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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마틴 로이드 존스] 영광스러운 교회와 아름다운 종말 (교리 강좌 시리즈 3)



영광스러운 교회와 아름다운 종말

저자
마틴 로이드 존스 지음
출판사
부흥과개혁사 | 2007-06-15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20세기 최고의 강해설교자를 통해 위대한 기독교 교리 시리즈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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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로이드존스 (영광스러운 교회와 아름다운 종말) 교리강좌 3


1장 교회


1. 교회론을 고찰해야 하는 이유


(1) 성경이 교회론을 강조한다


(2) 교회사가 교회론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3) 오늘날 교회의 상황 때문에 교회론이 필요하다


(4) 바른 복음 증거를 위해 교회론이 필요하다



2.교회론


(1)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

: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다

: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일부분이지만 하나님은 교회 바깥,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곳에서도 통치하신다.


(2) 교회의 의미

: 교회는 부름 받아 주님께 속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에클레시아ekklesia '불러 냄을 받은 사람들')

: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church 라는 단어-스코틀랜드에서는 kirk라는 단어를 사용- 및 그와 동일한 어원에서 유래한 용어나 이름들은 모두 조금씩 다른 의미가 있음. 주님께 속해 있다는 의미로 사용. 교회church라는 단어는 '주인'을 의미하는 헬라어 퀴리오스kurios에서 유래됐으며, 카이저kaiser나 시저ceasar도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결합하여야 한다.

즉, 교회는 주님께 속했으며, 함께 모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 성경에서 에클레시아, 일반적으로 지역적인 모임을 지칭.


(3) 교회를 설명하기 위한 성경의 예화들

: '그리스도의 몸 / 성전 혹은 건물의 비유 / 그리스도의 신부 / 제국 / 승리하는 교회


(4) 결론과 요약-교회란 무엇인가

: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교회'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의 임재와 주권이 인정되는 성도들의 지역벌 모임을 의미. 그에 더하여 지역 교회에 잇는  거듭나고 신령한 사람들은 동시에 보이지 않는 영적 교회, 즉 그리스도의 참된 몸의 일원이다.


(5) 교회의 연합

: 교회의 연합은 영적 연합이며 생명의 연합이다.

: 교회의 연합은 교리적 연합이다.

: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썼다, 교제가 있기 전에 교리적 공통성이 있어야 한다. 교제는 같은 믿음, 같은 진리, 같은 이해에 기초한다.

: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요이 10~11) 이것은 사랑의 사도인 요한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6) 교회와 국가의 관계

: 로마카톨릭의 개념 - 교회가 국가이며 국가의 모든 일을 주관한다.

: 반대의 극단, 에라스투스주의적Erastian관점 - 교회가 국가의 한 조직이며, 국가에 의해 통치되고 지배된다, 국가의 수반이 주교 등의 고위 성직자들과 관리들을 임명.

: 개혁주의적 견해 - 하나님이 모든 것을 소유, 하나님은 교회의 주인이며 우주의 주인, 국가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2장. 교회의 표지와 정치 


1. 교회의 세 가지 표지 


(1) 말씀 선포


(2) 성례 집행


(3) 권징

: 권징 시행에 반대하는 자들이 범하는 오류 : '가라지 비유', 가라지 비유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비유이며,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같은 것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한 표현입니다만,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보다 크다. 가라지의 비유를 교회에 적용하는 것은 로마가톨릭과 동일한 오류에 빠지는 것. 


: 우리는 교리에 대해 권징을 시행해야 하며, 삶과 생활에 대해서도 권징을 시행해야 한다. 

아무리 정통적인 교리를 주장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기질과 욕구와 감정과 육욕을 통제하고 다스리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가 전파하는 믿음을 말과 행동으로 부인하는 자요, 외인들에게 장애물과 거치는 것이 되는 사람이다. 


: 성경은 불순종하는 형제가 징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실제로 교회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가르친다. 


: 부흥과 각성이 일어난 시기의 교회사를 읽어보면 권징이 두드러지게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 부흥과 각성의 기간에는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이 언제나 정결함에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신약 성경으로 돌아가 그 가르침에 따라 살기만을 힘썼다. 신약은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 도구, 통로는 반드시 깨끗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2. 교회의 정치


: 이 시대를 사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사도와 선지자의 시대가 지나고 성경의 가르침이 주어진 이후, 교회 스스로 언제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은 뭔가를 행하고 덧붙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성경에 반하는 전통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1) 교회 정치를 인정하지 않는 견해

: 모든 구성원이 성령에 순종하므로 정치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교회지상주의, 기독교국가에 대한 반작용) 


(2) 에라스투스주의적 견해

: 교회는 국가의 한 부분이며, 국가가 교회를 다스린다는 견해.

(5) 성례는 반드시 필요한가

: 카톨릭 : 성례가 없이는 은혜를 받을 수 없다. 

: 개혁주의적 견해 - 성례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명령하신 것이다., 하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성례 자체를 대단한 것으로 여길 뿐 아니라 은혜를 받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기는 카톨릭주의의 위험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모든 요소가 갖춰진 예배가 있어야 하고 말씀이 선포되어야 한다. 말씀 선포가 우선. 

: 믿음이 없는 성례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6) 성례의 종류

: 전통적 개신교의 입장 - 세례와 성찬 두 가지만을 성례로 인정. (주님이 오직 두 가지만을 제정하시고 명령하셨음) 


(7) 성례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정하신 은혜의 방편이다.


: 설교 강단에 서는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 진리와 복음적 믿음은 빼놓고 일종의 휴머니즘이나 도덕주의, 심지어 교회를 전파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습니까? 이렇게 강단이 자신의 특권과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 벌어졌을 때에도 다른 방법, 즉 시각적 방법으로 복음이 조금이라도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여전히 선포된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그러므로 교회에 나왔으나 선포된 말씀으로 배를 채우지 못한 "배고픈 양들"-밀턴Milton의 표현을 빌자면-은 떡과 포도주에서 혹은 세례의 물에서 영적인 양분을 찾을 수 있었고, 스스로 성경을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이 설교뿐 아니라 이런 방법으로도 말씀하실 수 있음을 상기했습니다.


4장. 세례 


1. 세례에 대한 논쟁


(1) 세례에 대해 독단적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


(2) 세례는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3) 세례에 대한 주요 견해들 


2. 세례의 의미


(1) 세례는 연합을 의미한다

: 특정한 상황에 동일화되고 특정한 분위기에 들어가게 하는 것. 세례의 일차적 의미는 연합이다. 깨끗하게 함과 정결하게 함이라는 이차적 의미도 있다. 


