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를 향한 저자분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지는 책이였다.
활자에서 느껴지는 그의 자상함과 솔직함으로 그의 품성을 유추할 수 있었다.
글쓰기란 '나의 감정을 배설하는 프라이빗한 매체'일 뿐이였다.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도 않았건만,
이 책을 읽고 본격적으로 기획을 해야 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꼼꼼하게 읽되, 많이 읽고, 나의 이야기(내가 만난 하나님)를 써야 한다'는 저자분의 말이 뇌리에 제대로 박혀 있다.
글쓰는 그리스도인 - 김기현 지음 -
프롤로그 - 내게는 책이 필요하다
1)왜 나는 글을 쓰는가?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본받음' 이다. 그리스도와 사도를 본받아 그들이 겪었던 고초에 시달려야 할 제자가 교수가 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난센스다 (죄렌 키르케고르)
왜 그러한가? 그리스도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지고 죽으시는데, 신학 교수라는 사람은 그 분의 죽음을 논문으로 작성해서 교수가 된다. 키르케고르는 확언한다. "교수라는 존재는 후대의 그리스도교가 만들어 낸 발명품이다."
- "예수는 책을 쓰지 않고 공동체를 만들었다" - 레슬리 뉴비긴-
주님의 의도는 자신의 이야기를 삶으로 살아내는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 창조에 있었다.
-그럼에도, 예수 본받기는 예수를 기억함이고(키르케고르),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기록된 성서 공동체(뉴비긴)이기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공동체다. 그것이 예수를 살아내는 방법이자 핵심이다 교회는 예수를 살고 말할 뿐만 아니라 예수를 기록한다
2) 왜, 무엇을 쓰는가?
- 성서를 먹는다의 의미 : 성서를 암송하고, 그렇게 살아내는 것
- 그리스도인의 글 쓰는 목적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20:31) "기쁨의 충만함"(요일1:4)
- 무릇 그리스도인의 글쓰기도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증언하고 표현하며, 그 글을 읽는 이들도 생명의 대열에 동참하도록 초대한다.
- 무엇을 쓸 것인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것을 다 증언하였습니다."(계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말과 일,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다. (목격자의 진술인 셈)
네 개의 복음서는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을 기록했지만, 모든 증언은 각자의 렌즈와 경험을 거쳐서 표현된다.
- 왜, 무엇을 쓸 것인가? 는 곧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가를 묻는 것과 같다. 자기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글로 쓰면 된다.
사도 요한은 우리더러 목격자라 했다. 내가 만난 하나님과 내가 겪었던 사건을 본 대로 진솔하게 진술하면 그만이다....그리고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지, 무엇이 온통 나를 사로잡고 있는지, 바고 그것이 내가 써야 할 바로 그 주제다.
3) 어떻게 쓸 것인가?
- 요한의 글쓰기가 글을 쓰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면, 누가의 글쓰기는 글을 읽는 독자의 상태를 주목하게 한다.
- (의사로서의) 습성이 몸에 배여 있던 누가는 예수님에 관한 자료도 면밀히 검토하고 이치에 맞게 조직한다. 성령과 기도를 누누이 강조하는 누가의 감성과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향한 누가의 열정을 가안하더라도 누가는 역시 역사가요 과학자다운 면모를 잃지 않는다. 누가가 자료를 대하는 데서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누가는 자신이 쓰려는 주제와 관련된 모든 자료와 증거, 증언을 수집했다. 그에게는 '모든 일'이 예수의 일이었고, 예수와 관련되었다. 글과 책을 쓰려면 부지런히 자료를 찾고 구하고, 부릴 줄 알아야 한다.
- 자신의 관점에 따라 의도에 부합하는 체계 하에 정보와 경험을 조직하는 것이 누가의 글쓰기 방법론이다. 그렇게 논리적으로 써야 데오빌로처럼 믿기는 하지만 불안하고 흔들리는 이들을 확실하게 세우고 잡을 수 있다. 정리하자면, 자신이 원하는 독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쓰라는 것이다.
4) 글쓰기 인생
- 그리스도인 작가의 기쁨은 말과 글로 세상의 생명을 만들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데 있다.
- 왜 글을 써야 하는가? 하나님이 그리 하고 계시니까. 그리 하라 하시니까. 내 안의 주체하지 못할 생명과 기쁨이 있으니까. 그리고 글 쓰는 것이 내게 생명이고 기쁨이니까. 내 글을 읽는 소수의 독자들이 내가 누렸던 것을 동일하게 경험하니까. 오늘도 나는 글을 쓰고 있다.
- 논리적으로 써야한다....쓰고 싶은 주제에 관련된 중요한 자료와 방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그것들을 읽고 소화하고, 나름 체계와 질서를 부여한다. 글의 알파와 오메가, 처음와 끝을 상상하고 구상하고 쓴다.
- 책 읽기가 글쓰기의 시작이다. 좋은 글을 읽어야 좋은 글을 쓴다....좋은 영성 작가가 되고 싶다면 영성 깊은 글을 많이 읽어야 한다. 하도 많이 읽어서 이게 내 말인지, 누구 말인지가 헷갈릴 정도가 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1부. 왜 글을 쓰는가
1장. 글쓰기는 영성을 훈련한다 (자서전과 기도문)
1) 나는 사람이다.
- 존 스토트, '영성'이 회자되는 현실에 대해 우회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그에 따르면 개신교는 전통적으로 영성 대신 제자도 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영성을 선호하는 이면에는 섬김과 나눔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제자도를 꺼려하는 심리가 작동한다고 본 거다. 고요한 관조 속에 자기 내면을 채우는 영성이 자기희생으로 이웃을 섬기는 제자도보다 아무래도 만만하다. 그러나 영성과 제자도는 다른 말이 아니다. 영성은 그저 에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삶의 정의는 '그리스도를 뒤따름' 이다.
영성이란 지금 여기서 예수의 삶을 살아내는 것을 말한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존스토트, "진정한 제자도는 소극적으로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과 적극적으로 몸의 지체를 '드리는 것' 둘 다를 포함할 것이다." 영성은 몸으로 영을 사는 것이다.
- 영성의 최대 걸림돌은 깊이 없음이다. 리처드 포스터는 우리 시대의 영적인 질병이 바로 피상성이라고 진단했다."피상성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즉시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사상은 근본적인 영적 문제다. 오늘날 절실히 요처어되는 사람은 지능이 높거나 혹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피상성은 '시끄러움과 조급함과 혼잡함을 통하여 크게 역사한다.'
겉만 그럴 듯한 표면적 삶을 극복하기 위해 포스터가 내 놓은 처방은 영적인 훈련이다.(묵상,기도,금식,고백 등)
- 글쓰기만큼 깊이를 더하는 수단이 없다. 글쓰기만큼 속도의 시대에 반하는 느림이 없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기록하는 행위는 그분과의 관계에 깊이를 더하고, 끈기를 요하고, 속도에 반한다. 글쓰기는 머릿속에 떠다니던 것이 구체적인 몸을 입고 종이 위에 강림하게 된다.
3) 자서전을 쓰라
- '<글쓰기 생각하기>의 저자 윌리엄 진서의 묘사, "글쓰는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주제 가운데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 다시 말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다"
글쓰기가 어렵다고 느껴지면 자기가 가장 잘 알거나, 관심이 있거나, 배경 지식이 풍부한 분야에서 글쓰기를 훈련하는 것이 좋다. 자기 이야기만큼 편안하고 만만한 주제는 없다.
