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경'의 정신으로 목회를 하셨던 마틴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책이다.
신자의 고통과 고난에 대해 '성경적'으로 그 원인을 분석하고 치유의 방법을 제시하는 이 책은 신자의 고난에 대한 그 어떤 책보다도 깊은 통찰력을 제시한다.
다만, 이 번역본은 읽기에 쉽지 않다. 잘못된 문맥과 오타도 상당히 많다.
최근에 비슷한 제목으로 다른 책이 출시된 것 같은데, 다른 번역본을 찾아서 보길 추천한다.
영적 침체와 치유 Spiritual Depression : Its Causes and Its Cure
제1장 일반적 고찰
:(시편 기자들이) 저들이 때로는 독백하고, 자기 영혼에게 대화하며, 심령으로부터 울부짖으며, 문제를 분석한 후 자신을 질책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우곤 했습니다......하지만 저들이 언제나 스스로에게 정직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에게 솔직하기만 한다면 저들의 경험이 우리에게 매우 진실한 가치를 부여할 것입니다.
: 이 주제에 대한 두 개의 노선
1) 성경적 가르침을 연구, 성경의 사례와 상황에 대한 설명들을 살펴보고 하나님의 다루심을 판단
2) 성령으로 시작, 모든 상황에 따른 분명한 가르침, 사례나 예증들을 살펴봄
- 이야기와 예화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의 위험
: 이 이야기 속에서 예증하고 있는 원리들을 추론해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상태만 악화시킬 수 있다. 사소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기초로 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무시해 버린다면 고통 속에서 살 수도 있다.
-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에 대하여 이해하기로는 우리가 지체하지 말고 가능한 한 빨리 자기 자신들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이지만 모두 다르다. 문제들과 어려움과 우리가 직면할 복잡성과 시련들은 주로 성품과 유형의 차이점에 의해서 결정된다. ...고통의 표시는 상황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 우리는 정기적으로 자신을 살펴야 하지만, 언제나 그 일만 한다면 그것은 마치 영혼을 접시 위에 올려 놓고 해부하는 격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몰입이다...언제나 찡그린 얼굴로 '나는 어려워'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병적 상태로 알려진 단계로 이르게 되는 자기 몰입이다.
- 신체적인 상태로 인해 영적 침체에 들어갈 수 있다. (병)
- 마귀는 우리의 성품이나 신체적 조건을 이용할 수 있다. 마귀가 영적인 침체를 가져다 주는 방법에는 끝이 없다.
- 결국 모든 영적 침체의 궁극적인 원인은 불신앙이다. 불신앙이 아니라면 마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영적 삶의 문제를 처리하는 중요한 기술은 당신 자신을 다루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자신에게 말하고 자신에게 설교하며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자신의 영혼에게 "어찌하여 낙망하며 도대체 무슨 일이 당신을 불안하게 하는가?" 라고 말해야 한다.
- 이 문제의 본질은 우리의 자아 곧 우리 안에 있는 타자를 잘 처리하는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를 청종하지 말라. 오히려 그에게 돌이켜 말하라. 저주하고 꾸짖고 권고하고 용기를 주라. 당신이 알고 있는 바를 상기시키라. 조용히 그를 청종하는 대신에 그로 하여금 당신을 끌어내려 낙심케 하도록 허용해 보라. 왜냐하면 만일에 당신이 그로 하여금 통제 받도록 허용한다면 그는 언제나 그렇게 할 것이다. 마귀는 우리로 낙망케 하려고 자아를 붙잡아 사용할 것이다.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일어서 당당히 말해야 한다. "왜 낙망하느냐, 왜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제2장 참된 기초
- 모든 것이 슬프게 빗나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남자와 여자로, 비록 시련이 많을지라도 그 같은 상황에서 기본적인 기쁨과 확신을 가지고 사는 특징 있는 백성으로 굳게 서 있어야 한다. 바로 그 같은 모습이 성경 도처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다.
-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말하도록 허용하는 대신에 우리 자신에게 대화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자신들을 통제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자신과 자기 영혼에게 말한 것처럼 우리 자신에게 말해야 한다.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그는 자기 자신을 직면하고 자신에게 말하여 자신과 논쟁을 벌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을 믿음의 입장으로 이끌어 오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권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하고 마침내는 그 하나님께 기도하는 상태로 들어왔습니다.
- 그들(침체에 빠진 성도)은 성도들의 자서전이나 기독신자들의 삶을 아름답게 수놓은 다양한 성자들의 삶을 글로 읽게 될 때 즉시 자신들은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단정해 버리고 맙니다. 자신들이 결코 그런 삶을 살 수 없으며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 그 무엇을 분명히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왜 나는 그렇게 될 수 없을까?" 저들은 성도들이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을 읽고 모임이나 수련회에 참석하고 언제나 자신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그 무엇을 추구하며 산다. 그러므로 저들은 의기소침해 있고 영혼이 낙망하며 저들 속에서 불안해 한다.
- 그들은 구원의 기본 도리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저들의 모든 신앙과 노력들이 다소 쓸모 없게 되어 버렸다. 종종 성화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지만 칭의의 문제조차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 한다. 저들은 자신들이 바른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하여 즐거워하기를 소망하기 위하여 분명해 해야할 몇 가지 원리
1) 죄에 대한 확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요한 웨슬리 - 대서양에서 폭풍을 만났을 때 웨슬리는 공포에 떨고 있었지만, 모라비안들은 평온하게 보였다. 웨슬리는 저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자신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을 했다. 자신에게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는 말이며 그것이 바로 죄의 확신이 시작될 때 언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 당신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방법은 당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직면해야만 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라)
- '무엇을 했는가'가 시금석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진실하신 분인가?' 가 적극적인 시금석이다.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며 즐거워하며 삶의 중심인지를 묻는 것이다. 또 그분이 당신 존재의 의미이며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인지를 묻는 것이다.
-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그를 즐거워하고 또 그와 함께 동행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렇게 살도록 지음 받았으며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죄이다. 죄의 본질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못하는 것이다.
- 죄의 확신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 무가치한 존재라는 사실을 머른다면,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저주를 받고 완전히 실패한 자라는 인식을 갖지 못한다면, 그것을 깨닫고 인식하기 까지 아무것도 관심을 두지 말라. 당신이 기쁨도 발견하지 못하고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기까지 자신의 침체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의 확신은 진정한 구원을 경험하게 되는 실제적 선험 행위이다.
- 그리스도와 단절된 상태라면 모든 것이 실패일 수 밖에 없다.
-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셨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책임지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시며 영원하시기 때문에 죄를 벌하지 않고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실 수 없으며, 그가 벌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반드시 징벌하셔야만 한다.
- 당신 자신을 잊으십시오. 당신 자신에 관계된 모든 것을 잊으십시오. 당신은 충분히 선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결코 충분히 선하게 되지도 못할 것입니다. 기독교 구원관은 당신에게 그것을 말할 것입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며 무슨 일을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인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요인은 우리가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가 중시된다. 당신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앙망한다고 고백해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어느 것이나 사람도 바라보지 마십시오. 어떤 특별한 죄나 사람도 개의치 마십시오. 전적으로 그리스도만을 앙망하며 고백하십시오.
- 영적 침체로부터 벗어나고 싶으십니까?? 먼저 할 일은 과거와 영원히 작별하는 것. 그것들이 예수 안에서 가려졌고 또 깨끗하게 씻기어졌음을 깨닫고 죄를 다시는 돌이켜 보지 말라.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죄는 가려졌다' 이것이 첫걸음이다. 자신의 선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라. 그래야만 진정한 행복과 기쁨이 찾아올 것이다.
"나는 그분만을 신뢰하리라 그분이 나의 모든 죄를 대속하려고 죽으셨기 때문이다"
제3장 걸어 다니는 나무 같은 사람들
- 마가복음 8:22~26,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이게 한 사건 (마을 밖으로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셨고 소경이 대답하기를 "예, 보입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했다. 그때 주께서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시력을 회복하여 모든 사람을 분명하게 보았다고 했다.
- 주께서 하신 일은 결코 우연이나 우발적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의 행위는 모두 다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가 기적을 행할 때에는 언제나 거기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
- 예수님은 소경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고, 그가 말하기를 '예,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이 걸어다니는 것을 보나이다' 라고 대답했다. 소경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고, 사람을 걸어다니는 나무처럼이라도 보기 때문에 볼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다.
- 무엇인가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고 불안해 하며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신자들이 있다. 본다고도 말할 수 없고 보지 못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 그리스도의 죽음과 죽음의 저래적 필요성, 중생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의 삶에 만족 하지 못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칭찬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구세주 되심을 고백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여전히 어떤 진리들을 보지 못한다. 그 결과 저들이 혼돈 손에 있으며 행복하지 못하고 절망삼을 느낀다
- 저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충분히 몰입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 저들의 의지가 양분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지만 그의 가르침을 의지적으로 적용하는 문제가 제기될 때에는 혼란이 야기되고 그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이 서질 않는다. 이 일을 하는 것이 옳은지 저 일을 하는 것이 옳은지 항상 물을 수 밖에 없다. 의지의 영역에 평안함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 분명한 정의를 내리는 일에 반대한다. 명료성과 확실서을 싫어한다.
가장 안락한 형태의 종교는 애매한 종교이다. 칼로 자른 듯 분명한 성경적 진리외 결단을 요구하는 것보다 불안하게 하는 것은 없다. "나도 기독교를 믿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너무 딱딱합니다. 당신의 생각은 너무 편협합니다"
- 성경의 가르침이나 권위를 충분히 인정하지 못한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모든 고통의 주원인이다.