(2) 세례는 깨끗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3. 세례의 목적


(1) 세례의 목적은 우리를 원죄에서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은 로마카톨릭의 견해)


(2) 세례는 죄사함과 칭의에 대한 표징이자 인이다


(3) 세례는 중생,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령의 내주하심에 대한 표징이자 인이다

: 세례 받아 중생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했기 때문에 세례받을 권리를 갖게 되는 것 


(4) 세례는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표징이다


: 세례의 첫 번째 의미는 우리에게 확증과 보증을 주며, 우리의 믿음을 강권하게 하고 성장시키는 것이다......세례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무한한 은혜와 인자하심으로 우리 수준까지 내려오셔서 뭔가 객관적이고 눈에 보이는 일을 행하심으로써 죄사함과 중생과 성령의 내주하심의 약속에 대한 인을 쳐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큰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4. 세례의 대상


(1) 유아 세례를 지지하는 논증들과 그 반론들


: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신 예수님 


: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너희와 너희 자녀와...." -사도행전 2장 39절- 하지만 이런 주장을 펴는 책들을 읽어 보면 언제나 이 구절의 나머지를 빼뜨림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베드로가 말하는 "자녀"는 육체적 후손이 아니라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자녀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이 약속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세대를 통해 계속 전해질 것이다. 또한 이 약속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먼 데 있는 사람들, 즉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는 이방인들도 위한 것이다:


: 사도행전, "루디아"와 "빌립보 간수"가 세례를 받을 때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다"....하지만 유아 세례를 분명하게 지지하는 근거는 없다. 


: 고린도전서 7장 14절 


--> 신약 성경에는 아이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분명한 증거가 없음, 그들이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할 수는 없으나 받았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은 확실하며 따라서 결론이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들로 교리를 만들면 안 된다. 


(2)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논증들과 그 반론들


: 세례는 중생의 인이자 표징인데 우리는 아직 그 아이의 중생 여부를 알지 못하기 떄문에 유아 세례가 잘못된 것이다? 

  --> 위험한 논증이다. 그렇다면 성인의 경우는 중생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성인 세례의 근거로 이런 논증을 사용하면 안 된다. 


(3) 결론- 세례가 인이라면 성인 신자에게 행해야 한다


: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유아들에게 세례가 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세례가 단지 표징일 뿐이라면, 유아 세례를 찬성하는 논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례는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다. 



5. 세례의 양식


(1) 세례 양식에 대한 논쟁의 역사


: 물을 뿌리는 것과 물에 몸을 완전히 담구는 것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올바른 세례법은 물을 뿌리는 것이라 말하여 침례를 배제한다. 하지만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예루살렘실에서 오랜 토론 끝에 투표로 결정된 것. (스물다섯명은 침례를 배제시키는 데 찬성했고, 스물네 명은 반대했다. 한 표 차이로 결정된 것) 


(2) 세례 양식에 대한 논증들


: 성경의 증거에 의거하여 신약 시대의 관행은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세례받을 사람과 세례를 주는 사람이 물 속에 함께 선다. 요단 강이었다면 세례를 주는 사람이 물 속에 손을 넣고는 세례받을 사람에게 물을 뿌린다....모든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여러 교부의 글에도 이렇게 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 매우 많다. 



(3) 중요한 것은 세례의 의미이지 양식이 아니다


: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 최종적 결론에도 도달할 수 없다. 세례의 양식이 아니라 세례의 의미가 중요하다. 

저로서는 신자에게 침례이든 물을 뿌리는 것이든 둘 다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완전히 물에 담그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넘어서는 일이며, 이단에 가까워 지는 일이다. 

그것은 양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결코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6. 세례 문제에 대한 강의자의 결론 

: 세례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성인 신자들이다.

양식에 대해서는 물을 뿌리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침례가 될 수도 있고, 둘을 결합 시킨 것일 수도 있다. 



5장. 성찬 


1. 성찬에 대한 견해들


(1) 카톨릭의 견해


: 화체설, 그들은 사제의 행위로 인해 떡이 실제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물리적인 몸으로 변화된다고 믿는다. 

(근거, '이것은 내 몸이라' 하지만 예수님은 당시 몸 가운데 계시면서 손에 떡을 들고 말씀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떡의 경우에 '....이라' 는 말을 강조했다면 여기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포도주가 아니라 그것을 담고 있는 잔이 된다.

다시 말해, 그 단어로 화체설을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 이 교리는 사제의 지위와 신분을 향상시키기 이해 교회에 들어왔다. 이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제뿐이다. 


(2) 루터파의 견해


: 공재설, 떡은 여전히 떡이지만 주님의 몸이 그 떡에 결합된다. 그래서 그들은 떡과 주님의 몸이 동시에 있다고 믿는다. 

루터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 생각이 흔들렷고, 다시 옛 카톨릭의 입장과 다소 불건전하고 불만족스러운 타협을 하게 되었다. 


(3) 종교개혁자들의 견해

: 츠빙글리는 성찬은 단순히 표징과 기념일 뿐이라는 입장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이 개혁주의적 관점에서의 성례는 표징일 뿐 아니라 동시에 인이다. 



2. 성찬의 의미


(1)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보여 준다


(2)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3) 성찬은 우리가 새 언약에 참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4)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힘을 받아 신자의 삶을 산다는 것을 보여 준다


(5) 성찬은 신자들 사이의 연합도 보여 준다


(6) 성찬은 위의 모든 사실을 우리에게 인 쳐 준다


3. 누가 성찬에 참여할 것인가


(1) 오직 신자들만 성찬에 참여한다


(2)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자신을 살펴야 한다


4. 성찬은 말씀의 은혜를 확증하는 것 



6장. 죽음과 불멸성 


1. 종말론은 무엇이며 왜 연구해야 하는가


(1) 종말론이 다루는 내용들

: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 이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 삶 전체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인가?' '미래는 무엇인가, 어떻게 될 것인가?' 


(2) 오늘날 종말론에 대해 새로운 관심이 일어나고 있다


: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이 세상의 사회적 상황을 개선시키는 일에 대해 이야기 하느리 시간을 허비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 그 중 중요한 것 하나는 물론 과학 지식의 진보와 그 지식을 기반으로 한 잘못된 추론- 죽음 이후의 삶은 없다고 결론. 세상의 미래라는 더 큰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인생은 편하고 안락했다. 잘 돌아가던 상황 중에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으며 안전하고 안정되고 변치 않아 보였던 삶이 사실은 아무 실체가 없다는 것임이 판명되었다. 모든 것은 다시 불확실해졌고 다시금 인생과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묻기 시작했다. 



2. 죽음-개인적 관점의 종말론 


(1)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


: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일 뿐, 절대로 존재의 단절이 아니다. 


: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곧 죽인 후에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 하라"  몸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님을 말씀하신다. 


: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 그들은 둘 다 육체를 남겨 두고 떠나지만 그들의 영혼은 다른 영역에 존재한다. 

그것이 죽음에 대한 성경의 근본적 정의이다.


(2) 우리는 왜 죽는가


: 죽음은 삶의 일부로서 내재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형벌이다. (창세기 2:17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 '로마서 5장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 사람이 죄를 짓기 전에는 죽음이 없었고, 그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죽음은 없었을 것이다. 


(3) 왜 그리스도인도 죽어야 하는가


: 성화 과정의 일부로서 여전히 고난과 질병과 죽음을 겪도록 남겨져 있다. 


(4) 불멸성 


: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교리가 발전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일에 대한 암시가 주어지고, 다음에는 좀 더 분명해 진다. 


: 구약 성경이 죽은 자와의 영혼과 접촉하지 말라고 경고한다는 사실이 영혼의 불멸성을 증거한다. (엔돌의 신접한 여인과 사울의 부탁) 



7장. 조건적 불멸설과 제2의 기회 


1. 중간 상태의 교리


: 죽음과 부활사이의 일을 중간 상태의 교리라고 한다.