- 몸을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는 진리란, 몸을 경시하고 몸 없는 영을 추구하는 헬라와 영지주의의 것이지, 기독교와 하등 상관 없다. 그러므로 "전기는 최상의 신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삶의 이야기는 최상의 신학이고,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글쓰기는 최상의 영성 훈련이 될 수 있다.
4) 베드로처럼 솔직하자
- 자서전을 쓸 때 자기기만을 조심해야 한다. 전기에 비해 자서전은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속임수가 끼어든다.
-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통역자요 비서였던 마가 요한이 기록했다. 그래서인지 베드로의 성격과 특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런데도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베드로의 오류와 오점을 낱낱이 기술한다....당시 초대교회에서 베드로가 갖고 있는 위치나 중요성을 감안해서 대충 봐주거나 넘어가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와 마가의 관점도 적용했겠지만, 베드로의 솔직함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한다. ....마가복음은 실패한 베드로를 엄히 꾸짖고 그를 회복시킨다.
- 린다 스펜스의 글쓰기의 네 가지 장애물
<1> 누가 내 인생에 관심을 둔단 말인가.
: 내 실패에서 내가 무언가를 배웠듯이 다른 누군가도 배울 것이다. 혹 그가 비웃는다면 그건 그의 몫이고 그의 인격이다. 당신과는 무관하다.
<2> 내가 잘 쓸 수 있을까.
: 우리의 목표는 걸작이나 대작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살아냈는가를 말하려는 것뿐이다.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나 아니면 누가 쓸 수 있단 말인가?
<3> 이렇게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 자기도취에 빠지라는 말이 아니다. 지난 시절에 있었던 일을 숙고하면서 그저 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과 생활 가운데 동행하시고 간섭하시고, 때로는 멀찌감치 서서 침묵하시던 그분과 나의 이야기를 쓰면 된다.
<4> 그냥 묻어 두는 게 더 나은 것도 있지 않을까
: 덮어 두고 싶은 비밀을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이 성숙하면서 새롭게 보는 안목이 형성되기도 하고, 자서전을 쓰면서 그런 관점이 생기기도 한다.
5) 기도를 쓰라
글쓰기로 하는 기도의 유익 (루시 쇼)
"누구나 기도할 때 겪는 문제가 있다. 마음이 혼란스럽고, 단편적인 기도에 머무르며, 하나님과 지속적인 대화를 나누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데 기도를 글로 적어 보면 놀라운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기도하면서 여기저기 흩어졌던 생각들이 하나로 모아져서 좀 더 집중하게 되며, 생각과 기도의 흐름을 잘 유지할 수 있다."
- 글 쓰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자신의 변화를 발견하게 되고, 이웃에게 유익을 나누어 주게 된다. 기도문과 자서전 쓰기로 얕음에서 깊이로, 속도에서 느림으로, 조급함에서 인내로 성숙하는 영성에 다다르게 된다.
2장. 글쓰기는 내면을 치유한다 (일기)
1) 나는 화가 난다
C.S 루이스의 [우리가 얼굴을 찾을 떄까지]는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자신을 치유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을 만나는 회심의 여정임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 이런 변화를 일으킨 것은 글쓰기 그 자체였다....책을 끝낼 때조차 분명히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지금은 보인다. 글쓰기가 내 속에 빚어낸 변화는 출발점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글을 통해 자기 안에 신들을 향한 분노, 그리고 베일로 감추고 싶은 자기의 추한 얼굴을 여과 없이 드러냄으로써 그는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 발견하고, 동시에 신과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글은 화를 삭이는 좋은 소통의 도구다. 어쨌든, 글쓰기는 자기표현이자 자기 발견의 도구다. 일기가 내면 치유에 가장 부합한다.
2) 사울 vs 다윗
- 바울은 말한다 "화를 내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영어 성경은 더 재미있다. "화를 내라, 그러나 죄 짓지는 마라 Be angry, but sin not, NASV, KJV"
바울의 권면에는 세 가지 부대조건이 달려 있다. 1) 죄 짓지 말것 2) 하루 이상 화를 품지 말 것, 3) 마귀가 틈타지 못하게 할 것.
- 사울이 분노의 감정을 처음부터 처리하지 못하여 제 자신이 분노의 제물이 된 반면, 다윗은 분노와 슬픔을 때로는 눈물과 통곡으로 걸러냈고, 때로는 시와 음악과 노래로 방출했다. 그것이 다윗의 건강함의 원천이었고, 중심이었다.
- 히브리어 '하가'는 동양적 명상이 아니라 낭송을 의미한다. 낭랑한 목소리로 중얼중얼 경전을 읊는 행위를 말한다.
이 단어를 유진 피터슨은 아주 재미난 예를 들어 설명한다. 묵상은 개가 뼈다귀를 물고 '으르렁 거리는 것'과 흡사하다. 개는 하루 종일 빨고, 물고, 핥고, 갖고 논다. 결코 질리는 법이 없다.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다. 누구도 근처에 얼씬 거리지 못한다. 뼈다귀를 묵상하는 개처럼, 다윗은 하나님을 온 종일 묵상하였다. 개가 뼈다귀에 그렇듯, 다윗은 하나님에 푹 빠져 있다. 피터슨은 성서를 그냥 '읽으라'하지 않고 '먹으라'고 한다.
- 사울은 다윗만을 생각했지만 다윗은 하나님만 생각했다.
다윗은 하나님을 묵상하여 사울을 닮지 않고 하나님을 닮게 되었다. 묵상으로 내면을 채우고, 시를 써서 내면을 정화하였다. 그것이 사울과 비교되는 다윗의 승리의 동력이다...다윗에게 시편은 한편으로 그의 정서를 치유한다. 다윗은 상하고 깨진 마음을 기도와 찬양, 언어와 문장으로 남겼다. 그것이 그를 치유했고, 오늘 시편을 읽는 영혼들도 회복된다.
- 윌터 브루그만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은 카타르시스를 일으킨다. 시편의 이러한 치료의 가치로부터 주춤할 필요는 없다."
- 다른 한편, 올바른 관점을 갖게 한다. 다윗은 시를 짓는 중, 자기를 발견하고, 하늘의 시각을 얻는다....원수 갚은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시인하고 위암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죄를 짓지 않게 되고, 마귀가 틈타지 못한다. "글쓰기를 통해 적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라. 순수한 예술의 힘으로 편협합을 초월해 스스로 위대함을 획득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그런 선택권을 준다."
3) 일기로 내면 정돈
소설가 김원일은 토마스 만이 스물 한 살적에 쓴 단편 소설 <행복에의 의지>를 읽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다. 그로 인해 시대와 삶의 열병을 앓던 자신이 한 줄기 빛을 발견한다.
"그때 나는, 내가 앓고 있는 사회와 대인 공포증, 가난과 외로움, 장래에 대한 불안 따위로 냉가슴 앓으며 자살만 꿈꿀게 아니라, 병든 영혼과 불안 심리를 글로 써보리라 결심했다. 그 길이 바로 내가 나를 이기는 길임을 인식했다"
여섯 살 때 네덜란드로 입양되어 성적 폭력, 정체성 혼돈을 겪은 윤주희는 거식증과 폭식증을 앓았다. 해결의 비밀을 신문 인터뷰에서 말한다. 글쓰기였따. "펜을 들자 용기가 생기고 치료 센터를 찾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지나온 고통에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고통의 경험들이 내가 모든 것을 종이 위에 털어놓을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져다 준것이다. 그것은 나 스스로를 위한 치료요법이기도 했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지긋지긋한 고통이 그녀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는 능력을 주었고, 역으로 글쓰기를 통해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 일기가 주는 유익 (로널드 클럭)
" 일기는 우리들의 감정을 처리하도록 도와준다. 무엇보다 먼저 그 감정들을 글로 표현하면서 발산시킬 수 있다....우리에겐 부정적인 감정을 안심하고 표현할 수 있는 방법 -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없는 - 이 필요한다. 충동적으로 행동하거나 우리들의 자녀와 배우자 혹은 직장 동료들을 신랄히 비난하기보다는, 그 분노의 감정을 일기장에 쏟아 넣는 방법이 좋다.
