 보라고 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 당신의 모험에 책임 져 주리라고 너무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 그것은 당신의 모험이지 그들의 모험이 아니기 때문이다.......더구나 다른 사람의 조언은 당신 자신의 태도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당신의 결심이 굳으면 찬성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당신이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면 일을 추진하라고 권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 나는 팔에 원고를 끼고 길을 나서 출판사 세 군데를 찾아갔다. 바로 이 부분에서 모험이 진짜로 시작된다. 서재에서 혼자서 글을 쓰고 있는 것까지는 그저 꿈에 불과하다. 모험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모험은 항상 세상을 직접 대면하고 그 평가를 받는 것을 뜻한다......다른 두 출판사에서 거절한 뒤라 이것은 이 여사장에게도 모험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 그 출판사 외에는 출판을 맡기지 않았고, 이 책의 불어 초간본은 그 출판사에서 낸 나의 아홉 번째 책이었다.



제5장. 일의 의미


-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의 경계를 가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다....또한 내가 모든 영역에서 아마추어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는 내 개인 적인 문제-특히 열등감과 자신감의 결핍-도 한 몫 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그 까닭은 프로가 아마추어보다도 훨씬 더 엄격하게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나는 내 지식이 훨씬 못 미치더라도 철학, 신학, 심리학의 영역을 부담 없이 산보할 수 있다. 이런 무지는 프로에게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마추어에게는 이러한 자유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전에 보세이 교회 연구소의 소장이던 핸드릭 크래머 교수와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논쟁이 한창 달아올랐을 때 내가 "당신네 신학자들은..."하고 말하자 그는 내 말을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아니, 난 신학자가 아니고 동양학자요. 신학은 그저 좋아서 하는 거고," 바로 이것이다. 아마추어는 무엇을 좋아해서 하는 사람이다. 아마추어의 매력이나 장점은 그저 좋아서 하는 그것에 있다. 아마추어가 하는 일은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수고이기 때문이다.


- 강연에 뒤이은 토론에서 반대자들은 내게 이렇게 반박했다. "당신의 경우에는 그게 사실일 수 있지만, 그 말이 어떻게 기계적인 일을 반복하는 수많은 근로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타당한 질문은 내 논지를 약화시킨다기보다 확증해 준다. 이것은 내 말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우리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은 자기의 일이 너무 조직화되어 모험의 유혹이 없어지면 고통을 느낀다.

 이런 경우 이들에게 모험은 일이 끝나는 저녁이나 주말이 시작되는 토요일에 시작된다.....더구나 저녁이나 주말의 모험이 즐거운 것일수록 다음날의 일은 더 지겹게 느껴진다. 모험이 생활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주변에서만 추구될 때 사회 전체나 국가의 활력, 경제적 발전, 건강 상태, 이 모든 것이 일과 모험의 전반적인 분리로부터 타격을 입는다. 


제6장. 헌신


- 창조적인 일은 원래 인간의 일이다. 그것은 언제나 모험이다. 일을 통해 모험 욕구를 채우는 것은 노동을 진정한 위치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나 자신도 한때는 이 둘을 분리하려 한 적이 있었다. 종교적인 체험을 한 나는 1937년 의학(내 직업)을 그만두고 교회에서 더 직접적인 사역을 감당할 것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삶을 합쳐 하나로-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삶인 동시에 의사로서의 삶-하라고 하셨다.


제7장. 하나님의 모험


- 모험을 하는 자는 종교적인 색채를 띠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성령의 영감에 휩싸이는 것을 느낀다. 또한 자신이 평범한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을 느낀다. 그 증거는 모험을 하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표현할 때 쓰는 '열렬함Enthusiasm'이라는 단어에 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다. 


- 하나님은 홀로 있는 상태와 고요함을 버리시고 물질계의 무한한 장을 여셨다. 감히 표현해 본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근심의 짐을 지시고, 더구나 이 짐을 늘리신 것이다. 


- 모험은 계속된다. 하나님은 즉각 훨씬 더 위험한 모험을 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즉 모험의 정신을 부여받은 존재, 모험을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창조의 완전한 질서를 뒤엎는 데까지 휩쓸려 갈 수 있는 그런 존재를 만드신 것이다. 


- 성경의 하나님은 행동하는 하나님이다. 이것이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나 모든 다른 종교의 신과 다른 점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삶에 개입하신다. 인간 생활의 종교적인 부분에만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활, 일, 직업에 관심을 기울이시고 이 직업을 진정한 모험으로 바꾸어 놓으신다. 


제2부 위험


제8장. 모험의 특징 


모험의 특징. 


1. 모험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 즉 자기 표현의 한 형태이다.


2. 모험은 혁신을 일으키고 무엇인가를 발명케 한다. 모험은 독창적이다.


3. 모험은 단 하나의 최종 목표를 추구하는 가운데 통일성을 지닌다.


4. 이 목표는 사랑이다. 목표를 제안하는 것도 사랑이며 그 모험의 과정과정을 유지시켜 주는 것도 사랑이다.


5. 마지막으로 모험은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만 한다.


- 우리는 성경이 실존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단 한번도 하나님을 어떤 철학적 개념이나 추상적 본질이나 표현되지 않은 가능성으로 제시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일해 오셨고,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그 분의 능력은 그의 창조 행위이고, 그 분의 선하심은 그 분의 선하신 행위이며, 그 분의 공의는 그 분의 의로우신 행위이다. 하나님의 모험은 스스로를 드러내시고 자기의 생명을 나타내는 하나님 자신이다. 나무 위에서 익어 가고 있는 열매는 그 자체로 생명을 나타내는 것이다. 


- 각 개인은 자기가 손에 잡고 있는 카드를 가지고 논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의 모험이다. 내가 여기서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는 자신을 표현하고 자기 인격을 외부 세계에 드러내고 싶어하는 그것도 가장 개인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 싶어하는, 강렬한 욕구가 있다는 점이다.


- 과학의 모든 새로운 발견은 하나님의 독창적인 발명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과학자는 세계와 그 모든 구성 분자, 모든 천체, 물체의 모든 물리적 화학적 반응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가 기능함으로써 발생하는 기술적인 문제 하나하나에 대한 하나님의 기발한 해결책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새가 날 수 있도록 깃털을 만드셨지만 박쥐는 깃털 없이도 날 수 있게 만드셨다.


- 우리가 삶을 하나님께 맡기면 그 분은 우리의 삶에도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게 하신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을 어느 정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하면 모든 것이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전개된다고 말해 주지 않는가? 


- 만일 그가 신자라면 그 일을 하도록 그를 부르신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인류를 위해 그가 추구하는 일정한 혜택을 조달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제9장, 성공과 실패 


- 우리가 실패할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어떤 모험에 참여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사실 '모험의 맛'을 느끼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위험 부담이다. 위험의 매력은 모험에 따르는 미묘한 이중 감정에 있다. 사람은 모험을 두려워한다.그러나 동시에 모험을 좋아한다. 모험을 크게 좋아할 때는 두려움을 무의식 속에 억압하는데, 두렵지 않다는 느낌과 두려움을 극복했다는 느낌이 그를 흥분시킨다. 


- 어떤 중요한 인물에게서 아주 작은 찬사를 들었을 때나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을 때 우리가 경험하는 쾌감을 생각해 보라. 찬사를 받았을 때 하는 우리의 행동 대부분(예를 들면 겸손한 몸짓)은 더 많은 찬사를 끌어 내기 위한 위장된 수단이다. 아내가 접시를 닦으며 튼 소리로 한숨을 내쉰다. 남편이 와서 도와주기를 원해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가사에 충실한 자신의 정성을 알아주고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 정치나, 전쟁에서, 무대 위에서, 대학에서 또는 교회 내에서의 성공을 생각해 보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더라면, 성공의 기쁨도 없었을 것이다.