: 연옥에 대한 로마카톨릭의 가르침은 성경적인 증거가 없으므로 논하지 않는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이 추가한 교리들 중 하나이다. 


2. 중간 상태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 


(1) 모호한 존재 상태로서의 중간 상태 


(2) 공통 장소로서의 스올


(3) 영혼 수면설


: 바울의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라는 구절은 사람들이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함이 분명하다. 


: 영혼이 죽음 이후에 무의식 상태에 있지 않다는 증거 

  -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이야기 하던 사건, 

 - 누가복음에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둘 다 의식이 있음)  

 -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 주님이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바울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나..." 


: 신자와 불신자 둘 다 의식이 있는 상태로 있다. 신자는 말할 수 없는 복락과 기쁨을 누리고, 불신자는 고통의 상태에 있을 것이다. 


(4) 조건적 불멸설


:불신자의 영혼은 완전히 멸망하여 존재가 없어질 것이라는 믿음 


: 사람은 원래 불멸의 존재가 아니며 죽어야 하지만, 부분적으로 불멸성의 선물로 해석되는 영생의 선물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은 사라질 것이다. 


: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세상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누어져 있으며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영원한 복락을 누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과 멸망을 겪게 된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는 인상은 절대로 받을 수 없다. 


: 영원이라는 말을 '한 시대'나 '시간의 단위'를 말한다는 사람들도 있다(조건적 불멸설을 믿는 사람들). 하지만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 동일한 영원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영원은 끝없음, 영구히 지속됨 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 "사랑의 하나님이 그와 같은 일을 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어요".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여러분과 저의 상상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 기초해야 합니다. 우리는 유한할 뿐 아니라 죄 된 존재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충분히 넓지도, 똑바르지도, 깨끗하지도, 순결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마땅히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견지에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완전히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 불신자의 입장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성경의 가르침에 이성을 복종시키는 사람으로서 논증하기보다는 철학자로서 논증을 하지 않도록 대단히 주의해야 합니다. 



3. 제2의 기회 


: 죽음 이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있을까? 죽음 이후에도 또 한 번 복음이 제시되는 것일까? 


(1) 제2의 기회를 주장하는 근거


: 베드로전서 3:18~20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 베드로전서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2) 제2의 기회에 대한 반론 


: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은 제2의 기회 이론과 완전히 배치된다. 성경을 읽어 보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분명 이세상에서의 삶에 의해 정해진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부자와 나사로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갈 수 없다고 가르치신 분은 주님 자신이시다. 부자에게는 일말의 희망도 제시되지 않는다. 부자에게도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것을 거부했다는 사실만 상기시킬 뿐이다. 


: 주님 자신의 완벽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단 한개의 본문만 가지고 교리와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 베드로전서 3:18~20의 해석 

 - 이 본문에는 우리 주님이 죽으심과 부활 사이의 기간에 이런 특별한 일은 고사하고 어떤 일이든 하셨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이 본문이 말하는 것은 육체 가운데 있던 우리 주님과 영적 상태에 있던 우리 주님간의 차이이다. 주님은 육체를 따라 죽으셨지만 "영으로는 살리심을"받으셨으며, 영으로 거하시는 것은 살리심을 받은 후라는 말이다. 



: 중요한 것은 전체 서신에서 사도 베드로가 고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힘과 격려를 주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구절들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고난을 견디도록 힘을 주는가? 대홍수 때 회개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 또 한 번 구원의 기회를 가질 것이라는 말이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베드로는 사실상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예를 보라. 사람들을 육체를 따라 예수를 죽였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너희의 육체를 죽일 수 있을 뿐 영혼은 손대지 못한다." 그것이 18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첫 번째 진술입니다. 이제 17절에서 베드로는 방금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우리 주님은 육체 가운데 행하셨던 일을 영으로 계신 지금도 여전히 행하고 계시다고 주장합니다. 


왜 사도 베드로가 노아 시대와 방주를 준비하는 일에 대해 언급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고난이라는 문맥을 떠나서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옛 일을 돌아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마치 육체로 거하실 때부터 지금까지 전파하고 계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그 때에도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홍수에 대해 경고하시기 위해 노아를 사용하여 방주를 만들게 하심으로써 120년에 걸쳐 계속해서 경고하셨다. 그리스도는 의를 전파하고 사람들에게 그들의 운명과 다가올 멸망에 대해 경고하고 계셨으며, 그들이 말씀을 믿고 방주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것을 면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계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부했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 노아와 그의 가족 단 여덞 사람은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주님을 믿고 방주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은 구원을 받았으며, 대홍수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베드로는 지금도 그와 똑같다고 말합니다. "그 방주는 세례를 나타낸다.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받는 사람들은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들은 육체 가운데 계시던 그리스도를 죽였던 것처럼 너희도 죽일 수 있을 것이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너희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너희 영혼은 안전하다.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으며 너희는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영으로 계속 살아계신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그들이 너희 육체는 죽일지 모르지만, 방주(세례가 의미하는 것)안에 있으면 너희 영혼은 완전히 안전하며, 사람들은 너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가 없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저는 이것이 본문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극복하셨으며, 그렇기 떄문에 홍수 전에 주님의 말에 귀 기울이고 홍수를 극복했던 노아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불같은 시련이 우리에게 닥칠지라도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안전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6의 해석 


: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복음이 특정한 사람들, 즉 지금은 죽었지만 복음이 전해질 당시에는 살아 있었던 어떤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듣고 믿은 그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육체로는 심판-정죄-을 당했다. 하지만 괜찮다. 그들은 영으로는 살아 있다. 그러니 지금까지 죽어 간 너희의 사랑하는 자들로 인해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 1세대 그리스도인들을 크게 괴롭히던 문제였으며, 사도 바울 역시 데살로니가에서 같은 문제를 다루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는 물론 괜찮지요. 하지만 죽은 살마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즉은 사람들, 특히 순교를 당해 죽은 사람들은 그들의 구원을 빼앗겼다고 하는 이상한 생각이 퍼져 있었다. 베드로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죽은 자들에 대해 염려 할 필요 없다. 그들은 분명 그리스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육체로는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살아 계신 것처럼, 그들도 살아 있다."


"불신자들과 관계 하지 말고 더 이상 그들처럼 살지 말라. 더 나아가 그들을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들이 너희 육체를 멸할 수는 있어도 영혼은 건드리지 못한다. 너희는 그들이 죽였으나 그 영혼은 건드리지 못한 그리스도께 속한 존재다. 그들과 관계 하지 말라"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너희가 고난을 받아야 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으라.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그리스도 및 그리스도와 너희의 관계를 분명히 하라. 그러면 어느 누구도 너희를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 위 두 구절에는 죽음과 음부 너머에 또다른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제2의 기회가 없으므로 우리 모두는 주위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8장. 재림 : 서론 


1. 재림에 대해 고찰해야 하는 이유


(1) 성경이 수없이 재림을 언급하고 있다


(2) 주님 자신이 재림을 가르치셨다


: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님이 도덕,윤리,행동,행위만 가르치셨다고 말하며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고 있다며 예수님의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것들을 제거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이후 교회의 역사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3) 사도들도 재림을 가르쳤다


:주님의 재림은 힘든 세상에서 핍박에 처한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위안을 제공했다 그것은 복된 소망이자 교회가 고대하는 것인 동시에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가장 큰 동기가 된다. 