- 내 속에 또 다른 내가 산다.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나, 그래서 원하지 않는 것을 욕망하고 미친 듯이 헤매도 어쩌지 못하는 내가 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정당한 방법으로 표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그냥 써 보라
3장. 글쓰기는 사고를 계발한다 (서평)
1) 기독교 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 "지금 기독교적 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리 블레마이어의 탄식이다. 무릇 삶에는 나름의 잣대가 있기 마련인데,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주의에 물든 나머지 그리스도인 고유의 원천을 상실하고 세상의 가치관을 끌어 쓴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제자답게 생각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언어를 계발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예배하는 존재와 도덕적 존재이기는 하지만, 더는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다.
- 기독교는 통전적이다. 동양적 명성은 생각을 비우라 하지만, 성서적 묵상은 바른 생각으로 채우라 한다. 지성을 버림으로써가 아니라 지성을 활용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에게 나아간다....다음 세 가지 요소가 잘 계발되지 않는한 생명력 있는 기독교란 불가능하다. 1) 내적으로 헌신하는 삶 2) 외적으로 섦기는 삶 3) 지적으로 합리적인 삶
2)생각하면서 예배하라
- 로마서 12:1~2의 말씀은 제자의 삶의 풍성함과 깊이를 드러낸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2)"
- 예배가 이성적이니 제자의 일상도 지성적이다.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는 말씀도 지성의 강조가 뚜렷하다. 본받지 말라는 것은 '순응' 혹은 '동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새롭게 변화를 받다'는 변혁하라는 뜻이다. 세상의 기준과 패턴에 동화되지 않고 변화시켜야 할 장소도 지성이도, 동력도 지성이다.
-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결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행 17:11)
그들이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들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아멘'을 외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바울의 설교가 사실인지 여부를 세심하게 조사하고 검토하였다. 깊이 있게 성서를 연구하였다. 이것이 머리와 가슴, 지성과 감성이 통합된 그리스도인의 전형이다.
3)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 당한다
-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말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 깊이 의심했다.하나님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사탄의 말을 검토하지 않았다. 정 반대로 사탄의 말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고, 그 내용을 깊이 숙고하지도 않았다.
- 정신적으로 잘 무장되지 않은 사람은 대개 인간의 영혼과 인간관계를 파괴시키는 사상 및 제도의 희생자가 되기 싶다" -고든 맥도날드-
4)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다
-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지 않는 것은 가난이라고 했다. 가난 중에도 제일 위험한 가난이 생각의 가난이라 했다.
- 아이히만의 점범 재판에 참관했던 한나 아렌트는 그의 범죄의 원인을 생각하지 않음이라고 한다. 그것을 그의 말에서 볼 수 있다. 아이히만은 나치가 선전했던 문구나 표현 외에는 다른식으로 말하거나 표현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5) 글쓰기는 생각하기
- 글쓰기가 중요한 까닭은 단연 사고 형성에 있다.
" 나는 그것이 글쓰기가 지닌 뛰어난 사고 형성 기능과 관련이 있다고 믿고 있다. 글쓰기는 단순히 생각이나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글쓰기는 생각을 만들어내고, 지식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우리는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면서 새로운 생각을 만든다. 글쓰기가 논리적 사고, 창조적 사고를 키운다는 말은 그래서 가능하다.
- 논리적 글의 설득력은 생각하는 힘과 그것을 표현하는 문장에 달려 있다.
- 글을 쓸때는 항상 뇌를 풀가동시켜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사고력이 향상된다. 그렇지만 요즘 휴대전화 문자나 개인 홈피의 대략 산만한 글을 쓰는 것은 그리 큰 도움이 못 된다. 주제를 제시하거나 자유로운 글이라도 써보면 간단치 않다. 논리와 내용, 문장을 갖춘 글을 쓰면서 치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장력을 키우면 독서 능력이 향상될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생각하는 힘'도 기를 수 있다는 점이다.
6) 서평을 쓰라
- 독서가 생각의 내용을 채우나면, 서평은 그것을 체계화하고, 정리한다.
- 독서와 서평을 곁들이면 참으로 유익하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말이다. "정신을 위해서 좋은 일이지. 독서를 넓게 하면 정신에 원기가 돌지. 그래서 나는 일반 주제들과 출판물을 다룬 잡지들을 꾸준히 받아보면서 잘 쓰인 글들이나 양서 서평들을 즐기고 있단다."
- 무릇 모든 학문의 기초는 책 한권을 제대로 읽는 것이다. 책 한권 바로 읽지 못하는데 다섯 수레를 읽은들 무슨 소용 있을까. 오독과 왜곡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곁에 두고 아끼며 읽고, 몇 번이고 겹쳐 읽으면서 우리 정신은 자라게 된다.
열권을 각 한 번씩 읽는 것보다 한 권을 열 번 읽는 것이 더 낫다. 책을 천천히 읽으라는 많은 선배들의 가르침은 한 권의 책을 정성스레 읽는 행위를 통해 그 책을 내면화하고, 더 나아가 그 책을 넘어서기 때문이리라.
- 공격적으로 읽지 않으면 책을 잘 읽을 수 없을뿐더러 막상 서평을 쓸라치면 앞이 캄캄해진다.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면밀하게 읽고, 그저 맞장구치면서 읽지 않고 대화하면서도 비판하는 자세를 견지하게 되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자연히 지성이 활발해지게 된다.
4장, 글쓰기는 관계를 소통한다 (편지)
1) 구슬프고 외롭고
- 많은 이들이 이런 소외와 단절의 현상이 발생케 한 주범을 현대사회라고 지목하지만, 성서는 더 근본을 캐묻는다. 성서에서 구원과 죄는 관계의 언어로 묘사된다. 죄는 분리다. 죄로 인해 관계가 끊어지고, 멀어지고, 뒤틀리고, 막힌다. 인류는 하나님을 피하고,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하다. 그러는 중에 그들은 원하는 바가 아니라 원치 않는 것을 행한다. 내 안에 다른 내가 존재한다.
- 때문에 구원은 온전성이다. 소외되고 단절된 모든 관계를 회복하고, 소통시키는 것.
2) 소통하라
- 글쓰기는 소통기술이다. 글과 글쓰기를 통해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한다.
3) 바울 편지를 쓰다
4) 목사, 주보에 쓰다
5)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 설교와 가르침이 선포라는 속성상 일방적이고 때로 고압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반면 엽서나 편지는 격의 없이 교제하고 상담하기에 더 없이 좋은 수단이다.
6) 편지쓰기 위험하다
- 7개월을 고독 가운데 수도원에 머무르기로 결심했던 헨리 나우웬 "내가 편지를 쓰는 것이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바는 필경 내가 이곳에서 잊혀진 채 지내고 싶지 않다는 것.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에 '바깥에' 여전해 존재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내가 쓰는 편지는 부분적으로 이곳 수도원 울타리에 있는 나에게 관심을 쏟도록 사람들을 유인하기 위하여 내가 새로 개발한 방편일 수도 있다.