만일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성경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우리의 진정한 가치로 삼고 우리에게 말씀하게 한다면 이 같은 고통은 유발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자신의 생각을 성경으로 혼합시킨다.
- 교리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자신들이 좋아한느 것은 성경해석이지 교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교리를 제시하는 것 외에 성경의 기록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진리로 이끌지 못한다면 해석의 가치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교리를 올바른 질서 속에 위치시키지 못하고 있다. 당신이 속죄의 교리 앞에 중생의 교리를 둔다면 고통스럽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기 전에 중생이나 신생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잘못될 것이고 또 결국에는 비참하게 될 것이다. 칭의 앞에 성화를 위치시킨다고 해도 똑같은 일이 적용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 이런 상태를 치유할 것들
1) 명료성
:무엇보다 당신의 눈이 완치되었다고 주장하는 조급성을 피하라.
: 소경이 분명하게 보기 전에 그것을 검증하지 못한 것은 치명적인 일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볼 수 잇다고 선언하며 그렇게 하도록 강요를 당하고 있느냐는 말이다. 저들이 분명히 보지 못하고 여전히 혼돈된 상황에 있으면서도 특허나 낸 것처럼 그렇게 하고 있다. 저들은 사람들을 걸어다니는 나무로 묘사하며 다른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는 일일 수도 있다.
2) 완전히 소망이 없다고 느끼면서 계속해야 될 요점이 없습니다. 당신은 내 눈에 침을 바르고 나를 만지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저는 봅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들이 마치 나무가 걸어다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
내가 왜 볼 수 없습니까? 모든 것이 절망적입니다..저들은 성경 읽는 것을 중단하고 기도하는 것도 멈추어 버립니다. 마귀가 많은 사람들을 거짓으로 실망시킵니다. 그러므로 듣지 마십시오.
옳은 길은 정직하게 되는 것, 주님의 질문에 진실하게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다.
- 마지막에 할 일은 당신 자신을 그분에게 굴복하는 일이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사 승천하시고 또 성령을 보내어 주신 것이 우리로 하여금 혼란의 상태에 남겨 두시려고 그렇게 하셨다고 생각합니까? 그는 우리가 분명히 보고 또 하나님을 잘 알게끔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제4장. 지성 감정 의지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해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6:17)
-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사단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그것이 신앙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마귀는 특별히 우리가 낙심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우리가 비참하게 되는 것보다 마귀가 성공적인 일을 하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 영적 침체, 그리스도인의 삶에 나타나는 불행이 종종 복음의 위대성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 전체적인 삶이 복음의 영향력 밑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것이 모든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 삶 속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치한다.
- 두 가지에만 치우쳐도 그것은 똑같은 잘못이다. 의지가 빠지고 머리와 마음만 가지는 것도 똑같이 잘못이다...셋은 함께 있어야만 하고 또 동시에 같이 역사하고 언제나 셋이 합력해야만 한다. 이같이 위대한 복음이 사람의 전인격을 사로잡는다....의지의 영역에서 전심으로 순종하도록 이끌어 준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제5장. 한 가지 죄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딤전 1:16)
- 그리스도인은 '쉬지 말고' 기도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한 순간이라도 기도를 멈추고 생각해 보아야만 될 바로 그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제가 말씀드린 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도만 해 가지고서는 결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특별한 문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당신이 기도를 멈춰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기도가 그 문제를 계속 생각하게끔 만들고 또 당신의 마음에 그것을 고착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기도를 멈추고 생각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교훈의 말씀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광란적으로 계속 기도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분에게 용서의 메시지를 달라고 요구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이것을 벌써 당신에게 주셨습니다. 당신의 기도가 그 점에 있어서 불신앙을 매우 잘 표현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분과 그의 말씀을 신뢰하십시오.
- 칭의가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또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다고 선언하심을 얻는것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믿는 순간 단순히 의롭게 되는 데에서 일보 전진하여 영구히 의롭게 되는 것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칭의가 하나님에 의해서 용서받고 또 그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의로 덧입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죄의 용서함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음을 뜻한다. 그것은 단 한번으로 완성되며 당신 자신과 자신의 모든 인격과 생명이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 문제의 핵심 요인은 우리와 그리스도간에 연합하는 일을 깨닫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구원이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한다.
제6장. 헛된 후회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전 15:8~10)
-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성경에서 '공중의 권세잡은 자' '세상의 신' '사단' 이라고 묘사되어 있는 교활하고 힘있는 자의 공격 대상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특별히 마귀가 다가와 공격하는 방법을 고찰하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신을 속이고 미혹하는 그의 간교한 비법을 생각해 본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자신들은 마귀와 그의 공격을 준비해야 하며. 그 방법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다.
- 그렇게 오랜 세월 시간을 낭비 했다는 사실 때문에 침체되어 있는 사람들, 그렇게도 많은 기회들을 놓쳐버린 데 대한 자첵으로 인한 슬픔, "내가 만일 젊어서부터 이 모든 것을 깨달았더라면....너무 늦었구나. 좋은 기회는 다 지나가버렸어!" ..."만일....만 했더라면" 그것이 저들의 외침입니다.
- 사람들이 상식적인 입장에서 완전히 분명한 그 무엇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일을 위하여 기도함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또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 만일 어떤 상황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그에 대한 생각을 중단해 버리십시오. 그것을 결코 돌이켜 보지 마십시오. 절대로 그것을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만일에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마귀가 당신을 패배시킬 것입니다. 막연하고 쓸모 없는 후회는 비이성적인 것으로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독교적 입장을 떠나서라도, 그렇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단지 정력과 시간만 낭비하는 일일 뿐입니다.
- 앞으로 전진해서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현재의 실패를 야기시킬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주저앉아 과거를 슬퍼하고 이미 저질러 버린 모든 일을 후회만 하고 있다면 당신은 자신을 장애자로 만들 뿐만 아니라 현재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상식 그 이상이며 상식을 포함한다. 당신이 그런 말을 듣는다면 행동으로 옮겨 보자.
- 당신이 과거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슬퍼한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위해서 지금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 당신은 지금 바보처럼 행동하고 있다. 비이성적이고 시간과 에너지만 낭비하고 있다. 잃어버린 과거를 슬퍼하고 있다면 지금 현재를 위한 계획을 세워보라.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전적으로 자신을 투자해 보라.
- 바울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라고 고백한다. 바울은 "나는 맨 나중에 합류했다. 내가 왜 그랬던가? 내가 어떻게 주님을 거절했던가?" 라고 탄식하며 여생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영적 침체에 빠진 사람들들의 상투적인 삶의 방식이지만 바울은 놀라운 열정을 가지고 새생명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맨 나중에 합류했지만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에 늦게 들어간 사람들도 결국은 선택되었으며 들어왔다.
-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에게 대한 심판을 그에게 맡겨야 한다. 당신은 그분의 시간을 낭비하거나 당신 자신을 저주하는 일에 자신의 시간이나 정력을 허비할 궈너리가 없다. 자신을 잊어버리라. 그리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삐뚤어진 행위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이다....포도원의 품꾼에 대한 주님의 비유는 그 같은 논쟁을 중단하도록 의도되었다.
-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 요엘 선지자의 강림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 "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요엘 2:25) 그는 황폐했던 햇수대로 갚아주신다고 했습니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던 그때에 저가 말씀하십니다. "내가 황충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라" 만일에 당신이 그것을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시간이 그 계약의 본질을 좌우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영역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오셔서 일 년에 열배라도 보상하실 수 있는 열매를 주십니다.
-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현재의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정력을 낭비하지 말고 과거를 잊고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당신이 된 것을 기뻐하라.
제7장. 미래에 대한 두려움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딤후 1:7)
- 우리의 성품은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성품에 지배를 받는게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지배를 받아야 한다. 중생이 만들어내는 차이점은 성품을 지배하는 더 높은 통치력이 있따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가 당신의 성품과 더불어 자신의 특별한 방법으로 역사하도록 도우신다. 그것이 바로 구속의 은혜이다.
"두려워 떪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 (빌 2:12~13) 두려움과 떨림이 남아있다. 그것이 부분적으로는 당신의 성품 때문이다.
-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있다.당신 속에서 일하는 것은 소원을 두고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인내하는 능력, 곧 형편이나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것을 버티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가장 겁 많은 사람도 모든 일에, 심지어 죽기까지 능력을 부여받을 수 있음을 뜻합니다.
-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 네가 마치 자연인처럼 말하고 있구나. 너는 네 자신의 능력으로 그 같은 것을 모두 직면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구나. 하지만 하나님께서 너에게 능력의 성령을 주셨다. 앞으로 나아가라. 그가 너와 함께 하시리라. 네가 너 자신을 알지 못하는구나. 너는 너 자신에게 놀랄 것이다. 심지어 죽음을 직면할지라도, 너는 그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위하여 부끄러움과 죽음의 고통을 받을 자로 여김 받은 것을 인하여 기뻐하라. 능력! 그것이 주어졌도다. 우리를 대적하는 일들로 인하여 침체되는 시험을 받을 때에 당신과 제가 할 일은 '나는 성령님을 모시고 있다. 그는 능력의 성령이시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 두려워 하는 마음의 주요 원인 : 자아, 곧 자기 사랑, 자존심, 자기 보호라고 볼 수 있다.이런 고통의 본질은 너무 자아에 빠져 있기 때문이랑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까? 저들은 "내가 어떻게 이것을 할 수 있을까? 만일에 실패하면 어떡하지? 등등 끊임없이 자신들을 돌아보고 자신들을 바라보며 또 자신들에게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여기에 사랑의 마음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아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자아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 가엾은 사람들이 수도사나 은둔자가 되는 것은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세상과 다른 사람들을 멀리 떠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자기 자신들로부터는 도망가지 못합니다. 당신의 자아는 당신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자기 자신을 억제하려고 하면 그만큼 더 당신 자신은 당신을 고통스럽게 만들 것입니다. 자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다른 사람 혹은 다른 그 무엇에 완전히 몰입하고 당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을 전혀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것을 가능하도록 만들어 준다. 그는 '능력의 영' 이며 '사랑의 영'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것을 생각하며 또 자신에 대한 것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몰입하라고 말씀한다.