- 인간은 자신의 삶을 망쳐버릴 수가 있다. "나는 나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나는 상담실의 친밀한 분위기 속에서 이 비극적인 문구를 얼마나 자주 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생애는 아직 끄난 것이 아니다......이들은 시야가 아주 밝은 사람들, 인류의 문제에 극히 민감한 사람들이다. 무슨 일을 하든, 이들은 과거의 실수의 결과들, 잃어 버린 기회들, 어떠한 부분적 성공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완전한 실패감에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많은 전술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음을 알고 있따. 그러나 전략적인 승리가 그들을 피해 간다고 느낀다. 그들은 성공과 실패의 대차대조표가 대변쪽으로 기우는 것처럼 보여도 삶을 성공으로 마무리하기를 원하는 그들의 간절한 소망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고 느낀다. 

  

- 나는 때때로 이 인류의 보편적 코미디를 지켜 보다가 전율한다. 각 나라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멋있게 꾸며진 응접실과 소문이 좋지 않은 살롱 안의 사람들이, 그리고 대학과 종교적인 회합과 나이트 클럽에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좋아 보이게 하려는 단 한 가지 목표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모두 언제나 자신의 약점이나 흠, 무지, 못된 버릇, 실패가 드러나지나 않을까 불안해 하면서, 자신의 탁월함을 드러내고 다른 이들에게 존경받고 눈에 띄기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경계하고 있다.어떤 이들은 이를 고지식하게 드러내어 허영심 많은 사람으로 간주된다. 어떤 이들은 이를 더 잘 은폐하지만 허영심 많기는 마찬가지이다. 이해 관계가 크다 싶으면, 그들은 모두 비겁한 행동을 할 수도 있고, 이중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고, 잔인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다 고상한 측면이 있다. 즉 인생의 장기판 위에 어떤 조그만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어서 모든 이가 기울이는 이 거대하고 값 나가는 그리고 꾸준하게 경주되는 이 노력은, 그 원천이 인간의 창조적 모험 본능에 있다는 사실이다. 


- 우리는 모두 물고 물리는 치열한 경주에 참여하고 있다. 사심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려는 시도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도입하는 또 하나의 장기말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인생은 너무나 인간적인 범주 안에 제한시켰다고 비판받아서는 안 되는 신학자 칼 바르트에게서 내가 들은 말이다. 자연히 종교인들 가운데는 세상적인 입실 출세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입신 출세주의자들이 추구하고 있는 부와 지위와 쾌락과 명예와 같은 것을 멸시한다. 그러나 그들은 저급한 쾌락을 멸시함으로써 최상의 축복을 성취하기를 희망하는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 겪은 실패에 대하여 어떤 보상을 찾고 있는 하늘 나라의 입신 출세주의자들이다.


- 계속 실패해 온 사람들은 그런 것들(성공을 위한 훈련 과정과 책들)을 따른다거나 읽어 본다 하더라도 별 유익을 얻지 못하고 또 한 번 실패했다는 좌절감과 함께 포기하고 만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 아이디어가 자신에게는 아무런 효험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 많은 만성적인 불구자들이 자신의 영속적인 불구 상태 때문에 다시 일하지 못하게 될까봐 불안해 하면서 앞날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구 상태는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이기는 커녕 위대한 모험의 출발점, 성취와 성공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일 주변에서 재적응이 가능하도록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그들의 열정을 지탱해 줄만한 교제를 적당히 제공해 준다면 말이다. 수잔느 포세가 손수 지휘하는 가운데 많은 선한 사업을 벌이고 있는 연맹은 이러한 원리를 염두에 두고 창설한 것이다. 그녀는 장애자들이 포기해야 했던 직정보다 더 유용한 직업에 착수하기 위해 필요한 교육과 훈련을 제공하고자 프랑스 전역에 스물두 개의 훈련원을 마련하였다.


- 질병은 한편으로 세상적인 경쟁에서 뒤처지게 만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적한 곳을 찾을 수 있는 기회와 유익한 자기 성찰의 기회,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칼뱅은 화려한 경력을 가졌던 한 불구자에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선생님은 이 세상의 명예와 부와 영향력 속에서 하나님에게 자신의 귀를 빌려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아십니다....하나님은 선생님에게 보다 분명히 말씀하시기 위해, 말하자면 선생님을 옆으로 불러내신 것입니다....하나님은 선생님의 귀에 대고 개인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 분의 인생 학교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선생님에게 주신 것입니다."


- 성공을 추구하고, 실패를 피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인생의 절정이나 한창때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장구한 노력이 어떤 열매를 거두었든 간에,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는 대단할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고요함과 평온함이다. 평온함이란 노인쪽에서 그가 젊어 힘이 있을 때에 존중해야 했던 정당한 가치관과 이별, 성공과 실패 너머에 있는, 나이와 죽음의 공격 너머에 있는 다른 가치관과 악수하는 것을 암시한다. 아돌프 포르트만 교수는 "만일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는 노년을 허송한 것이다" 라고 쓰고 있다.


제10장, 실패심리학


- 삶의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때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은 의사가 상담을 요청하는 환자를 돕는 데 심리학을 이용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의과 대학에서는 이제 막 심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있으나 의사는 개업을 하자마다 여러 가지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된다. 어떤 환자는 의과 대학의 고전적 심리학 과정에 전혀 예시된 적이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는가하면, 소망이 없다고 포기한 어떤 환자는 놀라운 회복세를 보이는 것이다. 한편 가벼운 질병에 걸린 환자가 완치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의 길로 치닫기도 한다. 재능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 실패하는가 하면, 별로 재능과 능력이 없는 사람이 성공에서 성공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특히 해부학이나 생리학, 물리학 혹은 화학이 고려하지 못하는 내적 결정론의 개념을 암시하고 있다. 의사는 인생의 성공을 저해하는 최대의 장애물은 신체적인 질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신체적 질환과 같은 장애물에 대해서는 의료 기구와 의술과 충고로 비교적 잘 무장되어 있다. 그러나 정신적 요인에 기인하는 다른 장애물들이 종종 나타나는데, 이러한 장애는 쉽게 제거하기가 어렵다.


- 실패는 더 이상 우연한 일처럼, 혹은 어쩔 수 없는 난관에 부딪혀 패배한 것처럼 보이지 않고 당사자의 마음속에 있는 신비스럽고 비밀스런 충동의 영향 때문인 것같이 보인다.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가 '실패를 자유롭게 선택한 것' 이라고 질타하던 이유이다. 우리는 스스로 실패에 대해 책임을 느끼게 하고, 실패의 희생자라기보다 실패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 반대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심리적 분석은 이러한 해석의 타당성을 계속해서 확증해 주고 있다.


- 어둡고 적대적인 힘으로 우리의 의식적인 소망을 반대하는 이 메커니즘은 더 심각학 양상을 띨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실패 노이로제 증상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 이 때 실패 노이로제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마음에 두고 열심을 내고 있는 공부나 직업, 결혼과 같은 일의 실패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매일같이 상담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거듭 발견하는 사실 하나는, 실패하는 사람들이 성공하려고 가장 많이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별로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노력한다. 하지만 너무나 노력하고 노심 초사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다.