이처럼 편지가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과시하고 인정받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 관계를 회복하고 깊게 하기 위한 편지 또는 글쓰기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우선하면서도 글과 삶을 일치시켜야 한다. 모른지기 모든 글은 자기 자신을 반영한다.
5장. 글쓰기는 세상을 변혁한다 (칼럼)
1) 무언가 문제다
- 고통을 삶의 중심에 두는 것이 비극으로 보일지 몰라도 삶의 진실이다. 세상은 무언가 잘못되어 있고, 고쳐야 하고,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될 무엇이다.
- 인간이기에 고통당하고, 고통당하기에 인간은 인간이 된다. 한 인간의 성취는 그가 올라선 자리가 아니라 고통을 어떻게 대하느냐로 측정한다. 크게 구분하면 고난 가운데 속절없이 무너지는 이들이 있고, 도리어 딛고 일어서기도 한다. 어떻게 해결한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중층적이지만, 그 하나가 글쓰기다.
2) 하나님, 언어로 세상을 창조하다.
- 글을 쓴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흉내 내기다.
- 하나님의 창조와 언어의 힘의 깊이를 헤아리려면 창세기 당대의 애굽이나 바벨론 신화와 비교해야 한다. 그네들의 세계관에서 인간은 한갓 신들의 잡무를 대신 도맡아 시중드는 노예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 신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공통된 주제였다." 성서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와 같이 하나님 당신과 교제하는 존재를 창조하신다고 말한다. 인간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 조혜정은 말과 글, 책과 삶을 이렇게 정의한다. "말은 계속 겉돌고, 삶은 헛돈다. 그 원인은 식민지성이다. 이는 제 스스로 말하고 생각하려하기보다는 자기 밖의 좀 더 권위 있는 외부에 기대어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이고, 그 결과 일상과 유리된 지식이 난무하게 된다." 한마디로 식민지성이란 자신의 문제를 풀어갈 언어를 갖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3) 관습적 해석에 저항하라
- 고통을 글로 적다보면 마치 박힌 가시를 뽑은 것처럼 고통도 어느정도 견딜만하다. 왜 그런가? 고통은 이제 글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내 속의 감정이 얼추 정리되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 시인 안도현은 익숙한 것과 결별할 때에 시다운 시를 쓸 수 있다고 충고한다. 에컨대, 가을하면 낙엽, 코스모스, 귀뚜라미, 단풍잎 등의 단어를 연상하고 시를 쓴다면 상상력 제로의 형편없는 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상투성은 시의 가장 큰 적이다."
-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세상을 상투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남들이 하는 것처럼 주류 시각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 글쓰기의 즐거움은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 자체가 뭔가 다르게 생각해볼 걸 요구한다는 점일 게다. 그러니 굳이 창의력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글쓰기에 몰입하는 순간 당신은 창의력을 요구받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강준만)
- 정희모는 <글쓰기의 전략>에서 글쓰기를 노동으로 정의한 다음 곧바로 '상식에 도전하라는 명제를 내걸고, 김민웅의 '콜럼버스여, 달걀 값 물어내라"를 예로 든다. 달걀은 처음부터 세워질 수 없는 것인데, 세우겟다고 밑동을 깨는 것은 "상식을 깬 발상 전환의 모델이 아니라, 생명을 깨서라도 자신의 구상을 달성하겠다는 탐욕적이고 반생명적인 발상으로 확대된다."고 비판한다. 콜럼버스 이야기가 발상 전환의 모범으로 회자되어 왔는데, 다시 발상을 전환하여 읽어내는 독법이 놀랍다.
- 단어 '하필이면'은 '왜 네게, 그것도 내게만?'이라는 의문을 전제한다.....그러나 조카가 무심코 내뱉은 말은 달랐다. 집에 들르는 길에 판다 곰 인형 하나 사다 주자 아이는 미소 띈 얼굴로 말한다. "이모, 이걸 왜 하필이면 내게 주는데?" 같은 단어라도 다른 관점과 맥락에 놓이면, 전혀 다른 색채를 띤다.
4) 칼럼 쓰기
- 일단, 원고지 10매 정도를 어렵지 않게 쓸 수 있게 되면 책 한권도 거뜬히 쓸 수 있다. 이처럼 열 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글을 길게 쓸 수 있는 기초적인 실력이 생겨서 책 한권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원고지 500매짜리 책을 한 권 쓴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러면 절대 못 쓴다. 그냥 마음 편하게 원고지 10매 짜리를 50개 쓴다고 생각을 바꾸면 책 한 권 쓰기에 도전해 볼 마음이 생긴다.
5) 원고지 10매 쓰기 실제
- 내 경우 한 단락의 길이를 한글 프로그램에서 5-6줄 정도로 쓴다. 그러면 경험상 원고지 10매는 6-8개의 문단으로 구성된다. 다카시는 기,승,전,결 구조를 추천하지만 서론,본론,결론 형식이 쉬울듯하다. 그리고 본론은 둘에서 셋 정도의 논지를 전개한다.
형식은 서론,본론,결론 구조를 즐겨 사용한다. 본론은 '첫째' '둘째' '셋째'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 명쾌해지고 명료해지기 때문이다. 다카시도 세 개의 키 컨셉을 만들고 연결하여 논리를 구축하라고 한다. 이런 형식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는 없으나, 서,본,결의 구조를 완벽하게 탈피할 수는 없다.
그러면 칼럼 하나는 대략 서론 1~2문단, 결론은 1문단, 본론은 4~5문단으로 구성된다. 서론과 결론, 그리고 본론 세 개 도합 다섯 개의 문단을 각각 쓴다. 그냥 10매를 쓰라고 하면 막막하지만 이렇게 다시 세분화해서 또 몇 개의 글을 모은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다.
2부. 어떻게 글을 쓰는가
6장. 독서 (읽고 또 읽으라)
1) 글을 잘 쓰고 싶으세요?
- 글쓰기를 잘하려면 우선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책읽기의 내공이 쌓이면 언젠가, 어느 순간에 글쓰기가 편안하게 다가오는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그러나 독서가 글쓰기의 초석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쉼 없이 읽어대야 쓸 말과 쓸거리가 생기고,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온다. 책읽기와 글쓰기는 어느 정보 비례하니,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가리지 말고 읽고 또 읽으라. 다른 사람의 책을 하도 많이 읽다 보면, 내 말을 하고 싶다는 충동이 스멀스멀 가슴 밑바닥에서 기어오른다. 그러니 가리지 말고 많이 읽으라.
10세기 중국 송나라 문인 구양수의 '3다' - 다독, 다상량, 다작.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라.
- 아무리 많이 읽어도 건성으로 읽으면 아무 소용 없다. 책을 사물이 아닌 인격체로 대하고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
- 영어를 잘 하는 선배 사례 (단어집은 보지 않고, 죽어라 영어 원서 읽고, 타임지를 독파, 중간중간 단어 찾고, 적고, 암기, 그러다 자신이 판단하기에 어느 정도 수준이 되었다 싶을 때에 어휘집으로 총 정리)
- 글쓰기에 관한 책을 아무리 많이 보아도 글쓰기는 잘 늘지 않는다. 더 답답할 뿐이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으면 '아 , 책은 이렇게 쓰는구나' 라는 감이 온다.