2. 재림의 교리가 소홀히 여겨지는 이유


(1) 영적 무기력


: 우리는 우리를 낙심시키고 우리 삶을 다른 일들로 채워서 이 복된 소망을 잊어버리게 하려 애쓰는 원수들과 대면하고 있다


: 세상의 헛됨을 알게 될 때에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개 되는 경우가 많다.


(2) 재림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들


: 단지 죽음을 의미한다. 주님의 오심이 단지 그리스도인이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해석한다. 


: 주님의 오심을 오순절 날 성령이 교회에 임했을 때 일어난 일이라 해석한다


: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파괴 사건으로 해석한다. 


(3) 그리스도인들의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


: 주님 재림에 대한 잘못된 예언들로 인하여 분별 있고 균형잡힌 사람들이라면 이 일에 대해 대단히 주의하게 되었다. 


3. 재림의 문제에 접근하는 바른 자세 - 균형


: 경건하고 똑같이 학구적인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면 우리는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그들의 생각을 읽고 우리가 성경을 이해한 바에 따라 최선을 다해 검토해 보아야 한다. 


4. 재림에 대한 서론적 접근


(1) 재림과 연관해 사용한 용어들


: 묵시 - 계시, 수건을 벗기는 것, 벗겨진 수건이라는 개념. 우리 앞에 보지 못하게 가리고 있는 것이 제거되는 것


: 현현 - 나타남, 드러남. (묵시 : 우리 주님이 서 계시고 그 앞에 장막이 쳐져 있다가 장막이 거두어져 보게 되는 개념, 현현 : 주님의 오심, 주님의 나타나심) 


: 파루시아 - 임재. 


: 하나님의 날 


: 위 용어들은 상호 교환하여 사용 할 수 있다. 성경에서 같은 일을 말하기 위해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우리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2) 재림이 일어나는 방식


: 재림시에 주님은 인격적으로 오신다. 


: 재림시에 주님은 육체적으로 오신다. 


: 재림은 가시적인 사건이다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 행 1:11) 


: 재림은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 재림시에 주님은 영광 가운데 오신다. " 나팔 소리가 나매..."고전 15:22


: 재림에 대한 연구는 우리를 경건으로 인도한다. 


(3) 재림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당부의 말 


: 연구가 여러분을 겸손하게 만든다면 당신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로 인해 우쭐하게 되고 지성과 열정이 자극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연구 방식입니다. 

그 연구가 당신으로 하여금 무릎 꿇고 에배와 경배와 찬양을 드리게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방식의 연구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것을 이해했다는, 말하자면 당신의 이성으로 그 일을 해냈다는 자기 만족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방식의 연구입니다. 연구하면서 시간은 짧고 할 일은 많아 그것을 위해 자신을 정결하게 준비시켜야 한다고 느낀다면, 올바른 길로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연구가 순전히 지적인 것이어서 당신의 영혼과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전체 접근법이 잘못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은 지성만이 아니라 전인격을 위한 주제이다. 그것은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9장. 재림의 시기 : 징조들 


1. 재림의 시기 문제에 접근하는 올바른 자세


(1) 재림의 시기에 대한 연구는 우리를 거룩함으로 인도해야 한다


: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이 진실한 것인지 시험하는 기준은 그 연구의 결과 혹은 고찰의 결과가 매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2) 재림의 날짜를 확정하려 시도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2. 재림의 시기 연구에서 유념해야 할 원칙


: 성경의 저자들인 사도들이 우리 주님이 그들 생전에 오실 것이라고 믿었으며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생각이었기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는 비평가들이 있다. 

하지만 사도들이 글로써 그렇게 가르친 구절은 없다. 그들은 주님께 질문을 할 때에는 그렇듯 믿는듯이 보였으나, 절대로 그것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몇몇 구절은 표면적으로 읽었을 때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주님이 즉시 돌아오시리라고 가르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1) "때"라는 용어를 사람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2) 우리는 이미 말세에 살고 있다 (말세는 초림 때 시작되었으며 재림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


(3) 예언적 원근법 


: 예루살렘 파괴 기사에 대한 해석 -  주후 70년에 일어날 일은 하나의 사실이었지만, 또한 시대가 마무리되고 마지막 심판이 선고될 때 일어날 더 큰 사건에 대한 하나의 묘사이자 비유였다. 


3. 재림의 징조


(1) 이방인을 부르심


: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2)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모여듦


: 유대인의 민족적 회심이 일어날 것인가 


: 민족적 회심에 대한 증거들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운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민족, 하나의 인종으로 존속해 온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1917년에 예루살렘을 이방인들의 손에서 탈환하는 1917 벨푸어 선언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나라가 세워지고 많은 유대인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 민족적 회심에 대한 반론들 


: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 포도원 비유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 왕의 혼인잔치과 예복의 비유 /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 로마서 11장,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10장.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1. "온 이스라엘"은 교회가 아니다.


: 로마서 9장,10장,11장을 보면,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며, 그럴 떄마다 교회가 아닌 유대 민족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유대인의 민족적 회심이 일어날 것인가


(1) 이 해석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이 다른 방법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2) 민족적 회심에 대한 반론


: 구약의 예언은 신약의 교회에 적용 된다.


: 구약의 예언들은 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주님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 사도 바울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다고 말한다. 


: 바울은 연대기적 순서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3. 로마서 11장 26절의 올바른 해석


(1) 로마서 9~11장이 말하는 이스라엘은 남은 자, 즉 영적 이스라엘이다.


: 성경의 난해한 구절을 다룰 때는 그 구절에 너무 집중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로마서 11장 26절의 뜻이 명확하지 않군요. 어떻게 할까요? 한번 로마서 9장 첫 부분으로 가 봅시다. 분명 로마서 9장, 10장, 11장은 전체가 하나의 논증이지요. 바울은 9장 첫 부분에서 시작한 주제를 11장 마지막까지 이어가고 있어요. 그 다음에 다른 주제를 다루지요." 


바울은 놀라운 절정을 말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가 질문 합니다. "잠깐만요, 바울 씨, 당신은 유창한 말솜씨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어요. 당신 말은 참으로 놀라워요. 하지만 유대인들은 어떻게 되는 거죠?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좀 보세요. 그 약속들은 이행되고 있는 것 같지가 않군요. 교회에 유대인들이 얼마나 있죠? 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고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잖아요. 당신이 말하는 것이 옳고 하나님의 약속이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면, 유대인들의 상태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겠소?" 그래서 이 주제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놀라운 주장과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래서 사도는 9장,10장,11장에서 유대인의 문제를 논합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예언적 가르침을 개략적으로 소개하는 것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 의견에 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가르침을 요약해 봅시다. 그는 이스라엘이 완전히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일부만 버림받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 그 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사실상 바울은 그 반대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여, 당신은 곤경에 처했소. 당신은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문자적이고 육체적인 뜻으로 이해해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소. 성경이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모든 유대인 하나하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이오. 그것이 중요한 차이요.


: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영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다.