- 일단 실수를 향한 경주가 시작되면 어쩔 수 없이 비극적인 악순환의 고리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성공하려는 불안이 결국 성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 악숙환의 고리에 빠져 들었다 하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은 더 커질 것이다. 불안은 두려움을 자아낸다. 두려움은 영을 마비시켜 기를 꺾어 놓고, 기쁨을 앗아가고, 생명력을 죽이며, 자기 중심적인 태도를 심어 주고, 마음을 사로잡아 모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초조와 불안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 완전에 대한 야망의 악순환도 있다. 자신을 회복시켜 보려는 열망에 빠져 있는 사람은 평범한 삶을 증오한다. 따라서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더 많은 진보를 위한 촉진제가 될 수 있는 부분적인 성공에서도 아무런 기쁨을 발견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발견한다. 몽떼뉴는 사람들이 종종 건강해지려는 노력 때문에 병들 때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 알프레드 애들러의 연구 업적은 우리에게 열등감의 악순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준다. 열등감에 빠진 사람은 계속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과대 평가하고, 그들의 고충과 어려움과 실패를 인식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조직적인 자기 멸시의 지경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가치를 과소 평가한다. 


- 자신을 공평하게 판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너무나 과신한다. 이는 별로 호감을 주지 못하는 특질로서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평범한 인격으로 간주한다.그러나 보다 민감하고 보다 성숙하게 타인에게 호감을 주는 어떤 사람들은 일종의 자기 편견에 빠진다.


-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제일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이다...인생에 얼마나 많은 것이 걸려 있는가를 누구보다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완전함과 봉사에 대하여 보다 높은 이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데 스스로가 얼마나 부족한가 하는 것만을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 어떤 사람에게 "스스로에 대하여 확신과 자신을 가지세요" 하고 말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에게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약점을 알고 이를 과장하기 떄문이며 감정의 악순환에서 야기되는 '무력화시키는 효과'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의 실패들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그가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마치 그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어려움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에게 해주는 것이 자신감을 가지라는 권면의 말뿐이라면, 그는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이 시점에서 나의 '칼뱅주의적 비관주의'가 한몫할 수 있다. 나는 사람이 진실하다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 항상 실망하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인간에 관한한 나는 비관주의자이지만, 하나님에 관한한 나는 낙관주의자다.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자신을 신뢰하는 것보다 더 견고한 신뢰성이 있음을 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믿음)가 우리 자신에 대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앞으로 전진하게 하며, 우리를 자극해 결연한 모험으로 몰아간다는 것을 안다.


- 나에게 하나님이 환자의 생활을 변화시티고 과거의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기 회의에 대한 승리를 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나 자신의 경험이다. 그러므로 확신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담자가 소유하고 있는 특질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자연적인 확신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하실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가 내담자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초자연적인 확신이다.

 비그리스도인 정신분석학자의 경우에도 상황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유념하라. 그는 정신분석학자로서의 수련 과정에서 광범위한 변혁을 경험했다. 이러한 경험은 환자의 변화 가능성을 확신하게 만든다. 환자는 이 확신을 감지하며, 비록 그의 정신분석의가 상담 이론에 따라 침묵을 유지하는 프로이트 학설 지지지라 할지라도 그가 보여주는 확신으로 말미암아 도움을 받는다. 모든 성공적인 정신 치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적 현상 가운데 하나는 전이 과정이다. 만일 의사가 불신자라면, 그는 자신의 변화나 환자의 변화를 하나님의 도우심 덕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기교 때문이라고 치부할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 나는 모든 치유가 하나님꼐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안다. 의사나 환자가 그것을 의식하든 하지 않든, 모든 치유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모든 기술은 은혜의 도구에 불과한것이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그를 붙들고 있다는 확신보다 연약한 사람에게 효과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의 연약함을 공공연히 시인하면서 사도 바울이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하고 물었을 때, 그가 뜻한바가 이것이 아니었겠는가! 


- 모험적인 삶은 두려움이 없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각종 두려움을 충분히 인지하는 가운데 영위되는 삶이다. 모험적인 삶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삶이다.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자신보다 덜 두려워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열등감을 갖는다. 모든 사람을 두려움을 느끼며 발작적으로 두려움에 떠는 사람도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는 두려움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두려움을 무의식 속에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 동물의 경우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활력소가 되어 준다. 반면에 사람의 경우에는 두려움이 생명을 해치는 작용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끊임없이 학업을 연장하는 학생들은 시험이 두려워 졸업을 뒤로 미루는 것이다. 그들은 시험에 실패하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진로 선택에서 실패하고 삶에서 실패한다. 그러나 시험으로부터 도피하는 것보다는 시험에 실패하는 것이 언제나 더 좋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면, 하나도 성사되는 것이 없다"는 격언을 기억하라. 


- 많은 사람들이 나의 상담실에 찾아와 정직하게 그들 삶의 대차대조표를 그린다. 때때로 그들은 한쪽 방향의 실패를 피하려고 노력하다가 다른 방향에서 더 큰 실패를 겪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무의미하게 되었고 모험 감각을 상실하게 되었다. 


- 인생을 누리며 사는 대신에 늘 삶을 준비하면서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충분히 준비되었다고 느끼거나 이만 하면 되었다고 느끼는 적이 없다. 그들은 학위에 학위를 더하고......끝없는 안전 조치를 취한다.....그러나 사실상 그들의 노력은 자신감 부족에 대한 보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이 많이 준비한 것에 대한 유일한 결과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만 증가했을 뿐 성공 가능성은 그만큼 감소했따는 것이다. 


제11장. 역설들


- 책임을 부인하는 최상의 방법은 책임을하나님께로 돌리거나 마귀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 자제력을 생각해 보자. 자제력이 부족한 사람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너무나 자제력이 잘 주입되어 있어서 자기 통제의 노예가 되어 있다....자발적인 즉흥성이 없이 모험은 불가능한 것이다.


- 어떤 사람은 기질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대담하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위험 부담을 판단하는 본능적인 감각이 있다. 그들의 삶 가운데 모험의 맛을 지탱하기에 충분한 만큼의 위험을 감수한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많은 위험을 피하는 법을 안다......그들은 자기가 '행운의 별'에 태어났기 때문에 성공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행운의 별'에 대한 믿음은 사람이 인생의 모든 상황을 성공하도록 이끄는 보증이 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경우, 즉 보다 반추적으로 내성적인 부류의 사람에게는, 주저의 기제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일단 머뭇거림의 기제가 작동하면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된다. 그들은 주저하는 마음을 다잡지 못한다. 문제를 마음속으로 되뇌이며 분석할수록 그리고 있을 수 없는 확신에 도달하려고 애쓸수록, 무엇을 해야 할지를 분명히 볼 수가 없게 된다.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증가하고,이 두려움이 자신을 삼켜 버리리라는 두려움도 더불어 증가한다.갈등과 번민은 자라나고, 이와 함께 증가하는 불안은 분명히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마비시킨다. 그들은 하나의 난관에서 또 다른 난관으로 빠져든다. 그들은 논리와 감성, 사랑과 정의, 모험에 대한 욕구와 안전에 대한 욕구, 자연과 도덕 사이에서 갈등한다. 모든 문제는 막다른 골목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두려움의 파도 앞에서 다만 세 가지의 가능한 태도가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을 억압하고 자신감이 있는 척하지만 스스로 속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옳다는 주장을 함으로 자신 있음을 거듭 다짐한다. 이들은 남의 충고 듣기를 거부한다. 이들은 두려움과 의심의 문을 다시 열 것 같은 반대 의견은 모조리 밀쳐내 버린다.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에 몸을 맡긴다. 이들은 모험을 포기하고 일상적인 생활이나 백일몽 속으로 도피함으로써 두려움에 항복한다. 세 번째 집단은 자신의 두려움을 하나님에게 맡긴다. 이 때 이들은 번민을 넘어,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부분에 대한 본능적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누리는 것과 똑같은 확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 우리는 이성이나 감정을 부인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이 이둘을 지휘해 주시기를 구한다. 우리는 무모한 대담성도 발휘할 수 있게 되고 버리고 포기할 것은 과감히 포기하게 된다. 우리는 성공을 위한 성공이나 모험을 위한 모험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이 뜻하시고 명하시고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분량만큼만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 사회학자 요셉 폴리에Josoeph Folliet 교수는 여러 문명이 너무나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패망했음을 설명하였다. 그는 "동시에 성공도 되고 실패도 되는 완성도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는 우리에게 전쟁에서 어느 쪽이 진정으로 승리한 것인가를 말하기가 쉽지 않다고 상기해 주었다. 때때로 우리는 군사력으로 승리한 쪽이 아니고 실은 문명의 근본 원리를 전수해 준 패망 국가가 진정한 승리자임을 알 수 있다.