2) 미쳐라, 책에
- '부족해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어느 순간 길이 열린다. 단순무식한 노력 앞에는 배겨날 장사가 없다.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는 동안 내용이 골수에 박히고 정신이 자라, 안목과 식견이 툭 터지게 된다. 한 번 터진 식견은 다시 막히는 법이 없다. 한 번 떠진 눈은 다시 감을 수가 없다. (정민, 미쳐야 미친다)
- 내 일천한 경험으로 보자면 고미숙의 말(공부란 몸으로 하는 것이고, 몸을 바꾸는 것이기에 시시껄렁한 책을 읽는 것은 약발이 별로 없고, 오랜 시간을 견뎌내고 마침내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고전을 읽어야 한다)은 골백번 지당하다. 고전을 미리, 충분히 읽어두지 않으면 글의 체력이 달리고, 생각이 얕아지고, 문장이 가벼워진다.
- 들을 수 없는 사람은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읽을 수 없는 사람은 쓸 수가 없다. (강영안 교수)
- 책읽기가 글쓰기의 전부는 아니로되 준비임에 틀림없다.
3) 생각하면서 읽으라
- 적극적 독서는 질문하며 읽는다. "읽고 있는 동안에 질문을 할 것. 그 질문에는 다시 독서를 계속하는 동안에 자기 스스로 회답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
- 같은 주제의 다른 책을 함께 또는 비교하면서 보는 것은 독서의 최고 정점이며, 글쓰기에 더 없이 유용하다. ...책을 많이 읽으면 대가를 만나게 되고, 그 앞에서 겸손해진다. 여러 견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니 신중해진다.
- 배우면서도 생각하지 않으면 남는 것이 없고, 생각하면서도 배우지 않으면 위태하다. (논어).
아무리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도 숙고하지 않으면 지나가는 바람과 같다. 아무리 생각이 많아도 생각할 거리를 위대한 성현과 지성의 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 끝이 어디로 갈 지 알 수 없으니 위태롭다. 독서와 사색은 하나다.
4) 지저분하게 읽다
- 나는 '행간을 읽을' 뿐만 아니라 '행간에 쓰는'것을 권하고 싶다.
- 성서의 깨끗함은 양심의 깨끗함과 반비례한다는 말이 있다. 성서를 많이 읽어서 성서가 낡았다면 그만큼 그의 양심은 반대로 깨끗할 것이고, 한 번도 제대로 읽힌 적이 없는 성서라면, 그의 마음은 깨끗한 성서와 반대라는 말이다. 이것은 일반 독서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 "책은 정해준 주인이 없고, 선을 즐거워하고 배움을 좋아하는 자가 이를 소유할 뿐입니다. (연암 박지원)
7장. 메모 (머리가 아니라 손을 믿으라)
1) 무릇 한 권을 읽어도
- 섬진강 시인 김용택 "시인이 되려고 해서 시인이 된 것이 아니라 책을 읽다가보니 어느덧 시인이 되었다. 책을 읽으니 생각이 많아지고, 복잡해진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글쓰기를 할 수 밖에 없다."
- 다산은 '무릇 한 권의 책을 얻더라도 내 학문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은 채록하여 모으고, 그렇지 않은 것은 눈길도 주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2) 굳이 메모해야 해요?
- 기억을 위해, 독서의 효율을 위해, 글쓰기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메모 자체가 글쓰기이고, 훌륭한 연습.
3) 카드 작업하기
- 움베르토 에코의 카드 작업
(1) 책 또는 논문들의 독서 카드
: 인용하거나 유용할 듯한 정보를 정리 하는 것.
(2) 테마별 카드
: 정보에 적절한 제목을 달거나 본인이 쓰고자 하는 글의 소주제를 제목으로 삼는 것. (이동원 목사, 기도, 사랑, 헌신, 나눔 등 수백 개의 테마를 잡고, 카드 작업을 하고, 정리 보관하고, 설교할 때 꺼내 쓴다)
(3) 저자별 카드
: 여러 명의 저자를 중심으로 글을 쓸 때 필요. (삼위일체론의 역사, 어거스틴, 칼빈, 바르트와 몰트만 등의 학자들마다 카드 작업)
(4) 인용 카드
: 인용하는 이유과 가치, 그 말에 대한 생각을 적어둔다.
(5) 작업 카드
: 글을 진척시키는 과정이나 흐름을 적어두는 것.
4) 관점이 먼저
- 카드 만들기에 앞서 무엇이 카드에 적을 만한 정보인지를 가늠하는 관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읽고 있는<세상에 생명을 주는 예배>...이 책의 용도는 세계관, 예배, 만찬, 육화, 음식 등.
내가 시급하게 요구하는 것은 기독교 세계관, 세계관의 최종 결론은 '몸으로 예배하는 삶' 당장 필요한 부분을 일차적으로 채록하고, 그런 가운데 만찬에 관한 카드 작업도 병행, 왜냐하면 만찬에 관한 책을 장기적으로 준비하고 있기 때문. 그리고 예배에 관한 자료도 빼 놓지 않는다. 이 책은 예배의 고전이다. ...그리고 종종 버리기 아까운 것들은 별도의 카드 작업을 하거나 영 번거롭다 싶으면 포스트잇이나 책의 여백 등에 저자 이름과 책 제목, 쪽수를 적어 준다.
5) 책에 메모하라
- 카드 작업이 부담스러우면 책에 메모하는 방법도 좋다.
6) 일기장을 활용하라
- 일기는 글쓰기 연습소이자 저장소다. 일기는 상당히 사적인 것이어서 가장 편안하게 쓸 수 있고, 주제 선정도 자유롭다.
- 말씀 묵상을 경건의 일기로 정리해도 좋고, 책을 읽고 난 다음의 소감을 쓰는 독서 일기도 좋다.
카드 작업이 최상이고, 여기에 책과 일기장, 스크랩북을 보태면 금상첨화다. 이런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일기는 흘려보내기 쉬운 자료나 정보, 아이디어를 붙잡는 방편이고, 그것을 문장으로 구성하는 과정에 절로 글쓰기 연습을 하게 되고, 앞으로 사용할 수 있는 좋은 카드가 된다.
8장. 개요 (물 흐르듯이 구상하고 촘촘히 구성하라)
1) 무작정 달려들지 마라
"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곧바로 글을 쓰는 경향이 있으나, 글쓰기에 익숙한 사람은 글을 쓰기 전에 구성하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한다"
무언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급하게 컴퓨터에 앉아 쓰기 시작하면 몇 분 지나지 않아 항복을 선언하고 내려오간, 미련하게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버티다가 시간만 낭비한 채 끝내 뒤로 물러서기 일쑤다.
그 차이는 개요 작성 여부가 만든다. (일기를 쓴다면 구태여 개요를 작성할 까닭이 하등없다)
하지만 논리적 성격이 강한 글은 개요 작성이 필수다.
- 과할는지 모르지만 개요 작성에 글쓰기 전체 시간의 절반 가까이 할애해도 된다. 그만큼 촘촘히 개요를 작성하면 시간의 낭비도 막고, 글의 짜임새도 알차게 된다.
- 글쓰기의 고수들 중에 개요 없이 쓰는 경우도 있지만, 겉만 보아서는 안된다. 마음속으로 이미 글의 틀을 잡고 있다. 간혹 영감과 직관으로 쓸 때가 있다.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손이 그냥 쓴다.
2) 개요가 뭐예요?
- 개요의 유익 : 1) 글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내용의 중복과 누락을 방지해 준다. 3) 글의 균형을 유지해 준다.
3) 발상에서 개요로
- 이 책의 개요
목회자들에게 왜 글을 써야 하는지에 관한 이유를 제시하여 의욕을 고취시키고 싶었다. 이래저래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샬롬과 죄의 4중 구조에 맞추면 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지나갔다. 하나님, 인간, 자신, 환경 말이다. 이것과 글쓰기를 연결하려고 고심해 보니 다음과 같이 정리되었다.