: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의 약속들은 외적 할례가 아니라 마음과 영혼에 내적 할례를 받은 영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2) "온 이스라엘"은 유대인 가운데 부르신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 하나님이 이방인들 가운데 부르신 모든 사람, 하나님이 유대인 가운데 부르신 모든 사람, 그들은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마음에 품고 계쎴던 이스라엘인 모두는 구원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3) 지금도 이스라엘은 민족적 의미로 이해하는 오류가 벌어지고 있다


(4) 모든 믿는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5)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방법은 동일하다.


: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의 결론적 해석

-하나님이 모든 시대의 믿는 유대인들 총원, 하나님이 미리 아신 그들은 반드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유대인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이 장에서 종말이 되기 전에 유대인의 많은 수가 회심할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믿습니다....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특별한 지위를 지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인들과 구분되지 않을 것입니다.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11장. 적그리스도


: 성경은 재림에 앞서 특정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친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 온 이스라엘의 구원, 적그리스도) 


1. 적그리스도와 관계 있는 성경 구절들


(1) 단 7장, 살후2장, 계13장에 나타난 적그리스도


: 위 세 장이 모두 적그리스도를 가르킨다는 증거 


[1] 작은 뿔이 네 번째 짐승에게서 나온다. 요한계시록에서 적그리스도의 통치는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마지막 단계이며, 데살로니가후서의 불법한 자는 로마제국이 제거된 후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2] 나타난 시기가 같다. 작은 뿔은 로마 제국을 나누어 물려받은 후계자 중 하나이다. 짐승은 이교의 로마로 행진하 가는 용(사탄)으로 부터 그의 능력과 큰 권세를 받는다. 그리고 불법한 자는 막는 자가 제거된 후에 나타난다.


[3] 그들의 종말이 같다. 셋 모두 그리스도의 재림시 마지막 심판때에 멸망당한다.


[4] 종교적이고 동시에 정치적인 궈너세를 휘두른다. 다니엘서 7장의 작은 뿔은 다른 왕들과 비슷하긴 하지만 종교적 권세를 가졌다는 점에서 다르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짐승은 면류관을 썼으나 경배할 것을 요구하고 경배를 받으며, 데살로니가후서에 나오는 '불법한 자'는 두 측면을 모두 보여준다.


[5]  신성모독을 전제로 한다. 작은 뿔은 큰' 말을 하는 입' 을 가지고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은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가지고 있으며, 불법의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신을 높인다. 


[6]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 그들이 통치하는 기간은 똑같이 삼년 반이다. 하지만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바울은 정확한 시간을 말하지 않는다,


[7] 셋 모두 하나님의 백성과 전쟁을 벌인다


[8] 큰 권세를 가지고 있다. ("그 모양이 그의 동류보다 커 보인다"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


[9] 신에게 바치는 충성을 요구. 작은 뿔은 자신을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와 때와 법보다 위에 놓는다. 무리들이 자신을 경배하게 하며 자신을 하나님으로 높인다.



(2) 이 본문들에 나타난 적그리스도의 특징


: 바울은 '주의 날'이 그렇게 가깝지는 않다는 말로 시작한다.그리고 특정한 일들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고 설명한다.


[1] 배도하는 일, 배교 - 불법한 자, 멸망의 아들 - 악하고 무법한 자가 나타남. 그는 이미 존재하며 일하고 있지만 배교가 일어난 후 드러남.

바울은 이어 그에 대해 몇 가지를 말한다. 


[1] 무법한 사람임. 이것은 소극적 죄가 아니라 하니님께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임. 방자함이 최고도에 달하는 의도적 불순종.


[2]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나라와 역사에 대적함. 그는 적그리스도로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며, 기독교적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그 이름이 나타내는 진리의 나라에 대적한다. 


[3] 하나님의 성소에 앉아 있다


[4] 스스로를 신격화 한다.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5] 바울은 이것이 영적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계시되는 비밀이라고 말한다. 


[6] 그의 존재는 위장과 거짓 기적으로 가려져 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탄이 만들어 낸 거짓을 믿게 하며 모든 믿음을 자신에게로 돌려놓는다. 


: 바울은 또한 불법의 사람의 나타남은 막는 자에 의해 지연되며, 그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멸망당할 운명이라고 말한다.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2. 적그리스도에 대한 세 가지 해석


[1] 이 일은 이미 일어났다. 유대인들의 배교와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 


[2] 미래에 일어나는 일이며, 예루살렘의 회복된 성전에서 자신을 높이고 성도들과 전쟁을 하는 어떤 유대인 혹은 이방인


[3] 교황제도를 뜻한다는 개신교 종교개혁가들의 견해. 

'하나님 성전에 앉아' - 하나님 백성 가운데 있는 교회의 교황석.

그들은 로마 제국 몰락 후 교황의 권력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적그리스도의 기원에 대한 성경 기사와 부합한다고 지적함.

교황이 경배를 요구할 뿐 아니라 정치적이나 종교적 요소까지 가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 복음에 반대하고 있다고 주장함.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부인하고 교회를 높이는 것에 이것이 대단히 미묘하게 나타나 있다는 것. 

"거짓 기적"을 로마카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수많은 기적과 대비시키며, "거짓 것을 믿는다"는 말에 대해서는 기적을 믿는 것, 그리고 트렌트 공의회가 참된 믿음을 저주한 사건을 예로 든다. 

개혁주의자들은 더 나아가 "막는 자"가 로마 황제들을 가르킨다고 주장하며, 그 권세는 제거되었다. 데살로니가후서 2:8에 나오는 '그 입의 기운'은 개신교 종교개혁이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1:13의 무너진 '성 십분의 일'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언급이 됨 



3. 적그리스도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내용들  


: 이 주제는 여전히 많은 것이 불확실하고, 모두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확신할 수 있는 몇 가지


[1]적그리스도는 이미 사도바울과 요한의 시대에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이 세대가 끝나기 직전에 최고의 힘을 발휘할 것이다.


[2] 다니엘은 적그리스도의 통치가 지닌 정치적 측면을 보여주고, 바울은 종교적 측면을 강조, 요한계시록 13장에서는 그 둘을 모두 볼 수 있다. 끔찍한 정치적 권세에 뒤이어 똑같이 끔찍한 종교적 권세가 나오는 것이다.


[3] 적그리스도가 궁극적으로는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고 확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끔찍한 권세를 가질 것이며, 택함 받은 자들까지 거의 속일 정도의 기적과 표적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12장. 다니엘서 9장 24~27절의 해석 


1. 앞으로 다룰 내용 


(1) 연구의 대상이 될 성경 본문들

: 다니엘서 9장, 마태복음 24장과 25장, 데살로니가전서 4장과 5장 일부, 데살로니가후서의 몇 구절, 요한계시록


(2) 다양한 견해를 비교해 보아야 하는 이유 


: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본문을 읽고 해설하고, 단어들의 뜻과 전반적인 의미를 보여 주면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이고 그 교훈은 이것입니다"라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이런 예언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저 자신의 해석을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 사람이 많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다른 개념들이 존재하고, 사람들이 그런 개념을 접하게 되었을 때는 왜 그들이 배운 해석이 이와 다른지, 자기들의 생각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서로를 돕는 것은 가르침의 핵심이다. 