- 나는 환자가 불안한 미소를 띠고 나에게 "선생님은 분명 제가 균형을 잃고 있다고 생각하시죠?하고 말할 때 이것을 상기하곤 한다. 그리고 나는 그가 외로운 대열에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세계에 위대한 문학과 사상,예술과 믿음의 보고를 안겨 준 사람들은 대부분이 균형을 잃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물론 나는 환자가 앓고 있는 고통스런 징후로부터 그를 자유케 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그를 치료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질병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에 관심이 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비록 병들었다 하더라도 열매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는 아픈 사람을 보고 그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최대 비극은 사람이 너무나 완전하게 적응해서 인격자가 되기를 중단하고 로봇이 되는 것이다. 사회 안에서 자신을 위한 자리를 찾을 수 없는 사람에 대해 그 당사자보다 사회가 더 책임을 져야 할 경우가 많다......나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공부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뮤니히 학교로부터 열다섯 살에 퇴학당하고, 취리히 고등기술학교 입학 시험에 불합격했으며, 수학 조교의 자리도 유지하지 못했고 사립 기숙 학교의 단순한 가정 교사 자리에서 쫓겨나 베를린에 있는 특허국의 일자리로 만족하여야 했다는 것을 읽었다.


- 성공과 실패를 규정하기한 극히 어려운 것이다. 원자 폭탄을 만든 것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오늘의 실패는 내일의 성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또 오늘의 성공이내일은 하나의 실패일 수도있다. 나는 종종 부자들 가운데 자기들이 모아 놓은 재산을 참으로 누리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곤 했다. 


- 우리의 사회적 자아가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사회가 인정한다.우리 인격의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과 우리 관계의 조화 여부에 달려 있다. 우리의 가면, 즉 사회적 자아는 사회에서 성공에 성공을 거듭할 수 있지만-예술과 문화, 도덕 그리고 영적인 분야에서 순수한 성공을 거둘 수 있지만-동시에 우리 인격은 밑바닥에서 심오한 실패감을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사르트르가 말한 대로, 사회는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지 못한 사람들에게 냉정하다. " 사회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으면 멸시하는데, 사회적 혐오는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 사회의 임위적인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워서 양심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나는 아무도 완전히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분의 신성을 나타내는 징표이다. 


-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성공이 나에게 이익이 될 때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우리의 박수는 그들의 영광에 우리도 동참할 수 있도록 우리를 그들의 진영에 집어넣을 심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어둠 속에 몰아넣는 성공에 대하여는 제대로 평가해 주기 어려운 것이 상례이다. 이것은 말썽 많은 비판 정신과 경쟁 의식의 원천이자 특히 학자들, 예술가들, 작가들, 정치가들, 성직자들 그리고 의사들과 같이 고상한 직업을 가진 자들 사이에 깔려 있는 시기 질투의 원천이기도 하다.


제12장. 독신과 결혼


- 성경에서 말하듯이, 명백히 여자는 남자를 '돕는 사람helper'으로, '적합한 배필fit'이 되도록 창조되었다. 남자보다여자가 더욱 '인격과 인격적인 유대'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어떤 사상에 전념해 보아도, 그녀는 남편이나 아이들에게헌신하는 데서 경험하는 것과 같은 만족감을 결코 얻을 수 없다. 여성이 결혼 외에 가장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곳은, 그녀가 도와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남자를 도와서 그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친밀하게 협력한 기회를 주는 직업이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가끔, 사업가의 개인 비서나 수술실의 간호사가 학교 교사보다도 독신 생활을 더 잘 견뎌 나간다는 것을 발견한다. 


- 쉬운 인생이 있는가? 없다. 진정한 문제는, 어떤 사람이 결혼을 한다면 그 결혼을 성공적으로 만드는 것,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독신 생활을 성공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어떤 소명이든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것이다. 이는 마드렌느 랑베르또가 잘 표현하였다. "종국에 가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혼이나 독신이 아니라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 우리 인생의 짐이 무엇이건 간에 - 짐이 없는 인생은 없다 - 확신을 가지고 살지 않는 한 우리는 성취감을 밝ㄴ할 수 없다. 그리고 인생을 확신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곧 모험의 정신을 가지고, 모험을 하면서 산다는것이다.


- 종종 독신녀들이 내게 말하기를, 하나님은 자기를 다른 사람보다 덜 사랑하시는데, 그것은 그 분이 자기를 독신녀로 운명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정말로 하나님이 그녀를 독신녀로 살도록 '운명지웠단' 말인가? 하나님은 전적인 사랑으로 그분의 모든 자녀를 사랑하시는 게 아니란 말인가? 하나님이 고통을 겪기를 원하실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은 그 분이 심하게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하고 계심을 안다....


-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우리 모두가 인생에서 성취감과 보람을 찾기 원하신다는것 그리고 우리의 환경과 좌절과 고통이 어떠하건 간에 우리를 향한 목적, 즉 우리의 현재 삶에서 완전한 충족을 갖기 원하심을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어떤 다른 삶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삶을 하나님 아래서 살아갈 때, 우리의 인간적 운명 곧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위대한 모험을 성취할 수 있다. 


- (외딴 동굴의 엘리야에게 임한 '작고 세미한 음성'의 하나님) 모험이 다시 시작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접촉에서이다. 그 지점에서, 우리를 붙잡고 있던 너무나 인간적이고 너무나 유치한 '성공 혹은 실패'라는 딜레마가 풀리게 된다. 성공이라는 금빛나는 우리cage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하나님의 임재하에서만 우리의 성공이 쓸모없음을 측량하게 되고 우리의 삶이 성공적이었음을 주장하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제13장. 실패의 교훈


- 어떤 이들은 이것이 전혀 정직하지 않은 '교묘한 속임수' 라고 느낀다. 처음에 문제가 제시된다 - 예를 들면, 성공과 실패의 문제가 제시되고 그것의 복잡함이 무서울 정도로 드러난다 - 그러다가 갑자기, 어떤 예화의 도움으로 그 문제가 사라진다. "믿기만 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나는 앞에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성공에 대한 긴박한 욕망과 실패로 인해 받은 심각한 상처를 묘사했다. 나는 기혼이건 미혼이건간에 한 사람의 삶을 성공적인 것으로 만드는 일에 대해 말했다. 그러다가 나는 느닷없이 사라노 박사의 친구와 더불어 단언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실패했다고! 이는 죄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처음에 죄의 무서움에 대해 듣고, 다음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죄로부터 돌아서야 하는 것에 대해서 듣는다. 그리고는 믿는 이들이 왜 아직 믿지 않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죄를 짓는가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 사실에 대해 즐거워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왜냐하면 죄가 없이는 은혜를 누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독자들은, 이 역설이야말로 참으로 쉬운 탈출구라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의 신앙을 선언하는 그리스도인들보다는, 마음을 혼란케 하는 이의와 의심을 표현하는 이런 독자들에게 나는 훨씬 더 동정심을느낀다. 내 직업은 권면하거나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학자들의 일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비난한다. 곧 우리는 예화를 사용해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향이 강하며, 예화는 그런 문제를 다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비난을 들을 때, 내게는 그들이 옳은 듯하다. 우리는 신앙의 승리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얼마나 눈물로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에 대해 충분히 말하지 않는 것 같다. 가장 훌륭한 종교적인 체험을 한 후에도 좀처럼 가시지 않는 어려움과 의심에 대해서도 충분히 말하지 않는 것 같다. 엘리야가 동굴 속에서흘린 눈물을 기억하라.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겪어야 했던, 그 얼굴로 흘러내리던 피눈물을 기억하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통하여 자유를 얻게 되었으나, 사람들은 그들의 자유에 대해서만 말할 뿐 그들의 고난에 대해서는 자주 말하지 않는다. 내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들은 바로 눈물로 얼룩진 날들이었다.