(1) 글쓰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성 훈련에 도움이 되고, 구체적 글쓰기 형태는 기도문이다. 과도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건대, 신약에서 성령과 기도는 거의 교환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기도는 영성의 핵심이고, 영성은 기도의 목표점이다.
(2)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분노와 미움, 슬픔과 상처로 얼룩진 내면을 치유하는 것으로 일기가 안성맞춤이어서 연결시켰다. 내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글로 토로하는 것 자체가 욕설과 배설의 기능을 발휘한다. 게다가 글은 무릇 자기가 쓰는 내용에 대해 얼마간의 객관화를 이끌어낸다. 지나치게 상황과 감정에 몰두해 있다가 글쓰기를 통해 비로소 자신과 현실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두기를 하게 되고, 그로 인해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되고, 극복하는 시선과 아울러 능력도 덧입는다.
(3) 환경에 관한 내용은 이 책에서 "글쓰기는 세상을 변혁한다"가 되었다. 애초의 글에는 "글쓰기는 사고 능력을 증진시킨다'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원고에서는 분량 상, 다섯 가지를 쓰는 것이 무리였다. 네 가지만 쓰는데도 24매가 되었다. 그래서 누가복음 2:52의 예수님 모습과 연결하였다. 그것이 무리라는 것을 시인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지혜는 지성, 키는 내면, 하나님은 영성, 사람은 소통이다. 약간의 억지와 과장이 없지 않다. 요는 전인적 성장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데 글쓰기는 유용하다는 것이다.
(4) 타인에 관한 글쓰기는 관계를 복원하는 기술이다. 당시 원고가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글이므로 주보를 활용하는 칼럼을 권했다. 이것이 이 책에서는 관계 회복은 편지로, 칼럼은 타락한 세상을 비판하고 변혁하는 글쓰기로 재배치하였다. 이렇게 글도 하나의 생명체요 인격체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새롭게 변하고 발전할 수 있다.
정리)
(1)하나님=영성=자서전과 기도문
(2) 인간=관계=편지
(3) 자신=내적치유=일기
(4) 지성=사고=서평
(5) 세상=변혁=칼럼
4) 개요 작성 노트 공개
1부
1. 여는 말 :10-15매
2. 영성 훈련: 35~40매
3. 내적 치유: 35~40매
4. 사고 능력 : 35-40매
5 의사 소통 : 35-40매
6. 닫는 말: 10-15매
2부
1. 독서 - 30매 전후
2. 개요 혹은 구상 - 30매 전후
3. 퇴고 - 30매 전후
수정된 2부 개요
1.독서 2. 메모 3. 개요 4. 문장 5. 퇴고
- 분명 계획대로 쓴 것은 아니다....그러나 이런 틀이 있었기에 글을 쓸 때 방향과 흐름을 유연하게 이어갈 수 있었고, 지나치게 세세하게 들어가지도 않고, 너무 멀리 벗어나지도 않았다.
5) 논리를 세워라
- 사이토 다카시의 방법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는 개요를 레쥬메라고 한다.
1) 키워드 설정 : 키워드를 기초로 전체 글을 구성, 자신의 독자성도 표현
2) 성격이 다른 세 개의 키 컨셉을 만든다 : 짧은 글과 사적인 글은 핵심 주장이 하나면 그만이지만 원고지 10매 이상의 글은 세 개 정도의 중심 요지가 있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키 컨셉에서 판가름 난다. 사실상 글의 방향과 수준이 여기서 결정된다.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공부도 잘한다"는 칼럼 (키워드: 기도=공부 / 키컨셉 : 역사, 성경, 선배 _역사:마르틴 루터, 성경: 마틴로이드존스의 에베소서 5:18 성령충만 해석, 선배:한동대, 부산대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분들, 공부와 개인경건과 교회 섬김에 철저한 분들의 예)
여기서 구성, 곧 순서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나는 보통 성경, 역사, 현실 이라는 삼각 축으로 글쓰기를 좋아한다. 이 세 개의 배열을 역사->성경->선배로 했다. 순서로 한다면 성경->역사->현실 일텐데 말이다. 기도와 예배를 등한시 하는 이들에게 고지식하게 성경부터 말하면 '성경이니까 그런거지 뭐' 라며 독자들이 방어막을 칠 것을 예상했다. 그리고 선배들 얘기부터 하면 그래서 성공했다는 유의 간증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중심에 두면서도 앞과 뒤에 신앙 인물들의 이야기를 배치해서 설득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 세 개의 컨셉 중 제일 선두와 후미에 무엇을 두느냐는 글 쓰는 이의 의도와 목적이 결정하는 것이고, 글을 읽는 이에게 미치는 영향도 판이하게 다르다. 대개 셋째 컨셉이 글쓴이가 최종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드러나도록 구성한다.
6) 연결하라
- 세 개의 컨셉은 흐름이다. 가장 일반적인 것이 병렬 구조로 배치하는 것이지만 시간적이든, 점층적이든 물흐르듯이 흘러야 한다. 그래야 읽기가 편하고 수월하다.
- 개요는 물 흐르듯 구성하고, 구성은 촘촘하게 하라. 글이 튼실해지고, 글 짓는 과정도 한결 수월하다.
9장. 문장 (그냥 당장 쓰라)
1) 문장은 어렵다
- 우리 선조들은 글쓰기에 관한 철칙으로 말, 글, 삶의 일치를 내세웠다.
(김정희 : 글을 쓰려고 하는 자는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을 제1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최한기 : 모두 마음속의 깨달음을 실제로 행하고, 입에서 나와 말이 되거나 책으로 쓰여 글이 된 것이다)
참된 문장은 글 이전의 삶이다.
- 공자 "사달이의의' : 문장이란 뜻을 잘 전달만 하면 되지 지나치게 화려할 필요가 없다
2) 읽고, 베끼라
- 김용택 "책을 읽으니 생각이 많아지고, 인생이 보이고, 문득 글이 써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 스티븐 킹 "우리가 상투적인 은유나 이미지로 표현하는 연유는 독서의 부족이다"
- 좋은 글을 읽게 되면 좋을 글을 쓰게 된다. 좋은 글을 많이, 깊이, 되새김질하며 읽고 읽으면 절로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3) 인용하라
인용의 역할
1) 자신의 생각에 권위를 부여 한다.(거인의 등 위에 올라간 난장이, 거인보다 더 멀리, 많이 볼 수 있는 난장이)
2) 인용문을 소재로 언어 활용의 폭이 넓어진다. (의존하면 못쓴다,)
3) 분량을 채울 수 있다. (사이토 다카시 "인용은 글의 분량을 매우 효과적으로 늘릴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4) 문단 쓰기
- 철학이 문장에 주목한다면, 글쓰기는 문단을 주시한다. 문단이 글쓴이가 전달하려는 생각의 최소 단위이기 때문이다. 한 문단은 한 가지 생각을 담는다. 문단은 적어도 한 문장 이상으로 구성된 것으로 한 가지 생각을 나타내는 글의 단위를 말한다. 그러니 한 문단에 하나 이상의 생각이 들어간다면 둘로 나누어야 할 것이다.
- 스티븐 킹 "나는 문장이 아니라 문단이야말로 글쓰기의 기본 단위라고 주장하고 싶다."