2. 에드워드 어빙과 다비가 제시한 새로운 해석 


3. 다니엘서 9장의 배경


: 이스라엘 자녀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지만 포로생활이 끝날 때가 다가오고 있다. 다니엘은 9장 첫 부분에서 자신이 연구해 본 결과 포로생활이 칠십 년간 지속된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말로 시작한다. 다니엘은 그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 분명하게 질문한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입니까?" 그는 죄를 고백하고 자기 민족에게 일어난 일들이 모두 받아 마땅한 것이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때 천사 가브리엘이 그에게 대답을 줍니다(22절~27절)  


: 위대한 구약 학자인 에드워드 영은 이것이 분명 구약 전체에서 가장 어려운 본문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4. 일흔 이레


(1) 일흔 이레의 의미는 무엇인가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 에언은 단순히 장래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도 포함된다. 예언은 현 시대를 향한 선포일 뿐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 일흔 이레를 '일흔 주간seventy weeks' 으로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일흔 이레seventy sevens' 가 옳다. 이레가 곧 한 주일을 구성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 말이 반드시 한 주일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없다. 문자적인 의미는 '일흔 이레seventy sevens'이다. '이레'라고 언급된 기간이 있으며, 장차 그 특정한 '이레'가 일흔 번 있을 것이다. 일흔 이레는 말 그대로 490일을 의미하며 예언에서의 하루는 언제나 일 년을 의미하므로 일흔 이레는 490년을 의미한다는 것이 틀림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 말 자체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서는 온갖 이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9장에서는 그렇지만 다른 장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 '일흔'과 '이레'를 정확한 용어로 간주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예언에서는 숫자가 상징적이다. 


(2) 예언을 해석할 때는 '감추어진 명확성'에 주의해야 한다


: 독일인 가운데 가장 위대한 주석가인 '헹스텐베르크'는 성경에 나오는 이 숫자들이 감추어진 명확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 숫자들은 명확하지만 어떤 일이 언제 시작하여 언제 끝나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는 의미의 명확성은 아니다. 그것에는 일종의 확실함이 있지만 동시에 불확실함도 있다. 


: 정확하지만 또한 정확하지 않고, 그 정확성이 우리에게는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 


(3) 일흔 이레는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 성경에서 일곱과 열은 언제나 완전한 수를 상징한다.그러므로 칠 곱하기 십, 곧 일흔은 완전한 시대, 완전한 기간을 나타내며 그것은 다시 일곱 이라는 숫자가 나타내는 완전한 기간들로 나뉘어진다.  


(4) 일흔 이레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24절)


- 세 가지 소극적인 일 : 허물이 그치며 / 죄가 끝나며 / 죄악이 용서 되며 (죄가 사람과 하나님을 갈라놓았으며,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가 제거되어야 한다) 


-세 가지 적극적인 일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 이상의 여섯 가지 일들이 일흔 '이레' 동안 일어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5) 이 일들은 언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25~27절)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증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 '영이 날 때부터' 에서 의견이 많이 갈라진다. 정확한 날짜를 정하려 하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에 대해 처음으로 말이 나온 때로부터 메시아 곧 왕이 오시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 두 이레의 기간이 지나야 한다는 것 뿐이다. 


-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 - 그 왕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이자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대부분 동의한다. 


- 일흔 이레는 일곱 이레, 예순두 이레, 한 이레로 나누어진다. 처음 일곱 이레는 파괴된 예루살렘 성을 실제로 재건하는 데 걸리는 기간, 갈대아 사람들이 그 성을 파괴했으며, 남은 자들이 돌아가 그 성벽과 성과 성전을 재건하였다.

이어서 왕이신 메시아가 오시기까지 예순 두이레가 있다. 그것은 분명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강림을 말한다.  

하지만 26절에 이르면 더 이상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바로 여기에서 의견이 크게 갈린다. 


(6) 논쟁의 핵심 : 일흔 번째 이레


: 일흔 번째 이레는 언제 나타날 것인가


: 26절은 일흔 번째 이레에 일어날 사건을 묘사한 것인가 


: 27절의 그는 누구인가


(7) 에드워드 어빙과 다비의 견해


- 에드워드 어빙과 다비로부터 유래된 견해는 유대인들이 특별한 지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견해다. 


" 이레는 한 주, 더 정확히는 칠 년으로 구성된 한 주다. 즉, 각각 칠년을 의미하는 이레가 일흔 번이라는 뜻이다. 이 이레들 안에 민족정 징계가 끝나고 나라는 영원한 의로 회복되어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나라가 영원한 의 가운데 반드시 다시 세워져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즉시 의문이 생겨난다. 영원한 의 가운데 나라가 다시 세워질 것이라는 말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원한 의가 드러나리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 둘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특별한 위치를 지니게 될 것이라는 이론, 즉 하나님은 유대인들에 대해 지금도 특별한 위치를 지니게 될 것이라는 이론, 즉 하나님은 유대인들에 대해 지금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에 그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유의 이론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위와 같은 개념을 도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일흔 이레가 일곱 이레(49년), 예순 두이레(434년), 한 이레(7년)로 나눠진다고 말한다. 일곱 이레(49년)동안 예루살렘은 어수선한 시기에 재건 되어야 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기록했듯 이 일은 성취 되었다. 예순두 이레는 434년이며, 그 후에 메시아가 오실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나타나심에서 성취되었다. 이어서 그들은 26절이 확정되지 않은 기간임이 틀림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의문이 제기된다. 이어지는 진술은 다음과 같다. 


" 십자가 처형의 날짜는 정해져 있지 않다. 단지 예순두 이레 가 지난후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26절에 나오는 첫 번째 사건이다. 두번째 사건은 성의 멸망이며 주후 70년에 성취되었다. 이어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정해지지 않은 기간에 들어서는데, 그 기간은 지금까지 거의 이천 년간 지속되었다. 다니엘에게는 전쟁과 황폐함이 계속될 것이라고만 계시되었다. 신약은 구약 선지자들에게는 감춰져 있던 것들을 계시했다. 이 기간 동안 하늘나라의 신비와 교회를 불러 내시는 것이 성취되리라는 것이다." 


"교회 시대가 끝나고 일흔 번째 이레가 시작될 때".....예순 아홉 이레의 끝과 일흔 이레의 시작 사이에 적어도 이천 년이라는 거대한 간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그런 간격을 만들어 낸다. 


- 그들은 27절의 '그'를 26절에 언급된 장차 올 왕이자 적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 



(8) 일흔 이레 해석의 핵심 쟁점들 


- 24절에 개략적으로 나와 있는 계획은 이미 수행되었는가? 

- 26절에 나온 일들은 어떠한가?

- 27절 첫머리에 나오는 '그'는 누구인가? 

- 26절에 묘사된 사건들은 일흔 번째 이레에 일어났는가/ 아니면 예순 아홉 이레의 끝과 일흔 이레의 시작 사이의 간격이라고 추정되는 시기에 일어났는가? 

- 예순아홉 이레와 일흔 이레의 시작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는가? 


위 문제들을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과 다가오는 천국에서 유대인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이 해석 체계는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질 것과 피의 제사가 다시 한 번 도입될 것에 대한 믿음을 포함합이다. 이 견해는 주창하는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에 대한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적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미래의 일로 간주하며, 이것을 요한계시록에 대한 비슷한 해석과 연결시킵니다. 



13장. 다니엘서 9장의 결론과 은밀한 휴거 


1. 간격 이론 


(1) 27절의 '그'는 누구인가 


: 26절에 나오는 왕이라고 주장한다. 