나는 유일한 안전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안에 있음을 안다. 그러나 나는 날마다 내 안에서 죄를 찾아 내도록 그리고 더욱 죄의 권세를 깨닫도록 내몰린다. 나는 우리의 노력과 성공이 쓸모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비판에 대해 무감각한 것도 아니며 성공하기를 덜 갈망하는 것도 아니다.  양심의 가책으로 가득한 것은, 내가 도와주어야 했을 병든 사람들을 도와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약속 시간이 되었는데도 환자가 나타나지 않을 때, 이미 그가 자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이 순간에 나는 이 책을 성공작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은 어려움에 처한 미지의 독자에게 보탬이 되기를 원하는,나의 직업에 대한 충성심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또한 허영심에도 자극을 받고 있는데, 그것은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고, 누군가 내 말을 들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악과 선행, 좋고 나쁜 자질들,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동기들은 언제나 복잡하게 엉켜 있는 것이다.


- 신앙이 인생을 쉽게 해주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도 회의론자와 마찬가지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 사실 그들은 회의론자가 아니기 때문에 실패를 견디기 더 어렵다.


- 나 혹은 다른 이들이 하나님과 대면하는 데서 일어났던 일에 관한 성경 이야기나 예화를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사실이기 때문이고, 정말로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신앙이 가져다 주는 해결책보다는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해답에 대해 더 많이 말해야 할 것 같다. 거기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의 문제는 합리적인 해결책이 없이 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해결책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답변이다. 하나님의 대답은 종종 우리가 기대한 것과 다르다. 그 분은 우리의 성공 속에서 말씀하시고, 실패 속에서도 말씀하신다. 그 분은 우리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고백할 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이는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종종 이 질문을 받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대답이다. 이것은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 우리는 경건한 포부 속에 겪게 되는 실패와 실망의 어려운 길이 성공보다도 우리를 더 멀리 이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것이라"(사 14:22). 그리고 플리그가 보여 주었듯이, 참된 소망, 즉 진정으로 인간적인 소망은 사람이 단순히 원하는 것 이상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소망은 사람이 더 이상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때, 즉 완전한 절망의 순간에 시작된다. 우리는 사람의 가치가 성공에 의해서보다는 부당한 실패를 견디는 방법에 의해 더 잘 측정될 수 있음을 안다. 우리는 무한정한 성공보다 사람에게 더 위험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언젠가 그는, 우리의 성공은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지만 실패는 우리 자신에게 유익이 됨을 이해할 것이다. 


- 기독교의 복음은, 그 어느 다른 종교도 우리에게 주지 못하는 답을 내어 놓는다. 우리는 성공에 대해 그리고 믿음의 승리에 대해 말할 뿐 아니라 핍박에 대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행복은 우리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포기하는 가난한 심령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 분은 좁은문을 말하며, 우리에게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 14:27)고 말씀하신다. 


- 그 분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 26:38)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는 기도하셨다. 그 분은 아버지께 고통을 면하게 해 달라고 비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두려운 침묵에 직면해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하고 덧붙이셨다. 하나님의 뜻, 이것이 바로 문제를 푸는 열쇠이다.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이 목적은 우리가 순종하는 가운데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실패를 통해서도 성취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성경 전체가 이를 선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분의 계획을 깨닫고 성취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비추어 보면 문제는 새로운 지평으로 옮겨진다. 이제 문제는 더 이상 어떤 사람이 실패했느냐 성공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며, 그가 하는 모험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냐 하나님께 맞서는 것이냐가 된다. 물론 성공한다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야망의 충족에서 오는 즐거움이라면, 그 즐거움은 매우 기만적인 것이다. 물론 실패는 여전히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고통이 하나님의 목적 중 일부라면 고통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겪는 실패는 사실상 실패가 아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최고의 실패인 동시에 최고의 승리인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공과 실패 사이에 명확한 경계를 설정할 수 없다는 고통스런 발견에 대한 진정한 해답이다. 무엇이 성공이며 무엇이 실패인가? 성경의 대답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당신은 그 분에게 순종하고 있는가?' 이다.


- 나는 문제가 쉬운 것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목적이 어디 있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객관적인 기준을 주지 않는다. 성경은 언제나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주저하면서 믿음을 구하는 것과 고통스런 번민과 불확실한 시련과 여러 번의 실수와 과오를 거쳐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끈기 있게 추구하는 것 역시 성경이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사람이 스스로 선과 악을 안다고 주장할 때, 그는 자신을 미혹하여 하나님을 찾는 대신 성공을 좇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길에는 언제나 약간의 불확실성이 있으며 - 심지어는 우리 신자들에게도 -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게 하고, 끊임없이 그 분의 인도하심을 구하게 만든다.

 우리는 삶의 어느 영역에서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불확실함을 느낀다. 갈등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끝까지 버텨야 할지 아니면 포기하고 굴복해야 할지를 몰라 번민한다. 질병, 노쇠 혹은 죽음의 위협이 올 때마다 문제가 제기된다. 그에 맞서 싸워야 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모순은 외양적인 것일 뿐이다. 우리는 병을 고치기 위해 끝까지 싸울 수도 있으며 그래서 성공을 한다면 우리는 그 성공을 하나님의 복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실패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실패를 받아들이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보게 된느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처럼 우리도 "실패 속에서도 믿는 이는 하나님의 승리를 발견한다" 고 말할 수 있다.


- 논리학은 수학에서는 필수적일지 몰라도 인생을 이해하는 데는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 인생을 이해하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것이며, 그 분의 의도를, 여러 사건을 통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려 하는지를, 성공과 실패를 사용하여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실지를 이해하련느 것이다. 

 성경적 관점의 무한한 가치는, 그것이 삶의 무한한 사건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하게 한다는 데 있다. 이제 더 이상 어떤 일이 행운인가 불행인가, 우리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 성공인가 실패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바울은 많은 실패와 시련으로 연단된 후 성공적인 선교 사역을 마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박해와 투옥, 그리고 순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체포된다. 그러나 주님은 감옥에 나타나셔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의 투옥은 하나님의 계획 아래서, 새로운 전도 기회가 되었다. 


-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바로 이러한 '태도의 역전'이 수많은 순교자와 신앙의 승리자를 배출했으며, 심지어 가장 큰 실패 가운데서도 그들에게 불굴의 힘을 주었고, 그들로 하여금 사람이나 사건을 전혀 개의치 않는 완전한 독립심을 갖게 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바울은 확증한다. '모든 것', 즉 우리의 실패 속에서와같이 성공 속에서도 그리고 우리의 성공 속에서와 같이 우리의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 분은 치유를 통해서 그리고 병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중요한 것은 그 분의 말씀을 듣는 것, 우리 자신이  인도받도록 하는 것, 그 분이 우리를 부르신 대로 모든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그 모험에 과감하게 직면하는 것이다. "인생은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모험이다!"