- 한 문단의 길이를 비슷하게 해야 한다. 너무 길면 내용과 상관 없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너무 짧으면 별 내용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 문단의 시작은 두어 글자 다음에 시작한다. 들여쓰기를 하라는 것이다. 앞 문단과 다른, 그러나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이 문단의 역할이다. 다른 하나는 읽기에 편하다.
- 소설의 대화는 한 문장이 아니라 한 마디가 한 문단이 되기도 한다. 일기나 편지는 단락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 문단을 쓸 때 주의할 사항으로 되도록 결론은 맨 끝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최재천은 유학 시절 미국 친구로부터 자신의 글쓰기의 단점을 지적 받는다. "너의 유일한 결점은 결론을 얘기 안 하고 계쏙 싸고돌고 아꼈다가 나중에 한다. 그렇게 쓰는거 아니야"
그렇다고 반드시 자기주장을 드러내는 키워드를 문장 제일 앞에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매 문단이 그렇다면 답답한 느낌을 줄 것이다. 간혹 문단 뒤쪽에 배치해서 궁금하게 하는 것도 좋은 문단쓰기 전략이다. 약간의 비대칭성이 있는게 좋다. 그럼에도 가급적이면 문단을 시작하면서 밝히라는 것은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하고,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한 문단이 한 생각이라는 말은 한 생각이 끝났으면 바로 그 곳에서 마치라는 말이다. 떄로 생각이 길면 좀 길게 가고, 짧으면 짧게 가면 된다. ....한 문단에 한 가지 생각을 담도록 노력하되 뜻을 잘 전달하고 편안하게 잘 읽히는 것을 목표로 문장 수련을 하면 되겠다.
5) 순서대로 쓰지 않아도 된다
- 반드시 서론부터 시작해서 본론을 거쳐서 결론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예컨대 서론을 쓰다가 막히고, 본론의 한 부분에 언어가 보일 때 서론에 붙들려 있지 말고 그곳으로 바로 육박해 들어간다.
- 너무 쉽사리 포기하는 것도 좋은 습관이 아니지만, 억지로 앉아 있다고 글이 써지는 것이 아니다. 샘솟듯 솟아나는 구멍이 있는데 그걸 애써 덮어주고 막힌 샘을 뚫으려는 것은 그리 생산적이지 못하다. 물론, 그러면 글의 완성도가 떨어질 염려가 있다. 이는 꼼꼼한 개요를 사전에 마련해 두었기에 상당히 상쇄될 수 있고, 퇴고를 통해서 충분히 끌어올릴 수 있다.
6) 그냥 쓰라
- 스티븐 킹, 작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 글쓰기를 수련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질보다 양이 우선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양을 늘리라.
10장. 퇴고
1) 사랑한다면
- "사랑은 모든 허물을 용ㅇ서해 줄 수 있고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할 수 있지만, 그 허물을 없애 주겠다는 결심을 접지 않습니다"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이 허용될 수는 없지만, 사랑에는 공히 책망과 바르게 함이 포함되어 있다.
- 고칠수록 좋아지는 것은 글쓰기의 진리다.
2) 사랑에는 짝이 있다
- 퇴고의 원칙은 둘이다. 일관성과 전달력.
- 신광은 목사는 <가롯 유다 딜레마>를 서평하면서 일관성을 지적했다. 유다가 겪었던 딜레마는 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의지라고 본문에서 실컷 얘기하더니 저자 후기에서 한국 기독교는 지적인 문제에 대한 설명 능력이 뒤처진다고 마무리하는 것은 자기 모순이라 했다.
- 글을 쓸 때는 문을 닫을 것, 글을 고칠 때는 문을 열어둘 것. 쓸 때는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고칠 때는 타인을 배려하라는 것이다. 쓰면서는 내용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집중한다면, 고치면서는 내용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초점을 둔다.
3) 줄여라? 죽여라?
- 일관성과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일단 줄여야 한다.
퇴고할 때는 일단 줄인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스티븐 킹은 10% 줄이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수정본=초고-10%)
- 정민은 한시를 번역할 때의 일을 들려준다.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이것을 본 스승이 '사내 자식이 말이 많다'며 줄이기 시작했다. '텅'자와 '빈'자가 중복되니 '텅'자가 떨어져나가고, '나뭇잎'과 '떨어지고'가 그냥 단순하게 '잎과 '지고'가 되고, 비는 올라가지 않고 내리는 것이니 구태여 쓸 필요 없다고 줄이니 다음과 같이 되었다. "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
4) 쉽게 말하라
- 수식어와 접속사는 아껴야 한다. '아주' '상당히' '많은'과 같은 수식어나 '그리고' '그래서' '그러므로' '그런데'가 계속 등장하면 문장이 늘어지고 긴장을 떨어뜨린다.
- 복수에 '들'을 붙이는 것은 우리말 어법에 부합하지 않는 영어식 표현. 안 붙여도 상관 없다.
- 습관적으로 종결 어미로 '것이다'를 흔히 사용한다. 정민은 '이다'를 기본으로 가끔 '있다'를, 결정적인 순간에 '것이다'를 사용하라 조언한다. 이것만 잘 지켜도 느낌과 분위기가 달라진다.
- 수동채 문장을 피해야 한다. '되어진다' 나 '보여진다'와 같은 단어다. 스트렁크는 작문의 기본 원칙으로 '능동태를 이용하라'고 말한다.
- 서정오는 쉽게 써도 되는 글을 공연히 어렵게 쓰는 습속을 질타한다.
"어느 잡지 좌담에서 읽은 다음과 같은 문장도 마찬가지다. '원칙적으로 얘기하면 비평이라는 건 텍스트에 대해 긍정적인 것이든 비판적인 것이든 과장되게 호명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여기에서 비평이 작품에 대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부풀려 말하게 마련'이라는 뜻보다 더 '심오한' 뜻을 찾아낼 수 있는가?
5) 할 말은 하라
6) 읽어라
- 정민은 퇴고할 때 자기 글을 무조건 세 번씩 소리내어 읽어본다.
- 한비야는 글의 운율과 리듬을 살리기 위해 반드시 소리 내어 읽고, 무시로 친구나 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어 읽어주면서 고친다.
- 접속사, 형용사나 부사같은 수식어를 아끼지 않고 가급적이면 잘라내고 ~하기 때문이다 를 '때문이다' 앞의 동사로 문장을 종결짓도록 고치고, '있었던 것이다를 '것이다'로 바꾸어도 줄어들고 읽기가 수워러하다.
7) 언제 말할까
- 조선시대 김일손 : 단숨에 쓰고 글 상자 속에 던져 둔다. 수개워러이 지난 다음에 꺼내어 고쳤다. 글을 짓고 난 바로 다음은 자기 글에 도취되어 있는 터라 제 자신의 약점과 결점이 잘 안 보인다.
- 스티븐 킹 : 적어도 6주 후에 퇴고 하라고 권한다. 그 기간이면 원고가 마치 남의 글인 양 낯설어 보인다. 필기도구 하나와 공책 한 권을 옆에 두고 한 자리에서 전체를 읽는다. 오자나 탈자, 비문과 난문을 찾기 위해 한 번 읽고, 내용에 미진한 구석이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 한 번 더 읽는다. 한꺼번에 둘 다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8) 싸워라
-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도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9) 공감하라
10) 마음껏 쓰라
에필로그. 내 평생에 책 한 권 쓰기
1) 왜 쓰나?
- 솔직히 돈이다. 박경리 선생, 폴 오스터, 조앤 롤링 그 외 많은 작가들의 글쓰기의 동기도 돈이었다.