- 계속해서 성자의 사랑을 생각하시되,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생각하십시오. 모든 지식을 초워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십시오.
- 다음에는 형제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라. 그들의 필요와 관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디모데는 '스스로 죽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한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보아라. 죄 가운데서 멸망할 사람들을 바라보라. 그리고 너 자신을 잊어버려라'고 말합니다. 잃어버린 자를 위한 사랑을 계발하라.
- 마지막으로 근심하는 마음. 곧 자제력, 훈련, 균형 잡힌 마음이라는 뜻이다.
- 그분은 당신이 무엇을 하고 또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필요할 때마다 당신을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특별히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영적 침체에 빠지는 분들께...은사를 살리십시오. 자신에게 당당히 말하십시오. 진정한 자기 자신을 생각하십시오. 미래로 하여금 당신을 붙잡도록 허락하거나 미래가 당신을 붙잡고 있다는 생각 대신에 오히려 자신에게 당당히 말하고 당신이 누구며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상기하고 당신 안에 성령님이 계신 것을 생각하십시오. 당신이 성령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하고 굳세게 앞으로 전진하십시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현재를 살며 미래를 준비하고, 자기 목적, 곧 당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주신 그분을 영화롭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8장. 감정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붙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나게 하노니" (딤후 1:6)
- 디모데가 본래적으로 염려가 많은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그는 침체에 빠진 사람이었다. 이 같은 사람에게서 종종 두 가지의 일들이 발견된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침체에 잘 빠지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 우리는 회심하고 중생했지만 인격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못했다. 회심하기 전에 다른 사람보다 더 낙심하길 잘했던 사람이 회심 후에도 더 많이 투쟁해야만 한다.
- 감정에 너무 지나치게 집중하는 실수를 만들지 말라.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드는 실수를 만들지 말라.
-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너에게 지배받지 않겠다. 이런 기분이 나를 통제하지 못한다. 나는 벗어나겠다. 그리고 나는 쉬겠다" 일어나서 걸어 보십시오. 그리고 무엇인가를 시도해 보십시오. 은사를 불일듯 일으켜 보십시오. 바로 이것이 끊임없는 성경의 권고입니다.
- 마귀가 당신이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제시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나는 어느 것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느끼든 느끼지 않든 나는 성경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또 내 영혼이 말씀 위에 머물리라. 그리고 나는 그것이 이루어 질 것을 믿는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당신의 모든 목적을 의로움과 거룩함에 두면 당신은 복될 것이며 채워질 것이고 그렇게도 열망했던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 당신이 위축된 감정에도 불구하고 주저앉아서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어떤 다른 것을 시도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에 대한 단순한 본질입니다. 그분에게 직접 나아가서 그분의 얼굴을 구하라.
제9장. 포도원 품꾼들
-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혹자들은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진리를 기쁨으로 받았지만 오래가지 못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계속하는 것의 중요성이 바로 생명적인 원리이며 또한 이 비유의 견지에서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하는 바입니다.
-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은혜로 말미암는다.
- 증거자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부닥치는 문제는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주목하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언제나 자신을 의식하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 일찍 일한 품꾼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평가하고 있다. 자신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일했는가를 말하고 노동했는가를 언급하고 있다.
베드로도 진술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좇았사온즉 무엇을 얻으리이까?" 거래하자는 제안과 요구 조건이 거기에 함축되어 있다.
이 같은 잘못된 태도가 결국 우리를 어려움에 이르게 만든다.
- 저들을 사로잡고 있던 무서운 영이 집주인께서 은혜를 베풀어 처음에 들어왔던 사람들과 똑같이 마지막에 들어왔던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씩 주려고 했던 그 순간에 정체를 드러내고 결국 고통에 이르게 된다. ...저들이 은혜의 원리를 망각해버리고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받으리라고 기대했었고 그것이 합당하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원리와 자신들의 태도로 시작했으니 그것이 논리적인 결론이었을 것이다.....그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 자신들이 아주 적은 것을 성취한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많은 것을 성취했다는 데 대한 질투심을 느낀다. 저들의 전체적인 태도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다.
- 가장 진지하고 또 무서운 일은 저들이 마음속으로 그 집주인이 잘못되었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니께서 정당하지 못하시다고 느끼도록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다. 마귀가 말한다. "그대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어 놓았는지 보라. 그런데 얻은 것이 무엇인가? 다른 친구들을 보라. 아무것도 하지 않앗다. 하지만 그가 얻은 것을 보라"
- 자아란 얼마나 비참하고 못났으며 지저분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 하나님의 나라에서 거래나 권리라는 개념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철저하게 숙명적인 것이다. 내가 이것을 하기 때문에, 저것을 했기 때문에 무엇을 보상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 거래하려는 생각을 없애야 한다. 내가 이것을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성령님이 주인이시며 그분은 주권적인 주님이시다. 그는 자신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대로 이 일을 행하신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전혀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 사도 바울이 고후 5장에서 심판과 상급에 대해 말한 것은? - 대답은 심지어 상급도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이다. 주께서 저들에게 상을 주셔야만 할 필요성은 없다...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 되기 때문이다. 거래라는 입장에서 생각하고 결과에 따라 불평하는 것은 그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 하나님과 더불어 장사하려고 하지 말라. 당신이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거래하는 만큼만 얻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의 은혜에 모든 것을 맡긴다면, 당신은 자신이 생각헀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얻게 될 것이다.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주님은 "진실로 저들은 이미 상을 받았느니라"..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 것이 저들이 원하는 바였고 저들은 그것만을 얻을 것이다.
-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우리는 그의 영광과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욕심을 부려서는 안된다. 당신의 눈을 시계에 맞추지 말고 그분과 그분의 일에 맞추십시오. 자신이 한 일과 수고를 기록, 보관하지 말고 그와 그분의 영광, 그분의 사랑, 그분의 명예, 그리고 그분의 왕국 확장에 당신의 초점을 맞추십시오.
- 당신은 오른손이 하고 있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십시오. 계산하려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계산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제가 아는 것 중에 하나님의 계산법만큼 그렇게 낭만적인 것이 없다고 찬사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놀라게 될 준비를 하십시오.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입니다. 우리의 물리적인 눈으로 볼 때 완전한 역전 현상, 곧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며 모든 것이 뒤집히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 개인적인 고백을 하겠습니다. 제 사역에 있어, 이런 일들은 저에게 종종 일어나곤 합니다. 종종 하나님께서 주일에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리고 저는 특별한 자유로움을 의식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마귀의 음성을 들을 정도로 어리석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다음 주일까지 기다려봐. 놀라운 일이 있을 꺼야.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 틀림 없어." 그래서 저는 그 다음 주일에 강단으로 올라갑니다. 겨우 소수만이 참석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경우에도 제가 강단에 가서 서지만 부담스럽고 설교는 얼망이 되어 스스로 나약해지며 좌절감에 빠지게 될 때 마귀가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음 주일에는 아무도 안 올꺼야"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다음 주일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온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산법입니다. 당신은 결코 모르실 것입니다. 제가 힘없이 강단에 올라갔다가 능력 있게 마칠 때가 있습니다. 또 저는 자신감 있게 올라갔다가 바보 같은 느낌으로 내려올 때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산법입니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아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십니다. 그는 언제나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다. 당신은 그가 하시려는 일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분의 장부 관리는 제가 이 세상에서 알고 있는 것 중에 가장 낭만적입니다.
- 우리가 모든 것이 은혜로 되어짐을 깨달아 기뻐해야 한다. "너희가 자기의 할 일을 다 한후에 말하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할 일을 했을 뿐이라" 이것이 그분이 보시는 관점이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 모든 비결입니다.
-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전혀 주장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게 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겸손하셨고 또한 자신을 기억치 않으셨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면서 일하시고 인내하셨습니다. 그는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또 남녀 백성들이 아버지께 나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 시계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자기가 한 일의 분량을 계산하지 아니하며 장부에 자신의 업적을 기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제외한 모든 일은 잊어버리고 그분을 위하여 일하도록 부름 받은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며 우리를 귀하게 여기사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그리스도인의 삻은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지속되고 은혜로 끝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 "내가 아니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다"
제10장.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눅 8:22~25)
- 그리스도인은 결코 세상 사람들처럼 낙심하고 흥분하며 당황하고 어찌할 줄을 몰라 하는 광적 상태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비그리스도인들의 고통에 대한 전형적인 반작용입니다......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이상이 빌립보서 4장을 통해 바울 사도가 언급한 바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웟노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입장입니다.
- 이런 상태에 빠진다는 것이 매우 큰 잘못이라는 이유는 그것이 믿음의 부족과 그분에 대한 확신의 결핍을 뜻하기 때문이다...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그의 관심과 우리를 돌보신다는 믿음의 부족에 기인하며 그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지고 또 스스로 돌보는 것을 뜻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은 전혀 관심조차 없으시며 우리를 위하여 그 무엇도 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바로 그것이 이 상황을 그렇게 심각하게 만들었습니다.