(2) 27절은 미래의 사건인가


: 이 모든 것은 미래에 속한 일이며, 일흔 번째 이레 때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3) 예순아홉 이레와 일흔 이레 사이에 긴 간격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성경 해석이 아니다


: 성경은 간격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단지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간격이런의 옹호자들은 "하지만 성경은 간격이 없다고도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충분한 대답이 아니다.

성경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 사이에도 구분이 있다고 말한다. 


이 간격 이론은 매우 주의 깊고 심각하게 고찰해 봐야 한다. 


2. 다니엘서 9장 24~27절에 대한 다른 해석


(1) 24절의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 이 모든 것을 신약에서 볼 수 있다. 


(2) 26절은 AD70년의 예루살렘 파괴에 대한 예언이다


(3) 27절의 '그'는 은혜의 언약을 확증하시고 제사와 예물을 그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4) 이 본문은 성취된 예언이며 예순아홉 이레와 일흔 이레 사이에는 간격이 없다


3. 성도의 사전 휴거


(1) 사전 휴거, 혹은 은밀한 휴거란 무엇인가


: 재림이 두 단계로 이루어 진다. 첫번째로 오직 성도들을 자기에게로 영접하기 위해, 두 번째로 성도들을 거느리고 적그리스도를 멸망시키고 천년왕국 기간을 시작하기 위해. 주님이 첫 번째 오실 때는 은밀하게 오실 것이다. 성도들 외에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 할 것이다. 그것은 은밀한 휴거가 될 것이다. 불신자들은 주님이 오신 것을 모를 것이다. 


전통적 가르침은 주님의 재림 전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한다고 말한다. 


(2) 이 가르침의 유래


: 에드워드 어빙이 주장 (가르침의 균형을 잃고 자신이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자신의 교회가 사도적이라 주장) 


: 제칠일 안식교의 기원에 재해 읽어 보면, 제칠일 및 다른 여러 가지에 대한 가르침이 화이트 부인이라는 사람에게 계시로 임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성경 연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계시였다. 


: 로마카톨릭은 자신들이 초대 교회와 마찬가지로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와 몽소승천 등을 가르칠 수 있다. 성경과 별도로 계시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3) 이 가르침의 근거와 반론


: 성경은 두 번이 아니라 단 한 번의 강림만 있으며, 두 단계의 강림이 있는 것도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은밀한 혹은 사전 휴거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 주님은 아무 때나 오시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특정한 일들이 먼저 일어 나야 한다. 


조지 뮐러의 의견 


" 거의 오십 년 간 주의 깊고 성실하게 성경을 연구한 결과 나의 마음은 오래 전에 정해졌으며, 일말의 의심도 없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5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경은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까지는 주 예수님이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단언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다른 많은 부분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특정한 사건들이 성취되어야 한다고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큰 소망은 죽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강림이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올바른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4. 권고 : 종말의 문제를 연구하는 동기를 점검하라 


: 흥미 본위의 육적인 정신이 아니라 무릎으로, 성령의 인도와 기름부음과 조명을 위해 기도하면서 살펴보아야 한다.


14장. 요한계시록 : 서론 


1. 요한계시록 연구의 주의사항


: 너무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지도 않는다. 


: 마르틴 루터마저도 요한계시록을 쓸모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고 분별 없는 행동을 저질렀다. 그는 분명 그 책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일부 지나친 주장들 때문에 그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한다. 루터 같은 사람도 잘못을 범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주의를 기울어야 하겠는가. 


2. 요한계시록의 세 가지 해석법


(1) 과거주의적 견해


: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모든 것이 과거, 사실상 4세기 초의 기독교 시대에 이미 일어났다는 가르침 

요한계시록이 유대인들로부터, 이교의 로마제국으로부터 겪어야 할 일에 대한 예언이라고 말한다.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될 때까지 일어날 일을 묘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시대나 미래에 대한 메시지가 없다. 이 견해는 1614년 경 알카자르라 하는 예수회 사제가 제안. 과거주의적 견해는 개신교가 주장하는 교향제가 적그리스도이며,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이라는 비판을 부인하려는 로마카톨릭의 시도였다.  


(2) 미래주의적 견해


: 예수회 사제인 리베라가 1603년 주창, 요한계시록이 교황제 및 로마 교회를 공격하는 것을 막고 그 내용을 미래와 연결시킨다. 


(3) 역사주의적 견해


: 요한계시록을 과거나 미래에 국한시키지 않고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대한 예언이라고 가르친다. 


15장. 과거주의적 견해와 미래주의적 견해


1. 요한계시록의 해석법을 평가해 보아야 하는 이유


2. 과거주의적 견해


3. 미래주의적 견해


(1) 미래주의적 견해에 대한 일반적 반론

: 미래주의적 견해는 요한과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위로도 주지 못한다


: 미래주의적 견해는 예언의 일반적 기능과 목적에 반대 된다. (예언의 목적은 그것이 성취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것) 


: 미래주의적 견해는 성경의 유추, 성경의 질서와 모순 된다. 


: 미래주의적 견해는 요한계시록의 단일성을 무너뜨린다


: 미래주의적 견해는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의 일로 간주한다. 


(2) 미래주의적 견해에 대한 구체적 반론


: 요한은 이천 년 후에 일어날 일이 아닌 속히 될 일을 기술했다 


: 요한계시록을 세 단계로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 


: 미래주의적 견해는 2장과 3장의 설명에서 스스로 모순을 일으킨다 


: "장차"는 엄청난 시간의 간격을 의미하지 않는다 


: 12장은 미래가 아닌 성육신 사건을 묘사한다


: 요한계시록을 인봉하지 말라는 명령은 이 책의 사건이 속히 일어날 것임을 보여 준다

 

(3) 미래주의적 견해를 거부하면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를 준다



16장. 영적 역사주의적 견해 


1. 교회 역사주의적 견해 


2. 연속적 역사주의적 견해 


(1) 연속적 역사주의적 견해에 대한 반론

: 12장은 성육신의 사건으로 돌아간다. 

: 요한계시록으로부터 유익을 얻으려면 상세한 세계사 지식이 있어야 한다. 

: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응시키는 것은 이 책의 영적 특성을 무시하는 행위다. 


3. 영적 역사주의적 견해


(1) 요한계시록은 교회를 향해 기록되었다


(2) 요한계시록은 계시의 책이다


(3) 요한계시록은 상징과 표징을 사용하여 진리를 드러낸다


(4) 요한계시록은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에게 교훈을 주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4. 요한계시록의 개요 


: 결론 -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와 마귀 및 그 권세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을 말해 주는 책 



17장. 구속받은 자들의 고난과 안전 


1.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반복의 원리 


(1)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병행 구절들의 예


(2) 예언서가 대구법을 사용하는 이유


2. 요한계시록의 내용과 의의


(1) 요한계시록의 두 단락


: 단락 구분의 분기점 - 12장 


: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두 단란의 차이를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 두 번째 단락은 더 깊은 차원의 투쟁, 즉 마귀와의 투쟁을 보여 준다. 


(2) 요한계시록의 의의


: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의 최후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실제적 교훈을 담고 있는 책이다. 