돈이 목적이라면 일단 말리고 싶다. 글만으로 먹고 사는 전업작가는 드물다. 환상 품지 말고 좋아서 해야 한다.
- 전업작가의 세 가지 수입 구조
(1) 책의 인세 (정가의 10%) 1만원 짜리 책을 썼다면 2천부를 찍을 때 2백만 원을 받는다. 일년에 한 권 쓴다고 하면, 이건 한달 치 워릅 정도다. 조금 팔려서 2,3쇄를 찍는다고 해도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용돈 벌려고 한다면 이것도 오산이다. 자료 구입비용, 일 년 내내 꼬박 틀어박혀서 쓴 대가로 보자면 아르바이트가 낫다.
(2) 기고. 책을 내면 여러 매체에서 원고를 요청한다. 하지만 만약 기독교인이고, 기독교인을 상대로 글을 쓴다면 이마저도 기대 난망이다. 지면이 적고, 원고료가 생각 이상으로 짜다. 원고료를 줄 수 없는 곳이 부지기수다.
(3) 강연. 1급인 경우 시간당 100만원. 나도 책을 내고 가장 많은 수입 비중은 강연이다. 하지만 이 또한 여의치 않다. 기독교 내 초청은 교회와 선교단체, 봉사한다는 심정으로 가야한다. 어떤 경우는 고스란히 내놓고 온 적도 있다. 자료 준비, 교통비, 오고 가는 시간 생각하면 못 한다. 교회는 좀 낫다.
- 나도 돈 벌려고 시작한 일이지만, 돈 벌려고 한다면 분명 생활에 일말의 도움은 되나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 다음은 달리 할 일이 없어서 글을 쓰게 되었다.이 말은 복합적이다. 글 쓰는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는 것은 글쓰기의 즐거움이 극진하다는 말이고, 그만큼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뜻이고, 사방이 꽉 막혀 이 일 외에는 출구나 활로를 찾을 수 없었던 고단한 현실을 반영하는 말이다. 글쓰기는 즐거운가? 육체적으로 고되고, 정신적으로 고단하다. 글쓰기는 괴로운가? 즐겁다. 신난다. 왜? 하나님은 말로 세상을 창조했고, 성서의 저자들은 글로 하나님의 세상을 창조한다. 그러니 내가 달리 무엇을 하겠는다.
- 읽고 쓰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회 하면서 조금 고생했다. 돌아보면, 하나님의 뜻이 있었고, 삶에는 언제나 원수가 있기 마련이고, 내 지혜와 덕이 깊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다. 어쨋든, 그 와중에 나는 설교 외에는 그다지 일이 없었다. 그러니 밤낮 책 읽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읽기가 목에 차오르니 쓰기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그때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출구와 활로를 개척할 옵션이 많았겠지만, 그 당시 나로서는 그것이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 글쓰기는 내 소명이다. 상황에 내몰려서만 그리 된 것은 아니다. 비전은 보여지기도 하지만, 보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원치 않는 뜻밖의 환경 속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비전은 발견되는 법이다. 달리 할 일이 없다고 여겨지는 그 여건 속에서 다른 방식, 예컨대 기도와 은사 운동의 방식이거나 말씀과 제자훈련의 방식 등등으로 타개할 가능성은 열려있엇다. 그러나 나는 돌아보면 책읽기와 글쓰기를 선택했다.
하나님이 내가 성경을 읽을 때 주신 비전의 말씀이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 사 50:4) 학자처럼 알아듣고, 학자처럼 말을 하는 제자가 되는 것, 이것이 내 평생 달려갈 길이다. 이 말씀에서 학자라는 히브리어 '림무드Limmud'는 제자라는 뜻도 내포한다. 그러니까 학자는 곧 제자다. 말하는 자는 행하는 자다.
제자로서 목사가 되고, 학자로서 교수가 되기를 결심했다. 그것이 목사는 말, 학자는 글로 다시 정리되고 구체화되고 발전했다. 그래서 말과 글로 하나님과 이웃, 교회를 섬기는 것이 내 바람이다.
2) 어떻게 쓰나?
- 서평과 칼럼으로 연습했다. 서평의 유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무엇보다 책 읽는 방법을 좀 알게 된 듯 하다. 관점은 다를 수 있지만 테스트 이해에 관해서 저자가 보기에 '오독이군' 이라고 해 버린다면 소용없는 노릇이다.
책 한 권 제대로 읽는 것이 모든 공부의 시작이고 마침이다. 이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서평을 자주 쓰면 글쓰기도 쑥쑥 자라난다. 논문이나 저술도 실은 책 한 권 잘 소화하고 나면 쓰기가 한결 수월하다.
- 서평이 내게 글의 내용과 관점을 제공한 측면이 크다면, 칼럼은 글 쓰는 요령을 익힌 결정적 계기다.
- 서평과 칼럼 형식이 부담스럽고, 논리 정연한 글보다 감성적인 글을 더 좋아하고 쓰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분들은 일기 쓰기를 권장한다.
3) 무엇을 쓰나?
-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쓰라. "궁극적으로 글 쓰는 이가 팔아야 하는 것은 글의 주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윌림언 진서)
...자기 세계에 갇히라는 말은 아니다.
- 대학 교수 되기에 좋은 전공이 뭐냐고 묻고 다니던 분....보기 안 좋았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게 있는 것을 원하시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분이 내가 보기에 무리한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분이 주셨는데 정작 당사자만 깨닫지 못해서 그렇다.
무엇을 쓰냐고? 자기를 쓰면 된다. 내가 만난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을, 내가 제일 잘 말할 수 있는 것, 이것 하나만은 꼭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을 쓰면 된다.
4) 지금 당장
- 자신감을 가지라. 나는 처음부터 작가가 되려 한 것은 아니다. 교내 백일장 대회에서 상 한번 받은 적 없다.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으로 된다고 했다. 너무 훌륭한 작가가 되겠다고 덤벼들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근성을 갖고 꾸준하게, 부지런히 연습하면 내 평생 책 한 권 스는 일이 한갓 꿈만은 아니다.
(1) 글쓰기의 모범, 멘토를 찾으라.
:글쓰기로 본다면 내 멘토는 C.S 루이스다. 그는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2) 함께 읽고 글 쓰는 친구를 만나라.
:글로 사는 이들은 단조롭다....만날 사람 다 만나고 다니면 글쓰기는 초장부터 글렀다. 몇 자 적지 못해서 애면글면하면서도 죽치고 앉아 있어야 한다.
(3) 책을 읽으라
: 책 읽을 시간도 없는 사람은 결코 책 쓸 시간도 없다.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어떻게 책을 쓰는지를 자연스레 익힌다. 문장력,논리력, 기획력이 생긴다.
체득이 된다는 말이다. 이건 말이나 논리가 아니고 감이고 경험이다. 적어도 한 주제에 50권 이상, 백 권을 족히 읽어야 한 권을 쓸 수 있다.
(4) 계획하라.
: 내 평생 책 한 권 쓰기 프로젝트를 통해 읽을 책 목록을 뽑고 한 달에 두어 권 이상 읽다 보면, 쌓이고 쌓여 화산처럼 폭발할 날이 이른다.
(5) 지금 당장 쓰라.
: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꾸 써 보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나는 하루에 평균 10매 쓰기를 목표로 삼고 한 달 간격으로 평가한다. 내가 얼마나 읽었고, 얼마나 썼는가를 내 블로그와 클럽에 올린다. 그것이 자신감과 성취감도 주고, 계속 달려가는 촉진제가 된다.
(6) 계속 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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