- 상황은 필사적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불리하고 우리가 절망에로 빠져들어갑니다. 우리에게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날 때에 우리 주님은 철저하게 무관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신앙의 참된 시련이 시작됩니다. 바람과 물결은 충분히 사납고 물은 배 안으로 유입됩니다. 하지만 저들에게 일어나는 가장 무서운 일은 그의 분명한 무관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주무시고 계시며 전혀 돌보지 않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어도 돌아보시지 아니 하시나이까?" 그는 무관심하신 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이 사람들의 감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저들은 그 분을 따랐고 또 그분의 왕국 도래에 관한 교훈을 들었습니다. 저들은 그분이 행하신 기적들을 목격했고 또 저들이 일어나기를 원했던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배가 부숴지고 물속에 잠길 마지막이 도래 하기나 하는 것처럼 모든 상황이 그렇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 그 같은 상황들은 그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단련받고 훈련받는 것입니다. 하나니께서 그것을 전적으로 허락하시고 또 허용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에게 이런 일이 발생할 때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은, 주께서 저들에게 믿음이 있는가를 완벽하게 알고 계신 것을 함축합니다. "너희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이 순간에 어디 있느냐?"..그것은 우리가 믿음의 본질을 이해하게끔 하는 열쇠가 됩니다.
- 믿음은 전인, 곧 마음과 지성과 이해력을 다 포함한다.
- 믿음은 자동적으로 행하는 무엇이 아니다. 우리는 믿음이란 자동적으로 행동하는 그 무엇처럼 생각하는 듯 싶습니다. 마치 온도 조절 장치와 비슷한 그 무엇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활동성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작동하게 되어 있지 않고, 내가 그것을 작동시켜야 합니다.
- 제가 어려운 입장에 봉착했을 때 취해야만 될 첫 번째 일은 자신이 상황에 지배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이것은 소극적인 면이다......배는 거의 가라앉을 처지였으며 저들의 고통은 상황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정도였습니다. 저들은 믿음을 적용해야만 했고 또 그것을 담당해야만 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라고 저들은 말해야만 했습니다. 저들은 상황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지배하도록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믿음은 공포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있을 수 있는 두려움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상황에 지배받지 않겠다. 나는 자신을 잘 다르시겠다" 라고 말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을 책임져야 하고, 자신을 바로 세우고, 또 자신에게 몰입해서도 안 된다.
- "주께서 함께 타고 계신 배가 가라앉을 수 있을까? 그가 하실 수 없는 일이 있을까? 우리는 그가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아왔다.....그런 분이 우리들과 또 자신이 함께 이런 방법으로 수장되는 것을 허용하실까?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라도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돌아보신다. 그는 우리의 모든 머리카락까지 헤아리신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을 추론하는 방법입니다. 믿음은 말합니다. "좋다, 나는 물결과 파도가 사납게 일어나는 것을 본다. 하지만 언제나 이렇게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붙들고 알고 있는 바가 사실로 나타날 것을 추론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을 적용하는 방법입니다.
- 믿음은 말합니다. "나를 그렇게까지 멀리 인도해 주셨던 분이 여기에 와서 넘어지게 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상황이나 환경에 지배받기를 거절함으로써, 믿음은 자신이 믿는 바와 알고 있는 바를 스스로 상기시켜 줍니다.
-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히12:1!)
그것이 바로 믿음이 일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당신과 내가 그것을 작동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당신은 믿음의 눈으로 그 사건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좋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안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이 상황에 적응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바가 될 수 없다. 그 속에 다른 의미가 들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거기에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이 개입되었음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을 맺어야 합니다.
제11장. 물결을 보고서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14:22~33)
- 만일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의심 때문에 고통을 받은 적이 없다면 그런 사람은 기초부터 다시 검토해 보고 또 저들이 위장된 평안이나 혹은 소위 잘못된 신앙 지상주의라 부르고 싶은 안식을 누리고 있지 않나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의심이 우리를 또다시 지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적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에게 일어났던 현상입니다. 그의 믿음은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약한 믿음이기 때문에 의심이 저를 통제하고 저를 짓누르며 저를 흔들어 버렸습니다.
- 우리 주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의심이 우리를 지배할 때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 약하다는 사실을 변증하는 증거물이 된다는 것이다. 의심이 우리를 공격한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의심으로 하여금 우리르 다스려 달라고 허용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그 해독제는 바로 큰믿음 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에 지배를 받도록 허용하는 것은 그것이 적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 큰믿음의 특징 -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그의 능력을 아는 것 거기에 견고한 신뢰와 확신을 가지는 것.
- 베드로가 처음에 시작은 잘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그의 능력을 믿고 그의 인격과 권능을 신뢰했습니다. 단순히 논리적으로만 믿은 것이 아니라 실천했습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나와 물 위를 걸어 갔습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 기독교적 믿음은 주님에 대한 인식으로 시작하고 또 끝을 맺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아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감정이나 의지의 행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축복된 인격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에 기초를 두지 않는 한 감정이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 영적 침체에 대한 힘있는 해독제는 성경 교리 혹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식입니다. 집회에서 감정은 역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원리들을 알고 또 교리를 알고 이해하는 것은 힘있게 역사합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방법입니다. 침체에 대한 해결책은 그분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그 지식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우는 데에는 수고가 뒤따릅니다. 그것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연구해야만 하고 또 자신을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가 보기에 시간의 비극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행복을 지나치게 집회에만 의존하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교회사 가운데 오래된 고질병이었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살아왔습니다. 진리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너무 빈약했습니다"
-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에 결코 물결을 바라다 보아서는 안 되었던 이 사람, 베드로를 꼭 기억해야만 하겠습니다. 그가 배를 떠나기 전에 벌써 이 문제가 정리되었기 때문입니다....주님이 그 배에 가까이 오시기 전에 벌써 폭풍이 사납게 일어났던 의미를 자세히 강조한 바 있습니다. 만일에 베드로가 잔잔해진 바다 위를 걸어가다가 그 다음에 폭풍이 일어났다면 그 의미는 전적으로 달랐을 것입니다....베드로는 새로운 요인의 문제에 직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적으로 사나운 물결 위를 걷게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왜 그것을 바라보았을까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어떤 이유가 있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 웃기는 것이고 또 어리석은 것입니다.
- 당신이 배 밖으로 나가기 전에 이미 만나서 해결했던 그 문제를 왜 또다시 앉아서 붙들고 고민해야만 합니까? 이 같은 믿음의 소극적인 측면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를 믿는다면, 당신이 어떤 일들에 대한 문을 닫아버리고 그것들을 다시는 쳐다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제12장. 종의 영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8:15 ~ 17)
- 우리는 신앙이란 활동성이라는 점을 고찰해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망각하다가 어려움을 당한다. 자신들이 신앙을 적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이유를 고찰해 보았다. 왜냐하면 저들이 계속해서 끈질기게 신앙을 적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자신들이 담당해야만 될 대단한 임무처럼 생각하며 자신들이 적용해야만 할 것으로 믿고 있다. 환언해서...거룩이 저들에게 큰 짐이 되고 있다....이런 태도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그 가르침의 고전적인 방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사업을 한다거나 전문 직종에 종사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하나의 공포와 두려움이 됩니다. 저들은 그것을 두려워합니다....저들은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업무에 대한 부담감이 너무 커서 두려움의 영으로 저들이 가득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자기 자신들과 또 마땅히 살아야만 될 이같은 진실한 삶이 참으로 가능한가에 대하여 고통스러움을 느끼고 있스니다.
- 성경에 의하면, 내주하는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초신자에 불과하고 중생하지 못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의 영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그들은 단순히 이런 상태에서 '즐거움을 비웃고 고된 나날들'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 자기 자신이 약하다는 점과 업무의 위대성, 그리고 마귀의 능력이 어떠함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저들이 종의 영에 사로잡히며 또 가라앉고 고통스러워하며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 바울은 '너희가 종의 영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께서 저희 안에 계시고 또 그가 너희에게 능력 주시고 힘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바는 율법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 "저는 이것 때문에 지금까지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친구여, 당신은 자신의 몸이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대답입니다. 이해가 안 될때에는 제가 다시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은 기도보다는 생각이 더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전이란 사실을 스스로 생각해야만 합니다. 기도란 언제나 필요합니다. 하지만 생각 역시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사람들이 실패하고 패배했을 때 어두움 가운데서 거의 부르짖는 도피 방편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지성적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몸이 하나님의 성령의 전임을 깨달을 사람들의 몫입니다. 그때에 응답이 주어질 것이며 능력이 임할 것입니다.