3. 1~3장 내용 분석


(1) 일곱 교회 -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모든 교회의 상태에 대한 묘사


4. 4~7장 내용 분석


(1)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


(2) 일곱 인의 환상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2-핍박받는 그리스도인, 3-그리스도인이 겪는 가난의 고통, 4-전쟁, 5-순교당한 성도들의 이침, 6-대적자들에게 임하는 심판, 7-나팔의 도입부 


(3) 인 침 받은 하나님의 백성 


: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인 치시고 안전하게 지키신다. 


: 144,000명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도들 


18장. 나팔


1. 8~11장 내용 분석


(1) 일곱 나팔의 환상


: 나팔은 부분적인 파괴를 가져온다


: 나팔의 의미 - 핍박자들에게 부어지는 심판


: 나팔의 형벌을 내리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 첫째, 둘째, 셋째 나팔 - 핍박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 


: 넷째 나팔 - 하늘에서 내린 재앙


: 다섯째 나팔 - 하나님이 마귀에 대한 억제 수단을 거두심 


: 여섯째 나팔 - 끔찍한 전쟁 


(2) 복음에는 고난이 따른다


(3) 핍박받는 두 증인


(4) 최후의 심판


(5) 8~11장의 요약


2. 12~14장의 개요

 


19장. 최후의 심판


1. 요한계시록 후반부의 의의 


2. 12~14장 내용 분석


(1) 하나님의 일을 멸하려는 마귀의 시도


(2) 마귀의 대행자들

: 첫 번째 짐승 - 세속 권력 

: 두 번째 짐승 - 거짓 종교 

: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 (그저 눈멀고 무지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못하고 스스로 이 원수들-세속적 권력들과 거짓 종교들-의 도구가 된 사람들) 

: 큰 성 바벨론 - 세속성 


(3) 성도들에게 주는 위로


(4) 최후의 심판


(5) 12~14장의 요약 및 의의


3. 15~16장 내용 분석


(1) 심판에 앞서 성도에게 주시는 놀라운 위로


(2) 최후의 심판


: 일곱 대접의 심판은 완전한 멸망을 가져온다 


: 나팔은 경고이지만 대접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진다


4 17~19징 내용 분석


(1) 바벨론에 대한 심판


: 여기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세상에 대한 완벽한 묘사가 나옵니다. 자기들의 재물을 자랑하고, 음식을 자랑하고, 잔치와 운송 수단과 장비, 옷, 아름다움과 영화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읽어 보십시오. 그것들이 어떻게 하나도 남김없이 멸망할지 읽어 보십시오. 우리가 이 가르침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다시는 세속성에 유혹받지 않을 것입니다. 


: 등을 돌리는 바벨론의 추종자들 


: 이 장들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으십시오. 바벨론을 위해 살고, 바벨론을 신뢰하고, 바벨론이 전부라고 말했던 모든 사람들의 좌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 바벨론의 완전한 멸망을 보고 기뻐하는 성도 




(2) 두 짐승의 멸망


5. 20~22장의 개요 



20장. 전천년설


1. 전천년설의 내용


(1) 전천년설의 일반적인 가르침


(2) 전천년 학파 내의 다양한 의견


2. 전천년설의 역사


3. 전천년설에 대한 일반적 반론들


(1) 전천년설은 복음서나 서신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로마서 20장에만 나온다. 성경의 통일성을 믿는다면, 성경 전체가 하나로 움직인다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2) 전천년설은 영적인 나라가 아닌 물질적인 개념의 왕국을 강조한다.


(3) 전천년설은 하나님 나라를 미래로 연기한다.


(4) 전천년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을 재도입한다.


(5) 전천년설은 재림이 여러 차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6) 전천년설에서는 영화된 성도와 육체 가운데 있는 성도가 지상에서 동시에 살게 된다


(7) 전쳔년설의 천년왕국에는 죄인들이 여전히 존재해야 한다


(8) 천년왕국의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수많은 무리가 갑자기 생겨나야 한다


(9) 전천년설은 베드로후서 3장의 가르침과 모순 된다


4. 요한계시록 20장 자체의 반론들


(1) 요한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묘사했다


(2) 요한계시록 20장은 일관되게 상징으로 해석해야 했다


(3) 요한은 육체와 분리된 영혼들을 목격했다


(4) 천 년의 기간이 최후의 심판보다 먼저 온다


(5) 사탄의 결박은 악과 죄가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21장. 후천년설과 영적 견해


1. 후천년설


(1) 후천년설의 내용


(2) 후천년설의 역사


(3) 후천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근거 구절들


(4) 후천년설에 대한 반론들


2. 요한계시록 20장의 영적 해석


(1) 반복의 원리


(2) 사탄의 결박은 무슨 의미인가


(3) 첫째 부활은 무엇이며 누가 참여하는가


(4) 천 년 동안 왕노릇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5) 결론 - 어느 해석이 성도들에게 가장 큰 위로를 주는가



22장. 몸의 부활 


1 구약에 나타난 부활의 증거


: 주님의 재림에 대해 우리가 내린 결론은 이 일이 시대의 끝에 일어날 것이며, 주님의 재림은 마지막 날에 단 한 번만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 그리고 재림은 특정한 사건들과 더불어 일어날 것인데 거기에는 죽은 자의 부활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한 바로는 죽은 자들은 단 한 번만 부활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두 번 혹은 심지어 세 번의 부활이 있으며, 두 번의 중요한 부활 사이에는 천 년 혹은 그 이상의 기간이 있다는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 스스로 선인과 악인이 모두 함께 부활할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는 증거를 이미 보여드렸습니다 


(1) 구약이 신약에 비해 부활을 자주 언급하지 않는 이유

: 우리의 생각을 구약 시대로 이동 시켜 보면 우리에게는 분명한 사실들이 그 당시에는 불문명하였다. (주님의 부활 후에 부활을 이해한 제자들) 


(2) 부활을 언급한 구약의 구절들


2. 신약에 나타난 부활의 증거


(1) 복음서


(2) 사도행전


(3) 서신서


3. 부활의 본질


(1) 부활은 육체가 문자적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2) 몸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

: 몸의 부활 없이는 구원이 완성되지 않는다.


: 다른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몸의 구속을 가르친다. 


: 몸의 구속은 구원의 일부다. 


: 완전한 구원은 주님 자신의 부활처럼 우리도 부활할 때 이루어진다. 



4. 부활체의 본질


(1) 부활체에 대한 명백한 가르침

: 우리의 정체성은 보존된다


: 땅에 묻힌 몸과 부활한 몸의 구성 입자는 서로 다르지만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 부활체는 혈과 육이 아닌 살과 뼈로 되어 있다. 


: 부활체는 썩지 않는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 부활체는 영광스럽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 부활체는 강력하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 부활체는 영적인 몸이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 부활체는 하늘에 속한 몸이다 


(2) 부활체의 특성 


23장. 최후의 운명


1. 최후의 심판에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 


(1) 심판의 개념 자체를 싫어한다


(2) 형벌을 교정 수단으로 생각한다


(3)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심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2. 성경이 말하는 최후의 심판


(1) 최후의 심판은 이미 내려진 판결이 공포되는 순간이다


(2) 최후의 심판은 공개적 사건이다


(3) 최후의 심판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4) 재판관은 누구인가


(5) 누가 심판을 받는가


(6) 신자가 받는 특별한 심판


(7) 신자의 최종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