제14장. 안전 추구 본능


- 사람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사람은 어느 정도 그 법칙(자동성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뭔가 새로운 것을 발명하거나 발견할 때의 기쁨을 때때로 경험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어떤 새들이 둥지를 틀 때 분명히 나타나는 기막힌 건축학적인 감각을 예로 들면서, 포르트만은 동물이 자동 반응의 포로임을 명백히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둥지가 태고적부터 항상 똑같은 반면 건축가는 새로운 형태를 생각해냄으로써 전통주의자들을 화나게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동물에게는 모든 것이 반사, 습관, 반복, 훈련이다.....사람에게 독특한 것은 모험을 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는 것이며, 성경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고 말한 점이 그러한 본능 속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인다. 


- 사람 속에는 모험의 본능과 정착의 본능 사이의 갈등이 있다. 사람은 정착 본능을 누를 때에만 모험의 본능을 따를 수 있으며, 모험의 본능을 억눌러야만 정착의 본능을 만족시킬 수 있다. 


- 사람들은 자신을 살피면 살필수록 그만큼 행동을 적게 한다. 적게 행동할수록 그들이 해야 할 바를 알아내는 것이 어렵게 된다. 그들은 쓸데없이, 심지어 하나님에게까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따져 묻지만 거의 대답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멈춰 서 있을 때가 아니라 뭔가 하고 있을 때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의 방향을 잡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편은 양립할 수 없는 열망 사이의 긴장을 결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두 열망을 동시에 이룰 수는 없으며, 오직 한쪽을 먼저 실행한 다음 다른 것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가능하다면 올바른 때에, 올바른 때,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행위의 문제가 다분히 일시에 결정될 수 있는 원칙의 문제가 아니고 당시 상황에 따라 답이 나오는 실제적인 문제라고 말하는 것이다.볼테르Voltaire는 사람이 시간을 낭비하는 네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일을 잘못하는 것, 잘못된 때에 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 오직 동물들만이 전적으로 자발적(무의식적)이며, 지나가는 순간순간의 느낌으로 순수하게 산다....그러나 어른들에게 남 모르는 눈물을 감추지 않은 웃음이란 없으며, 또한 이면에 어느 정도 억압된 기쁨이 없는 눈물은 없다. 어느 정도 신중함이 없는 자기 희생은 없으며, 어느 정도 주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완전히 모아 쌓으려는 마음도 없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이며 또한 사회의 운명이기도 하다....사회는 콜럼버스나 잔 다르크를 찬양하고, 이와 같은 과거의 모험을 경탄해 마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는 오늘날의 모험가들을 박해하며, 그들을 부적응자라 부른다. 


제 3 부 선택


제15장. 가치 있는 모험 


- 동물의 행동이 녹음된 전축 판을 트는 것이라면, 인간은 자기 작품을, 덜 아름다울지 몰라도 자신만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곡을 즉흥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 내게는 장 폴 사르트르의 견해가 더욱 진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간은 가치에 자신을 바치는 한에서만 인간일 뿐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그 가치를 스스로 임의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말했다. 실로 가치란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임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사르트르의 탄식이 나온다. 가치의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그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괴롭다. 사르트르와 견해를 같이하기를 한사코 거부하기는 하지만 삶이 부조리하다고 주장하는 카뮈 역시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 판단이다" 라고 말했다. 그는 반항을 인간의 위대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옹호하면서 "모든 반역은 암묵적으로 어떤 가치를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 한 젊은 여성을 만났는데, 그는 오랜 동안 신앙 안에서 살았으나 그 신앙은 유치하고 순진한 것이었다...그는 자신이 고통스런 사막을 건너고 있으며 그 여정 중에 자신의 신앙을 잃어 버렸다고 느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미지수(X)'라고 불렀다. 나는 이 호칭에 반해 버렸다. 이 이름은 내게 철학자나 신학자의 많은 정의보다 더욱 타당하고 그 시사하는 의미가 더욱 풍부하게 느껴졌다. 근본적으로 이 여성의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이 여전히 자리하고 계신다. 그 분은 그저 자신의 가명만을 바꾸셨을 뿐이다. 


- 어떤 선입견이나 이미 세워져 있는 체계에 기대지 않고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 지 진정으로 개인적인 통찰을 얻기 위해 현실적으로 진지하게 추구하는 사람은 참으로 외롭고, 안타까우리만큼 확신이 서지 않는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내게 정말 부족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마음 속에서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문제는 나 자신을 이해하고 하나님이 정말 '내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시는가 아는 것이며, '내가' 진리인 진리를 찾고, 

'내가 생명을 걸 수 있는 사상'을 찾는 일이다. 


- 모든 인간은 종교적인 존재임이 드러난다. 인간은 임의대로 선택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질서와 자신이 연결되어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 질서를 따를 때는 옳은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인간은 속으로 모험과 창조에 대한 욕구를 품지만, 어떤 보편적인 가치에 의거하지 않고 무작정 아무 것이나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선택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도 없다. 선택하지 않는 것은 포기, 무책임, 비인간 됨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교수는 말한다. "최악의 실패는 바로 행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인간은 절반만을 선택하여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었듯이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열상 18:21)하고 있을 수도 없다. 엘리야는 진정한 모험에는 온전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누구도 가볍게 선택한 모험에 전적인 확신을 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어떤 대의이건 진정으로 그것에 헌신하려면 그 대의가 자신을 꽉 사로잡고 있다고 당사자가 느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즉, 그 대의가 그 사람에게 가치 있는 일로서 뚜렷이 각인되어야 하는 것이다. 카뮈는 인간을 일컬어, "살 만한 이유를 주는 사상 혹은 환상을 역설적이게도 죽도록 찾고 있다"고 말한다.


제16장. 하나님의 인도 


- 하나님은 이 물리적인 세계를 아주 적극적으로 다스리신다. 물은 예외없이 섭시 0º 씨에서 언다. 어떤 천체도 만유 인력에 의해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식물 조직은 전적으로 생물학적 법칙과 굴성의 지배를 받는다. 동물의 행동은 생리와 본능에 따라 결정된다. 

 오직 인간만이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다. 나는 인간의 자유와 여기에서 연유한 도덕적 책임감을 믿는 모든 사람들과 적어도 이 부분에서 의견을 함께하고 있다.


- 나는 언젠가 동물학자인 아돌프 포르트만 교수에게 인간과 동물의 행동에서 가장 기초적인 차이점이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다. 교수의 대답은 "인간은 주어진 자극에 대해 반응을 늦출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애컨대 개에게 먹이를 주어 보라. 당장 달려들어서 먹기 바쁘다. 반면은 인간은 적당한 때에 더 맛있게 먹을 요량으로 기다림을 즐기면서 식사를 미룰 줄 안다.

 선택이란 말은 사실상 자유를 이르는 말이다.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하거나 안 하기로 마음먹을 수가 있고, 언제 할지도 결정할 수 있다......그 결과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늘 책임을 느끼게 된다. ...이제 그의 행동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일 뿐 아니라 가치 있다고 판단된 목표를 실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판단이 프로이트 학파가 주장하듯 단지 사회적인 구속에 의해 암시된 것일 뿐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인간은 자신이 그 판단을 따르는 일이나 행동을 하거나, 미루는 일을 자유로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저는 선생님이 권하신 대로 묵상도 하고 경건의 시간도 가져 보았지만 아무 음성도 듣지 못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나는 나도 듣지 못했다고 말해 준다. 만일 우월감이 있는 사람이 위와 같은 말을 하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의기양양해서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자신을 거부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씀하시면서 내게는 안 하시다니...'