제13장. 거짓 교훈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갈 4:15)
- 갈라디아 사람들은 전형적인 이교도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저들에게 와서 복음을 전파했고 또 저들은 기쁨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 갈라디아 사람들이 지금은 스스로 불행하게 되었고 또 거의 돌아서서 바울 사도를 대적하고 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그들의 문제는 저들이 어떤 거짓 교훈을 믿고 받아들인 데서 촉발되었다. 이 유아기 교회들이 처음에는 사도 바울을 따라 다니다가 여러 측면에서 그의 메시지와 가르침을 모방했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 거기에 자신의 독특함을 첨가시켰던 모종의 교사들에 의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마귀의 역사였다)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이 받은 복음은 다른 사람들이 받은 복음과 정확하게 같은 복음이며, 특별히 주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에 그와 함께했던 사도들이 받았던 복음과 같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대화할 때 자기도 사도들이 전파하던 똑같은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자신에게는 직접적 계시가 개인적인 방법으로 임했지만, 다른 사람들도 자기가 전파하고 있던 것과 똑같은 것을 전파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권위의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도가 여기에서 호소하고 있는 권위입니다.....이것은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고 또 다른 사람이 저렇게 말한다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단순히 생각하고 있는 바를 전파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그것은 다른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것처럼 그에게도 주어졌습니다...진리의 시금석은 사도성입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사도적 메시지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금석이고 표준입니다. 신약성경에 선포되고 교훈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권위로 말미암았다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떠나서는 전혀 표준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견해를 신약성경이라는 빛에 비추어 보아야 하고 또 그리로 가져다가 거기에 견주어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 그분과 함께 저는 죽었고 또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습니다.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았습니다. 저는 그분과 함께 부활헀습니다. 앞으로 그분과 함께 하늘 영광 중에 앉게 될 것입니다....그 분 대신에 어떤 것이 중심에 들어온다든지 아니면 그분 외에 그 무엇이 첨가되는 것은 제가 거부하겠습니다. 직접적이고 단순하며 또 그분의 영광만을 위하여 에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도적 메시지만 알겠습니다.
제14장. 선을 행하다가 낙심될 때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 사도 바울은 연구가라기보다는 차라리 전도자였다. 또 그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여행자였다. 일반적으로 그는 일어났던 어떤 상황 때문에 글을 썼으며 또 그 문제의 원인을 이해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고통 당하는 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글을 쓰곤 했다. 그래서 저는 그것들을 유발시키는 가능한한 모든 원인들을 취급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서신서에 오늘날 존재하는 영적 침체의 원인 중에 취급되지 않은 것이 없음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영적 생명의 질병 현상을 언제나 똑같다. 그들은 결코 틀리지 않다. 외적 현상은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의 원인은 모두 악마적이다.
- 일을 할 때에 공식적인 생각이나 의무감으로 일하는 것은 위험하다. 계속 일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우리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을 걷기보다는 차라리 피곤하게 터덕거리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 한 전문분야, 사업을 일으켰다가 피곤한 상태에 이르게 된 많은 사람들을 파멸시키곤 햇다. 사람은 자신이 가졌던 열심이나 정력이 떨어지고 그 직업의 최고조에 달할 때에 의욕도 사라지게 됨을 의식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다. 바로 그때에 필요한 것은 혹자가 그에게 강장제와 같은 도움의 말을 주는 것이다. 술을 마시는 것과 관련된 전인적인 위험이 바로 그 상황에서 나타나게 된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달래기 위해서 술을 조금씩 마시다가 결국에는 주정뱅이로 끝을 맺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마약을 복용하거나 다른 수단 방법을 강구하다가 정확히 똑같은 길을 걷고 만다.
- 어던 교회들은 그 같은 방법을 취한다. 자극적인 것을 시도하거나 새로운 방법을 채택한다. 그런 교회들은 분명히 인위적인 자극제에 의해서 생존해 간다
- 자기 자신을 점검함으로 시작하라. 내가 지쳐버린 이유, 그 상황을 진단하기 전에 처리하려고 하지 마라.
- 당신의 마음과 심령에 지금 자신이 향하고 있는 그곳에 영광이 있는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해독제이며 처방입니다.
"이 땅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사모하라"
" 눈은 보지 못하고 귀는 듣지 못하며 사람의 심령 속에 들어가지 못하되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이 있도다"
당신의 느낌이 어떠하든지 자신의 할 일을 계속하십시오.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성과를 증대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필요한 만큼 은혜와 자비의 비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제15장. 훈련
'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 1:5-7)
- 서신서를 기록한 참된 목적은 낙심한 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그것을 기록했습니다....영적 침체의 상태에 빠지게 될 진정한 위험물로 나타나게 될 그 무엇입니다. 만일에 그 상태가 지속되고 계속된다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의심과 불확실성의 상태로 나아갈 것이며 또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던 옛 생활을 그리워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 자신을 생각할 때 그의 삶은 너무 미약합니다. 그래서 발전이나 성장이란 꿈도 꿀 수 없을 듯 싶습니다. 전체적인 삶은 무기력하고 침체되어 있으며 불행하고 의심에 흔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희망이 있다는 이유를 전혀 제시할 수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는 자신의 믿음의 기초가 흔들릴 것 같은 이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베드로가 취급하고 있고 또 우리가 지금 상고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 상황의 원인은? 사도가 이 사람들에 대하여 매우 솔직하게 언급하므로 침체 현상에 유일하고 궁극적인 원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훈련 부족이다. 그것은 진정 고통이다..
(신약 성경의 기록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구체성을 확보한다. 문제를 하나씩 하나씩 점검한다.)
- 첫번 째 원인은 저들이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이것이 바로 그 원인이다. '너희 믿음에'라는 말은 믿음의 보충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 믿음에 그가 다음에 언급할 것들을 첨가하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히 저들이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는 암시가 들어있다. 그들은 일종의 마술적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한 모든 것이 잘 된다는 생각.... 믿음이 삶 속에서 자동적으로 역사한다고 생각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필요한 것은 진리를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믿음을 받아들이면 나머지 모든 것은 저절로 당신에게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저들의 생각이다. 저는 이것은 마술적 신앙관 혹은 신앙의 자동차개념 이라고 묘사하고 싶다.
- 신비주의적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은 '주안에 거하십시오, 그리고 저를 바라보십시오' 그렇게만 하면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런 종류의 영적 침체, 지금 우리가 취급하고 있는 무기력 등을 조장하는 가장 촉진적인 원인입니다.
- 두 번째 원인은 전적인 나태함, 게으름, 안일함 혹은 사도의 언어를 빌리자면 근면함의 결핍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세속적 부름이나 직업, 전문업이나 사업, 쾌락 혹은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하는 그 어떤 일에 정열을 쏟는 만큼 영적인 일에도 그런 에너지를 투자한다고 보십니까? 우리가 자신의 일을 할 때에는 매우 잘하다가도 기도해야만 될 기간에 접어들면 갑자기 피곤하고 지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깨닫지 못하십니까? 또 우리가 성경을 읽으려고 할 때에는 언제나 피곤하고 졸립게 된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우리를 혼돈 시키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조간신문, 몇 시간 후의 석간 신문과 기타의 신문이 옵니다)...우리들 모두가 현재 자신의 삶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고 또 진급과 정복을 위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의 삶을 바르게 살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저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을 읽을 틈을 내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묵상하고 싶은 만큼 그 말씀을 묵상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에 대한 단순한 대답은 철저한 훈련부족 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에 질서를 유지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삶에 있어서 훈련 부족, 우리의 삶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우리의 마음 중의 마음으로 알고 있는 우리의 삶을 명하고 관장하는 일을 실패하는 것이 바로 그 원인이라는 말입니다.
- 이런 상황에 대하여 베드로가 언급한 처방법, 그것은 문제의 원인을 거꾸로 보면 된다는 것. '더욱 힘써'
- 매우 뛰어난 하나님의 성도들의 보편적 특징이 '훈련과 질서'이다.
헨리 마틴, 데이빗 브레이너드, 조나단 에드워즈, 웨슬리의 형제들 그리고 횟필드에 관한 책을 읽어보라. 교단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훈련했고 이것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잘못은 당신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영혼의 훈련을 강조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물론 거기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습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잘못은 당신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영혼의 훈련을 강조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자신의 행위를 신뢰하는 데 대한 정반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 중에 어떤 것이라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은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행위를 믿는 믿음, 곧 자신의 행위를 신뢰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얼마나 간교한 위험이 있는지 모릅니다.....특별히 복음주의적 교단 안에서 그리고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오류를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행위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음을 압니다. 우리는오직 믿음만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저 역시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에 제가하는 것은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저의 삶은 철저하게 훈련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제안을 경청해 보십시오. 행위를 거짓되이 신뢰하는 것에 대한 정반대는 게으름이나 훈련 부족이 아니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지런하고 근면해야 합니다. 열심을 내야 합니다. 믿음에 이런 것들을 더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행동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언제나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 제가 성경이 매일 받아보는 신문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참으로 믿는다면 신문을 읽기 전에 성경을 읽지 않으면 안됩니다. 제가 아직 하지 못하고 남겨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저는 그것을 끝냈어야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의 기도시간은 지켜져야만 합니다. 또 제가 묵상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엇이든지 제가 하지 못한 것이 남아 있다면, 저는 그런 일들을 어떻게 하든지 끝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여기에서 실패하고 비참하게 되며 또 저들이 자신들을 장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단순한 이유로 실패하고 비참하게 됩니다.
당신이 스스로 그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으 당신을 위해서 저절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참으로 아무도 당신을 위하여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공급하라" 이것은 단순히 교리적인 지식만을 의미하는 것이아니다. 우리가 일정한 분량만큼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믿음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통찰력이며 이해력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 우리 자신들이 열심히 성경을 읽고 말씀을 터득하며 또 믿음의 교리들을 섭렵하는 것이 얼마나 실질적인 일인지 모른다.이런 일들에 자신을 적용시켜 보지 않는 한 당신은 참으로 믿음을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종종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적응할 수 있는 훈련이 분명히 필요하다.
- 절제와 자기 관리 : 식욕,정욕,열심과 욕구들을 자제 하지 못한다. 그에대한 통찰력을 얻는 길은 성자들의 삶에 대한 기록을 읽고 또 저들의 일기를 읽는 것이다. 또 자신들에 대해서 어떤 조처를 취했으며 어떻게 자신들의 삶을 통제했는지 읽어 보시기 바란다. 이런 일들에 대해서 저들이 얼마나걱정하고 또 어떤 댓가를 치르고서라고 그런 것들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매우 분명하게 깨달았었는지모른다.
- 경건 : 하나님과 더불어 나누게 되는 우리의 관례를 염려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
- 우리가 불행하고 침체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훈련 부족에서 오는 것보다는 조금 양호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일어나서 행동합시다.더욱 힘을 씁시다.두려워하지 말고 우리의 믿음에 무엇인가를 공급합시다.우리의 생각을 정화합시다.그리고 이것들을 실천합시다. 또 믿음에 힘과 활력,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와 사랑을 공급합시다.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즐깁시다.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또 도움을 주며 삽시다.
제16장. 시련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6-7)
- 사람들이 어느 때는 크게 기뻐하다가 동시에 무거운 근심에 잠겨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하지만우리는 거기에 모순이 없음을 자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신약성경에 묘사된 그리스도인의 상태는 언제나 두 가지의 요인이 포함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사도가 설명하고 있는 이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는 크게 기뻐하다가도 또 다른 때에는 무거운 근심 속에 잠기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그것이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만큼 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활과 삶 속에 더 가까이 모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이 같은 일을 경험했습니다. 당신은 그가 어떻게 "데마가 나를 버리고 갔다" 라고 설명했는지를 잘 알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에게는 가벼운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는 사람이란 갑자기 자신을 버리고 도망갈 수도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혼자였습니다. 당신이 성자들의 생애를 읽기만 해도 이런 종류의 일이 끊임없이 일어났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 웨슬리- 오해로 말미암아 얼마나 자주 이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찰스 스펄전 -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돈을 들여서 대학 공부를 시키고 훈련시켰던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갑자기 그를 버리고 멀리 도망가 버렸다.
- 사도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것은 왜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는가를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증ㄹ 자신에게 혹은 서로에게 자주 말해 줄 필요가 있다. 저는 종종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전체적인 예술은 질문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위험은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고 또 그것을 인하여 슬퍼하거나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 외에 그 어느 것도 말하지 않고 참으며 인내하는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해야 할 일을 발견하고 또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를 이해해야만 한다.
-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사도가 말하기를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이생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하나의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 인생의 전생애를 통해서 매우 분명한 계획과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귀하게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양자로 삼으사 그의 가족의 일원으로 맞아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저를 온전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가장 기초적인 수준의 성경 교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한 걸음 앞으로 전진한다고 할 때, 하나님은 때때로 이런 일들을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기 위하여 이것을 허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게으르거나 실패할 떄에 징계하십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을 훈련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무엇인가를 더하고 또 믿음에 무엇인가를 공급하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 종종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준비시키려고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법칙입니다. 그 법칙은 교회의 긴 역사 속에서 성도들에게 확증되고 예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과업을 이루고자 하실 때에 그는 저를 일반적으로 그렇게 단련시키십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의 전기를 선택하든지 상관 없습니다. 당신은 그의 경험 속에 가혹한 시험과 시련의 때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아보시기 전에는 어떤 사람도 쓰시지 않으려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큰일을 앞두고 있을 때에 이 같은 경험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 성경의 가르침과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께서 때때로 사람을 이처럼 큰 시련을 통해서 준비시키십니다. 제 말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좀더 작은 시련을 주심으로써 어떤 큰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준비시키신다는 뜻입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영화롭게 빛나고 있음을 봅니다. 인생에서 다가오는 큰 시련들이 있습니다.....하나님은 종종 당신의 사랑과 부드러운 방법으로 더 큰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작은 시련들을 보내어 우리를 준비시키십니다. 필요하다면, 만일에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다고 확증을 가지실 때에 우리의 아버지처럼 우리를 내려다보시면서 바로 그 순간에 필요한 것들을 보내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며 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다 알고 계신다는 대원칙을 가지고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적합한 시련을 작정하십니다.
- 하나님은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은 것들로 하여금 떨어져 나가도록 하시기 위해서 불 같은 시련으로 우리를 단련하십니다. 우리는자신의 믿음이 완전하여 그 어떤것이라도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에는 아직도 믿음의 요소들이 더 발전되어야만 할 필요성이 있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리고하나님께서 바로 이런 식으로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필요한 믿음의 요소들을 더욱 발전시키십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더 많이 경험할수록 우리는 하나님 신뢰하기를 배웁니다. 그가 우리에게 미소를 지으실 때에는 우리가 매우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지만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을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의심하게 되고 또 우리가 생각했던 신앙생활이 이것인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아직 우리의 신앙에 믿음의 요소들이 개발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전혀 빛을 볼 수 없는 암흑속에서라도 그를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자신 있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지점까지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모든 것이 우리의 앞길을 막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어도
우리는 알지요
하늘에 한 문이 열리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계심을. '
- 하나님은 저에게 가장 좋은 것인 무엇인가를 아십니다.저는 그를 신뢰합니다. 심지어 그가 나를 죽이신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그를 신뢰하겠습니다.'
- 시련은 그 믿음이 가짜 믿음이었는가 아니면 그 믿음이 참된 혹은 진실하지 못한 믿음인가를 입증해 줍니다. 사람의 믿음의 진실성을 확증하는 것은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참고 인내하는 것으로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 우리가 많은 시험과 시련을 통과하면서 큰 근심 가운데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는 동안에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상관없습니다.우리에게는 "보좌 한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생명수 샘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약속이 있고 또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요 영광 중에 영원히 그와 함께 있으리라"는 보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17장. 징계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떄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이요 징계는 다 받는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 (히 12:5-11)
-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큰 목적은 성결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너희의 거룩함이니라'(살전 4:3) 또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긴 관심은 우리의 행복이 아니라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그의 크신 사랑 안에서, 그는 우리를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시려고 작정했으며 또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많은 다른 방법들을 동원하십니다.
- 죄와 어리석음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를 대우하시는 어떤 방법에 관해 종종 완전히 오해하곤 합니다. 어리석은 아이들처럼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불친절하시다고 생각하며 또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를 함부로 대하신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를 침체 상태로 이끌어 줍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기인됩니다.
- 구원의 전과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사역이며,하나님께서 그일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한 번 일을 시작하셨으면,그는계속해서 일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 하나님께서 한 번 일을 시작하셨다가 그것을 포기하시고 미완성 상태로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 우리가 고통스러운 어떤 일을 당하게 된다 할지라도 놀라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런일들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중하게 생각하시어 성화의 한 과정으로 우리에게 보내는 것' 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는 우리가 자신을 점검하고 또 우리가 이것을 경험했는지 혹은 경험하지 못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대하신 경험이 전혀 없다면,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인가를 의심해 보아야만 하기 때문이라고 그가 말합니다.
- 그 과정에 대하여 우리가 괴로워하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자녀이고 또 그가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취급하시는 증거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를 그 형상이 이루어지고 또 아버지이신 당신에게 합당한 자가 되도록 우리에게 벌도 주시고 징계도 하십니다.
- 바울은 이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던 것은 저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의뢰하지 말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뢰하기를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 징계는 훈련을 뜻한다. 그것은 어린아이를 훈련할 때에도 사용된다. 그것이 어린아이를 연단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참새 한 마디로 너희 천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우리 아버지와 상관없이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이 유쾌한 환경이든 유쾌하지 못한 환경이든 환경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성화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교훈을 관찰하고 주시하면서 문제되는 것을 찾고 물어 보아야만 합니다..
- 성경은 이 같은 측면에서 종종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특별한 환경이 있음을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재산을 잃거나 물질의 위치 변동, 물건 분실, 재산 상실, 그리고 돈을 분실하는 것 등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종종 이런 것들을 사용하십니다. 당신은 구약 성경에서 그에 대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계속되는 역사를 통해서도 체험됩니다.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입장에서 무엇을 잃어 버리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는 분명하게 깨달을 수 없는 어떤 교훈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건강의 문제를 사용하십니다....아무도 올무에 걸려서 "당신은 모든 질병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징벌이라고 가르치십니까?" 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종종 당신의 자녀들을 징계하기 위해서 그같은 방법을 사용하신다고 말씀드리는 것 뿐입니다...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육체의 건강보다 더 중요합니다. 만일에 사람의 말씀이 적극적인 교훈에 굴복하지 않거나 복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저를 보아 줄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에게 질병을 보내사 그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드러눕힐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유명한 토마스 찰스 박사가 늘 하던 말씀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복음을 참으로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저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던 것은 질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질병은 저를 거의 열 두달 동안이나 병실에다 가두어 둔 바 있습니다. 그는 명석하게 학적이고 지적인 설교자였습니다. 하지만 병실에서 퇴원한 후에는 복음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찾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 "내가 약할 때 강함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건강할 때보다는 차라리 아픈 가운데 기뻐하도록 가르치시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용하셨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그가 이렇게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의 종을 징계하고 훈련시키기 위해서 그것을 직접 보내셨다고 봅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은 핍박을 허용하십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재산을 빼앗겼으며 집들이 파괴되었습니다. 저들은 "왜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우리에게는 고통뿐이고 오히려 불신자들이 모든 것이 잘되고 범사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말입니다......하지만 이 교훈은 좀 더 깊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을 사용하시되 죽음까지 동원하실 때가 있습니다. "너희 중에 약하고 병든 자가 많으며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도다" 그것은 하나의 신비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런 모든 일들에 어떤 의미가 있따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과 또 생애 가운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그리고 환경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시험에 합격하고 떨어지는 일, 건강이나 질병 등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를 위한 당신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당신이 만일에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 모든 일들은 당신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 징계하시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의 독립적인 항목으로 취급하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 분명한 목적을 위하여 때로 자신의 존재를 숨기시고 또 얼굴을 가리우시는 듯하실 때가 틀림없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이 바로 욥기서의 대주제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회개할 곳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자신이 물러가서 현존을 숨기시고 얼굴을 감추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성화의 한 방편입니다.