-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사실 은유에 지나지 않을 경우가 많다. 많은 이에게 하나님께 청종하는 법을 가르친 프랭크 부크먼 박사는 실제로 아주 역설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즉, '세밀한 소리'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떤 생각이 우리 마음을 지나갈 때 어떤 경우는 그것을 신령한 영감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는 의사로서 여기에서 지적해 둘 것이 있다. 즉, 환각에 시달리면서 어떤 음성을 듣는다는 정신 질환자보다 더 신령한 인도를 받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편집증 환자는 지체없이 그 음성에 대한 특정한 해석과 모험에 뛰어들며, 자신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를 받으며 행동하는 것임을 마음에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 점에 대해서 입씨름을 해 봐야 소용 없다. 사람이 권력을 갖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영적인 권력은 로마 황제가 휘두르는 권력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 중요한 것은 성경이나 교회, 친구의 도움 없이, 또 때로는 의학의 도움 없이 홀로 이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회의와 깨달음 사이의,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철저한 의심과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건방진 주장 사이의 위태로운 절벽 위를 걷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마음에 떠오르는 어떤 생각에서 하나님의 영감을 분별할 수 있으면서도 여전히 인간의 항구적인 불확실한 상태를 깨달아 겸손한 신중함을 유지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다. 나 자신이 자주 경험한 바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 명령에 대해 확신이 없을 때면 계속해서 명령을 반복해 주신다. 나는 '경건의 시간'을 가지면서 일지에 스무 번, 서른 번이나 같은 명령을 적게 되고서야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명령임을 깨닫고 순종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ㄷ잘못을 범하게 될 그 모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맞추어 우리의 삶이라는 모험을 해 나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나 나는 많은 신자들이 어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를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이 침묵하셔서 이들이 많이 당황하는 것을 보았다. 왜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으셨을까? 그들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했으나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그 뜻을 알려달라고, 그래서 더 이상 망설임과 불확실함을 겪지 않게 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나 자신이 이런 고통스런 경험을 해 보았고, 환자들이 내게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런 일이 자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시련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자신 안의 어떤 방해물이 자신과 하나님을 갈라 놓고 있는지 스스로를 살펴보게 되고, 또 때로는 하나님이 제기하시는 문제,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기 전에 우리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그런 아주 다른 문제를 깨닫게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내게 한 전도자가 하나님의 영감에 대해 확신 있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영감을 쉽게 받은 것처럼 보이더라고 말하였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그 전도자보다 덜 사랑한다고 생각하여 속이 상해 있었다. 나는 이것이 심리적인 문제일 뿐이라고 안심시켜 주고자 한다. 즉, 이 사람은 망설이는 성격인 반면 그 전도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항상 자신감에 차 있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일은 단순하지도 쉽지도 않다. 우리가 열망한느 최고의 삶의 질, 즉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모험의 삶은 결코 완전하게 획득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는 그것을 부분적으로 알 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언제나 분명하게 아신다. 하나님은 실로 직접 말씀하시고 또 그 말씀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지만, 이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사무엘서에 멋진 구절이 나와 있다. "(그)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사무엘상 3:1).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아무런 애도 쓰지 않고 있는 바로 그런 순간에 우리는 기드온과 같이 (사사기 6:12)전혀 예기치 않게 부르심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마다 정확하고 확실하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명령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살아 가는 것이 불가능 했을 것이다....내 생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단계마다 길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대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눈 딱 감고 자신을 내어 드려야만 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별과 동물은 하나님의 뜻을 몰라도 하나님에게 순종한다. 이들이 하나님의 체계적인 계획에서 빗나가지 않는 것은 자기 궤도와 본능을 따르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자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비생식적 기능도 전적으로 자동적으로 즐거이 하나님에게 순종한다. 우리의 심장은 박동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또는 어떤 박자로 박동해야 할지 알고 싶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종교의 의미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묶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인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를 인도해 주십사고 아뢰는 것이다.


- 너무나 일찍, 부모가 대신 결정해 주어야 할 어릴 떄부터 선택을 해야 할 처지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 

 부모의 잘못된 관념과 소홀한 관심 때문에 그는 언제 내려칠지 모르는 불벼락을 피하기 위해 아주 어려서부터 행동을 하나하나 따져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부모의 보호를 확실히 믿는 어린아이의 걱정 근심 없는 생활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민감한 판단력과 인간의 운명이라는 커다란 문제에 대한 예민함, 지적인 발달과 철학에 대한 관심이 자극되었고, 또 이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짐은 어린 그의 어개에는 너무 무거운 것이었다. 나중에 그는 기독교를 믿게 되었지만, 이는 그에게 위로가 되기는 커녕 더욱 큰 짐을 안겨 주었다. 즉,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본이 되는 정결한 생활로 신앙을 증거해야 한다는 짐을 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전 이제부터는 선택하지 않기로 했습니다"라고 한 말을 내가 왜 반가워했는지 이제 이해가 갈 것이다. 나는 이것을 그가 회복하고 있음을 알리는 표시로 보았다. 그의 마음이 느긋해지고 불안감이 감소되며 평생토록 그리도 큰 짐이 되었던 과도하게 민감한 판단력을 떨쳐 버리는 표시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도는 명시적이기도 하고 암시적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모순이라고 여길 필요는 없다. 이 두 가지 인도 방법은 상호 보완적이다. 나는 명백한 하나님의 인도를 많이 경험해 보았다. 늘 따라다니는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확신 가운데 순종하고, 나중에 내가 그 때 정말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고 깨닫는 경우가 참 많았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의 순간은 흔치 않다. 내가 혼란 가운데 어찌할 줄 몰랐던 때도 여러 번이다. 이렇게 인간의 지적인 능력이 지극한 깨달음이나 영감의 순간에도 한계가 있음을 깨달을수록 나는 더욱 하나님에게 의지하며,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 분명히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앞길을 인도해 달라고 아뢰었다.


제17장. 위임


- 구텐베르크가 어렸을 때에 그에게 인생에서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할 것인지 물어 보았다면, 그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인도하셔서 인쇄기를 발명하도록 하셨다. 인간의 훌륭한 모험은 대부분 이렇다. 우리는 이런 모험을 미리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지만, 정확히 어떻게인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모험으로 인도를 받는다. 신앙은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확신을 갖지 못하고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심지어 실패나 실수를 통해서도 우리를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왼쪽으로 내보내셨다가도 결국 오른쪽으로 데려오신다. 그렇지 않으면 긴 우회로를 거쳐 오른쪽으로 데려오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순종한답시고 처음에 잘못 왼쪽으로 갔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걸음 한 걸음, 사건에서 사건으로 인도하신다. 우리는 나중에야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을 되돌아보며 인생의 중요했던 어떤 순간을 그 뒤에 일어났던 모든 일에 비추어 생각해 보거나 아니면 인생의 모든 과정을 살펴보면서 비로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인도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신비하게 인도해 주셨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로 이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저 말을 듣고 저 책을 읽게 하셔서 이들이 우리 삶에 그 모든 결정적인 결과를 낳게 해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당시에는 그것을 몰랐을 수도 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시간이 지나야 했다. ...또한 꿈이나 위중한 병, 이상스런 망설임, 가슴 아픈 실패 등을 통해서 우리의 일을 갑자기 중단시키셨던 분도 하나님이다. 또한 성공을 통해서 인도하심으로써 새로운, 예기치 않은 지평을 열어 보이셨던 분도 바로 하나님이다. 아, 성공과 실패라는 -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 문제에 대한 참된 대답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고도로 독창적이고 차아조적인 우리의 생각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알지 못할 때가 대부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의 연상을 통해서, 무의식의 작용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신다. 영감을 추구하는 화가가 절망에 빠져 있다가 갑작스럽게 작업에 착수하여, 그 결과에 자신도 놀라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우리는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친구와 의논하며 조언을 구하고 기도하며 묵상하고 이를 분명히 알기가 어렵다고 불평하다가도, 갑자기 전혀 생각지 못했던 모험에 자신이 이미 몸담고 있음을 깨달으며, 그 모험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낀다. '가치 있는 일' 이란 실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모험이며, 이것은 우리가 그 전체적인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하더라도 그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러한 삶을 누리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누구나 적어도 지극히 간단한 한 가지 일은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삶의 키를 진심으로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그 분께 삶의 방향을 의탁하며, 우리가 혼자서 삶의 방향을 정할 능력이 없음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을 능력이 없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방향을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ㄱ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인간의 본래적인 한계와 불명료함에서 벗어나게 되리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데 자신이 여전히 방해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의식적이든 아니든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삶을 인도해 주시는 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일일진대 그것을 간구하지 않을 까닭이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약 30년 전 어느 날 이러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나는 그 훨씬 이전부터 이미 그리스도인이었으므로 이것이 회심의 사건은 아니엇다. 그러나 그 때까지 내 신앙은 좀 지적인 것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 인간과 인간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생활에 관한 사고의 체계에 가까웠다. 나는 신앙에 또 다른 측면이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내 신앙에서 빠져 있었던 그것은 내 뜻을 포기하고 내 실제의 구체적인 매일의 삶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일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내가 아내의 증인인 것처럼 내 증인이 되어 달라고 말하고는 함께 제네바 근교의 숲으로 가 나를 포기하는 짧은 기도를 드렸따. 그 이후 내 삶이 어떠했는가를 돌아보면, 그리고 그간에 겪어온 예기치 않았던 그 모든 흥미 진진한 모험을 생각해 보면, 나는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고 내 기도가 진심인 것으로 받아 주셨으며 내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는 것을 신앙 안에서 분명히 믿을 수 있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 때보다 더 분명해 지는 것은 내가 스스로를 포기함으로써 훨씬 더 인격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 때 이후로 내 신앙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내 삶은 아주 달라졌다.  