당신 자신이 전혀 잘못한 것처럼 깨달아지는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고 또 당신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버리셨다고 느껴지는 그 현상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징계하시는 방편 중에 하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큰 목적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준비과정 혹은 훈련과정의 일부라는 말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사실상 히브리어 12:5~15 사이에는 이 질문에 대한 자세한 설명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이유인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지하심이니라." 그것이 근본적인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그렇게 잔인한 분으로 나타나시는 것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바로
"만일 너희가 징계를 참으면 하나님이 너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느니라"고 번역했습니다. 다른 번역들은 "만일 우리가 징계를 참으면"이라고 번역되지 않았으며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위함이라"고 번역되었는데 차라리 그것이 옳다고 봅니다. 당신이 왜 참으십니까? 그 대답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징계를 위하여 참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참고 있는 이유는 자신의 성장과 훈련과 발전을 위한 것입니다. 당신이 참고 있는 것은 자신의 징계의 일부라는 말입니다.
징계가 무엇입니까? 자기 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고난과 참음과 모든 불행에 우리를 준비시키고 훈련시키려는 위대한 목적과 목표가 있다는 사실을 단단히 붙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그가 완전하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참으로 당신이 이 세상에 살 동안에 그 상태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옛 사람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이 특별한 어떤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징계를 사용하시는가를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그 중에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영적 교만 혹은 위험스럽고 잘못된 영적 우월감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완벽하고 확실한 성경 말씀들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약한 것들 외에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하심이니라." 설명이 완전합니다. 그 사도는 매우 드물고 예외적이며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가 삼층천에 올라가서 매우놀라운 일들을 보고 듣고 느꼈다는 것입니다.위험이 있다면 영적으로 교만하게 되는 것이요 너무 자고하는 것입니다......영적 교만은 무서운 위험물입니다. 그것은 집요하게 다가오는 위험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비와 사랑으로 어떤 특별한 경험을 하도록 허용 하신다면, 우리는 마귀가 우리를 해하려고 만들어 놓은 위치에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저들이 바르고 안전한 위치에서 보호받기 위한 징계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 또 다른 위험은 자만심이라는 위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여러가지 은사를 주셨습니다. 사람이 자신과 또 자신의 재능만을 믿고 하나님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위험입니다. 이런 것들은 육체의 죄가 아니고 영적인 위험들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더 위험스럽고 간교합니다.
- 다음에 세상과 그 풍조에 매혹당할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합니다.
- 또 다른 위험은 자신의 현 위치를 의지하는 위험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때에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만족하는 위험, 곧 뽐내고 자기 만족에 머물러 있는 위험입니다. "우리는 현대주의자가 아닙니다.우리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는 식으로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통입니다. 우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일들은 계속하지 않습니다.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완전하다고 믿습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삶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이것이 저들의 생각입니다.
- 성화란 적극적인 덕성들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8복과 산상수훈에 나타나고 있는 대로 본을 보이며, 또 성령의 열매, 곧 사랑과 희락과 평강 등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 보이는 그런 인격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성화의 의미입니다. 성화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점검하기 위하여 말씀의 적극적인 교훈을 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징계라는 수단이 필요한것입니다.....우리가 시야를 고정시켜 주님만 바라보았더라면, 모든 것이 다 잘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그렇게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징계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또 우리 안에 이런 덕성들을 이룩하기 위해서라도 징계가 필요합니다.
- 겸손은 모든 보석 중에 값을 매길 수 없는 보석이며 모든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 중에 최고로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 자신이 가지셨던 최상의 특지잉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겸손에 이르기 위해서 겸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실패 또한 거기에 이르는 데 매우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항상 성공적이라면 겸손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겸손케 하시려고 때때로 실패를 징계로 주시는 것입니다.
- 같은 경험을 함으로써 그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다면, 우리가 공감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공감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한 사람의 목사로서 사역을 감당하는 중에 저 자신이 친히 경험해 보지 않았더라면 사람들과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과 동시에 저들의 문제를 이해할 수도 없었을 것이란 점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내의 필요성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 때때로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 대해서 오래 참는 것을 너는 알지? 너도 가서 이웃을 오래 참아 주는 사람이 되어라"
- 이 같은 다루심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면 저는 당신에게 돌아가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인지 혹은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닌지 살펴보고 확인해 보라고 권고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느니라"고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제18장. 하나님의 훈련장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떄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이요 징계는 다 받는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 (히 12:5-11)
- 징계는 자동적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기계적으로 되어지는 그 무엇이 아니며 궁극적으로 말씀에 의해 우리에게 유익을 줍니다. 성화의 전체적인 역사는 요한복음 7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진리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성화는 어떤 단계에서 혹은 어떤 측면에서든지 말씀의 적용에 의해서 나타납니다. 더군다나 그것은 징계에 관한 모든 문제에 있어서 특별히 사실입니다.
- 징계에 대한 잘못된 태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징계에 대한 잘못된 반응이 있다는 말입니다.우리가 살펴본 징계에 여러 가지형태가 있음을 당신은 기억하실 겁니다. 그것이 환경을 통해서 올수도 있습니다. 또 그것이 재정적인 손실 혹은 사업이나 직업의 문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좌절하게 만들고 또 고민하고 당황케 만드는 그 무엇으로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또 친구의 배신이나 우리의 생애 가운데 가질 수 있는 큰 희망이 완전히 무너져 버리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질병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제가 여기에서 반복하여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모든 것들의 필요성이 반드시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역시 모든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징계가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 교훈은 질병이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질 수도 있고 또 여러 가지 환경에 의해서 고통을 당할 수 있는 것처럼 때로 하나님이 질병이란 수단으로 우리를 징계할 수도 있따는 말입니다.....하나님께서 이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달갑지 않은 일들이 모두 징계를 필요로 하는 하나님꼐로부터 왔다고 말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 시련과 환난과 징계에 잘못된 반응
1) 경시하는 위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라)
2) "그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이 일이 왜 일어나게 되었으며 또 하나님께서 과연 정당하신가라는 의구심으로나갑니다....우리는 주께서 징계하실 때 히브리서 기자가 가르쳐 주고 있는 대로 그 징계를 직면하는 대신에 주님의 징계가 너무 빈번해서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반응을 보입니다.....시편을 읽어 보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은 시편 기자가 그런 상황을 자주 통과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대우하시는 사실에 대하여 완전히 잘못되고 거짓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3) "쓴 뿌리가 나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 어떤 사람들은시련과 고난과 징계를 쓰라린 태도로 생활 속에서 반응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어떤 사람들의 삶 속에 나타난 시련과 고난의 효과를 지켜보는 것보다 저의 삶을 더 슬프게 만드는 것은 없다고 봅니다. 저는 불행이 저들을 감싸기 전에는 그렇게 멋지고 친절했던 사람들이 저들에게 이런 시련이 찾아올 때 본즉 너무 쓴 뿌리 같고 자기 중심적이며 심지어 자기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괴로움을 주는 사람으로 바꾸어졌던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저들은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버렸고 온 세상이 저들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저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저들의 영혼에 쓴 뿌리가 나서 얼굴과 모든 표정에그것이 드러나 보일 정도입니다. 완전한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은 일반적으로 불행이 올 때 쓴 뿌리가 됩니다. 때로는 일시적일지라도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들까지 징계나 고난에대한 특별한 반응을 통해서 경고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쓴 뿌리가 나는 데대한 경고를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위 세 가지 반응 가운데 하나에 걸리는 죄인이라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그런 식으로 반응한다면 하나님의 징계라도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그것을 가볍게 떨쳐 버리거나 낙심하든지 혹시 그것으로 인하여 쓴 뿌리가 난다면 그것으로 인하여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합니다. 심지어 하나님 자신이 계산하여 보내신 징계마저도 우리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본서의 저자는 편지의 대상인 성도들에게 올바른 태도로 징계를 맞이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1) 우리가 유아가 아닌 성장한 아들로서 행동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힘내라, 그리고 어린아이들처럼 굴지 말라, 당신이 성경에서 큰 지혜를 배우고 그 접근 방법을 터득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성년입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말라고 제안합니다. 울고불고 하는 어린아이의 행동을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젖먹이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당신 자신이 스스로 어른이라고 말해 보십시오
-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당신에게 행하심으로 당신을 영적 훈련장으로 보내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신의 옷을 벗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점검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필요를 정확하게 아십니다. 이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에게 완전히 복종하고 그분이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바에 정확하게 순종하면 됩니다. 교관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훈련을 끝까지 잘 받으십시오. 당신이 그렇게 할 떄에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 우리가 해야 할 첫번 째 일은 우리 자신을 살펴보거나 혹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검증 받도록 의탁하는 것입니다. 어떤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할 때에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나는 훈련 중에 있다. 무엇인가 문제가 있음에 틀림없다.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가?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바로 이런 일들 중에 어느 것이 발생했을 때에 그리스도인이 취해야만 할 태도입니다.
- 시편 119편을 읽어 보십시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나니 이제는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그는 자신이 곁길로 빗나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그로 하여금 생각하게끔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 시련을 당할 때에 일종의 저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들은 자신에 대해서 매우 가련하게 생각하며 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고있습니다.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자세를 취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은 떨쳐 버리십시오.. 늘어진 손을 높이 올리십시오. 연약한 무릎을 쭉 펴십시오. 자신을 일으켜 세우십시오. 자신이 성인임을 깨달으십시오. 기운을 내십시오" 이런 것을 실천해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제19장. 하나님의 평강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4:6-7)
-당신이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가 있다면 또 당신이 염려를 잘하고 침울한 분위기에 잘 빠지는 사람이라면, 혹자가 기도하라고 말해도 자신의 간구를 가지고 하나님꼐돌진해 가지 마십시오. 그것이 방법은 아닙니다. 당신이 자신의 요구를 하나님께 아뢰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에배하고 또 경배하십시오. 하나님의 존전에 나와서 잠깐 동안 자신의 문제를 잊어보십시오. 당신의 문제부터 꺼내 놓지 마십시오. 당신이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기도라는 말 속에는 원래 그 말 자체에 대면한다는 개념이 들어있습니다.당신이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서 그 임재를 꺠닫고 또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으며 당신이 경배할 때에 자신을 쏟아 부으십시오. 그것이 바로 시작입니다.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어려울 때 기도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유발되는유쾌한 감정) 그것은 매우 좋은 심리학이지만 철저하게 나쁜 기독교이다. 기도는 자기 암시가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문제를 잠시 잊고 위안을 얻을 것이다'라는것도 훌륭한 심리학일 수 있찌만 악한 기독교임에 틀림없다.
만일 네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으로 네 마음을 가득 채운다면, 이런 생각이 다른 모든 것들을 쫓아낼 줄 것이다. 역시 좋은 심리학이지만 기독교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또한, '기도가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다'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기도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그것이 심리학일지 몰라도 복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 사도가 말한 것은 바로 이 것입니다.
"네가 기도하고 하나님께 아뢸 바를 아뢰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위하여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이다." 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당신의 기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역사를 일으키는 장본인 역시 당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십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이 바로 그 평강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여, 당신을 넘어뜨리고 불안희 희생물을 만들면 신앙생활과 증인의 삶을 좀먹고 파괴하는 병적인 염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보호하고 지키며 파수해 줄것을 절대적으로 보장해 줄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의 심각한 고통이 당신에게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제20장. 자족하기를 배우라
"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했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0~12)
-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선물과 친절에 대하여 감사하는 이 문제가 바울에게 하나의 과제였음에 분명합니다...바로 이 일을 위해서 그는 10절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가 중요한 교리도 1절 혹은 2절로 설명하는 일을 끝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저들의 정성과 친절에 대하여감사하는 말을 하는 데 열 절이나 소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또 바울이 스스로 반복하여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궁핍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 라고 하면서 다시금 '선물을 구함도 아니'라고 첨언하고 있습니다.....그가 적당한 말을 찾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의 고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는 저들의 친절 때문에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매우 감사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더 간절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비슷한 간절함으로 사랑의 표현을 기다리거나 바라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어했습니다. 더군나나 저들로부터 착함과 관용을 의존하려는 생각도 전혀 없었음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이 같은 면에서 그가 하나의 문제에 직면하게 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감사를 표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험의 본질을 삭감하거나 훼손하지 않는 방법으로 그 일을 해야 했습니다. 바로 그 같은 이유 때문에 그가 열 절이나 할애한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감정에 민감하고 또 두가지에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신사적인 그리스도인의 과제였습니다. 이 사도가 얼마나 훌륭한 신사였는지 모릅니다. 그는 진정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저들에게 감사하는 중에 혹시나 주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거나 절대적인 의미에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의지했다는 암시의 흔적을 나타내지않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자신에게 배풀어준 개인적인 배려와 정성에 대하여 감사와 애정의 뜻을 표하면서 동시에 주님이 최고의 가치이시고 또 주님으로 만족한다는 사실을 깜짝 놀랄 정도로 확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유익이 된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미 노인이 되어있었습니다. 그가 젊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네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는 일, 곧 자족하는 경건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수많은 사례들 가운데 몇 가지에 불과하다."
- 삶에 있어 최대의 과제 가운데 하나는 원망의 감정없이, 불평이나 마음 아파하지 않고 모든 것을 참아내는 법을 발견하며 또 근심이나 걱정하지 않는 법을 발견하는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그런 법을 배웠으며, 모든 시련과 핍박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2차 대전 초기에 '지루한 등화관제'를 통해 깨닫게 된 의존성 (TV,연극,영화와 다른 형태의 오락들)
우리들이 직면한 가장 큰 위험들 중에 하나가 집회를 의존해 가고 있다는사실이다. 집회에는 매우 큰 가치가 부여된다. 주일에 한 번만 집회에 참석하라는 말도 아니다.집회란 좋고 유익하다. 하지만 집회에 너무 의존하는 사람이 되어 어느 날 우리가 병들어 집에 누웠을 때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 어떻게 할 줄 모르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이다.
우리는 그것이 예배나 전도라 하지라도 그것을 너무 의지하는 위험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사도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의존하는 상태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자족하는 방법을 함양해야 한다.
화이트 헤드 교수는 '종교란 인간이 자기 자신의 고독을 견디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우리는 혼자 있을 떄의 모습이 진정한 우리의 모습이다.
- 바울은 자신이 이런 상태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 보면 바울이 이렇게 될 때까지 특별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암시가 많습니다. 바울은 예민했고 또 천성적으로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는 속박을 당해 지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차라리 노예들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을 참으며 인내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배우게 되었노라. 내가 비결을 배우게 되었노라. 내가 비밀에 이르도록 배웠노라."
그는 경험에 의해 배웠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바울은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했으나 가시는 떠나지 않았고, 참아야만 했다......그리고 그는 교훈을 받았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다루시는 순수한 경험의 결과로 이해하는 자리에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는 배워야만 했습니다. 그를 가르쳤던 바로 그 경험이 오늘날 우리 모두를 가르칩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배우는 데 매우 느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친절하게도 질병을 보내 주십니다. 때로는 그는 우리들을 떄려 눕히기도 하십니다. 그러한 것들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또 큰 교훈을 얻게 하셔서 우리를 기어이 귀한 위치로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경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위대한 진리를 위대한 논증의 역사를 통해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1) 상황은 항상 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상황을 의존해서는 안 된다.
2) 가장 중요하고 또 본질적인 문제는 내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3)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씬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4)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은 큰 신비이다. 하지만 그가 뜻하시고 허용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의 유익을 위하여 필요한 것임을 나는 안다.
5) 삶에 있어서 나타나는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에 대한 표명임을 밝혀 주는 것이다.
6) 그러므로 내가 환경이나 상황을 있는 그 자체로 보아서는 안 되고,차라리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온전케 하시며 나를 최종적인 완전 상태로 이끌기 위하여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생각해야 한다.
7) 현재 나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그것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결코 나에게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나를 기다리는 기쁨과 영광을 빼앗아 갈 수 없다.
-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위험은 그리스도에 관한 책을 읽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그 날이 올 것입니다. 참으로 올 것입니다. 우리가 책을 읽을 수 없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떄에는 시험도 옵니다. 당신이 여전히 행복할 것 같습니까? 당신은 자신이 귀머거리나 소경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의 샘이 여전히 열려 있을 만큼 그를 잘 알고 계십니까? 언제나 당신이 그와 이야기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그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잘 아십니까? 그분과의 관계가 언제나 그를 의지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다른 어떤 일도 진정 문제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상태였습니다. 주님과의 친밀관계가 너무 깊고 컸기 때문에 모든 것을 초연할 수 있었습니다.
제21장. 궁극적 치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모든 문제의 핵심이 있습니다. 나와 그리스도와의 올바른 관계 그리고 바른 균형이 그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의 첫 번째 혼동 : '나'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체스터톤씨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는 자신이 단순한 생활을 반대하는 주원인이 바로 그런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백만장자가 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시간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만일에 당신이 노동자라면 여가나 쉴 기회를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처럼 안일한 삶을 살기전에 먼저 백만장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봅니다. ...만일에 당신이 고귀하고 지성적인 사람으로 태어나서 시간과 여가를 가질 수 있다면, 당신은 여러 주씩 혹은 여러 날씩 마음과 정신의 수양에 전념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것은 여가도 못 내고 정력도 없는 사람과 특별히 자성적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되지 못합니다.
신앙 생활이란 나 자신이 살고 또 자신의 힘으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나 자신은 완전히 없어지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하시는 그런 삶도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삶입니다.
- 저는 이 교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능력의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가능한 바를 신약성경으로부터 발견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와 더불어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를 알아야만 합니다. "내가 그를 알려 함이라" 그것이 바로 바울의 꿈이었습니다.
그가 제게 말씀하시는 바를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방해되는 것들을 피해야 합니다. 건강을 위해 너무 많이 먹거나 찬바람에 노출 되면 안 되듯이 우리가 영적 규칙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능력을 얻기 위하여 끝없이 기도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결코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에 지름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우리가 핍박 중에라도 바울과 같은 심정을 가지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바울처럼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께서 저에게 하라고 하시는 것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동시에 다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을 연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당신에게 말씀하신 바를 적극적으로이행하고 또 쉬임 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거한다는 것은 참으로 활동적인 것입니다.
- 능력을 달라고 기도로 간청하면서 번민하지 마십시오. 그가 하라고 말씀하시는 바를 행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그를 묵상하십시오. 그와 더불어 시간을 보내시고 자신을 당신에게 나타내시기를 간구해 보십시오. 당신이 그렇게 하시는 동안 당신은 나머지를 그분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가 당신께 힘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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