- '가치 있는' 것은 이제 하나의 개념이라기보다 하나의 인격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객관적인 사고를 함으로써 냉정하게 가치의 체계를 채택해야 한다. 그러나 인격으로서의 사람은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또 관심을 갖지 않다가도 그 사람을 재발견하는 가운데 만날 수 있다. 같은 일을 함께 하면서 그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가치의 체계는 유한하고 제한적이다. 그러나 인격으로서의 사람은 제한되어 있지 않고 한 장소에 머무르지 않으며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다. 


- 우리가 자신을 포기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데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 성경을 공부해야 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 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여야 하고, 하나님과 교통함을 가로막는 죄를 따져 보는 노력을 더욱더 엄격하게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을 행하는 그 모든 환경이 새로운 것이 된다. 바로 보험이라는 환경이 되는 것이다.


-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바로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이다. 삶에 대한 태도는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반영한다. 하나님에게 긍정의 대답을 하는 것은 인생과 인생의 모든 문제와 난관에 긍정의 대답을 하는 것이며, 긍정의 대답이라는 것은 거부하는 태도가 아니고 모험을 받아 들이는 태도이다. 그런 모험에 우리는 전 존재를 건다. 이것은 도피도 아니고 반계몽주의도 아니다. 이성이나 지성, 지식, 판단력뿐만 아니라 감정, 기호, 욕망, 본능, 의식적 무의식적인 열망도 버릴 필요가 없으며, 다만 이것을 모두 하나님ㅁ의 손에 맡겨 하나님이 이를 지시하고 자극하고 배양하고 개발하고 사용하시도록 하면 된다.


- 하나님은 우리로 한 가지 모험을 끝맺게 하시면서 반드시 새로운 모험을 열어 주신다. 


- 지나간 모험을 겪는 과정에서 쌓인 비탄과 반항심, 원한과 분개 역시 내어 놓아야 한다. 변화되지 못할 삶, 상처투성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삶이란 없다. 


- 어떤 환자는 나와의 진료 약속 시간에 항상 늦었다. 심상치 않은 사실이라고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삶에 대한 불만의 표시이자 시간에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삶은 그에게 고통스러웠으며, 시간은 멈출 줄 모르고 그가 인정하지 못하는 실패를 사정없이 삼키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이 정시에 나타났다. 아,나는 그의 표정을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그 표정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봐요, 드디어 해냈어요! 정말이지 사람은 변할 수 있어요!"


- 자신의 삶에서 더 이상 성공을 거두기가 불가능하다고 믿으며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성공이란 뒤가 아닌 앞을 바라보는 사람, 이미 망쳐 버린 일을 되돌릴 수 있는 것처럼 지나간 옛 모험에 머무르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 하나님이 새로운 시작을 주실 것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 모든 현상은 동시에 표징이다. 현상으로서의 현상은 맹목적이고 의미가 없지만, 표징으로서의 현상은 하나님의 모험을 말해 준다. 


- 성경에서 놀라운 점은 창조, 노아의 홍수, 출애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등의 큼지막한 사건을 하나님의 표징으로서 제시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사소한 일에도 하나님이 활동하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학교에서 한눈을 팔 수 없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다시 읽어 보라. 성경의 등장 인물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주의를 기울여 하나님의 표징을 찾고 있다. 기드온은 놀란 가운데서도 한 가지 표징으로 만족하지 않고 확증을 구햇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가 작업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를 보셨다. 다윗은 자신의 아픈 아이를 지켜 보았다. 목자들은 말 구유로 찾아갔다. 사도 바울은 꿈에서 한 유럽인이 자기에게 마게도냐로 와 주기를 청하는 것을 보았다. 모든 꿈은 해독해야 할 표징이며, 모든 실패는 이해해야 할 표징이며, 모든 만남은 분별해야 할 표징이다.


- 어째서 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단조롭고 답답한가? 추상적이고 먼 세상에서 사는 것처럼 보이는가? 형식에 얽매인 삶에서 인이 박힌 습관과 습성화된 행동에서 벗어나지 않는가? 세상에서는 이들을 일컬어 혼자만 잘난 체한다고, 편협하다고, 삶의 이방인으로 불쌍히 여긴다.


이들은 일반 사람들의 관심에 관심이 없다. (소설,영화배우,가수,경제,정치,미술,쇼,패션,음식) 이들이 살아 있다는 표시가 나는 때는 철학이나 심리학, 특히 신학에 관해 이야기할 때이다. 이들이 읽는 것은 오직 심각한 종교 서적뿐이며 오늘날의 시급한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깊은 무식을 드러낸다. 이들은 전 세계에 신앙을 전파하고자 하지만, 자신만의 언어로 말하고 세상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과 만나지 못한다. 이들은 자기 일에서는 꼼꼼하다 못해 까다롭기까지 하지만 일하는 분위기는 무겁기만 하다. 이들은 웃음도 없고 농담도 없다. 이들은 동료의 대화를 무익한 것으로 여기는 듯한 느낌을 주며, 깊이 들어가 보면 자기 일에도 관심이 없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들에게는 일이 모험이 아닌 의무에 불과한 것이다.



제18장. 분별의 근본


-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모험의 정신이 부족한 것은 모두가 영적인 가치를 물질적인 가치와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경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는 때로는 일종의 도피로 볼수도 있다. 이들의 신앙은 뜻대로 되지 않는 삶으로부터 도망치는 도피처이며, 이들의 경건은 일상 생활의 실패에 대한 위안인 것 같다. 이들은 현실의 삶의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추상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런 직무 태만을 그리스도인의 자기 부인으로 오해한다. 이런 과잉 보상이라는 심리적 현상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 신앙은 오히려 우리가 세상에 관심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 현실, 즉 세상의 모험에 관여하고 계신 바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기 때문이다. 


-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신앙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나머지 세속적인 일에는 초연한 사람과 삶의 모험에 지나친 관심을 쏟는 나머지 하나님은 쳐다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지나친 단순화이지만, 내가 말 하려는 것은 두 견해를 대표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이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자기 종교에 관심을 갖도록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관심사에 대해 먼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종교인들의 할 일이다. 이것이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