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진영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호기심이 있는 사람들과 이미 들어왔지만 갈팡질팡 하는 사람들에게 권유할 만한 책이다.
티머시 켈러는 복음의 이야기를 최대한 세상의 언어와 비유로 적절하게 풀어쓸 줄 아는 훌륭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마케팅이나 흥미거리를 최대한 배제한 예배로, 가장 세속적인 뉴욕에서 몇 천명이 모이는 교회를 이루었다고 하니 그 능력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제1부 의심의 도약
01 참된 종교는 오직 하나뿐? 그럴 리가!
1) 종교를 불법화하라!
2) 종교를 탓하라!
3) 종교를 완전히 사적인 일로 묶어두라!
4) 기독교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
02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고통을 허락할 리 없어
1) 사악함과 고통이 신을 부정하는 증거는 아니다
2) 악과 고통이 증거라면 그건 신이 있다는 증거이리라
3) 예수를 순교자에 비유하다
4) 신의 고통
5) 구원과 고통
6) 부활과 고통
03 기독교는 가혹한 속박
1)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진리
2) 공동체가 완벽하게 포괄적일 수는 없는 노릇
3) 기독교는 문화적으로 경직되어 있는가?
4) 자유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5) 사랑은 궁극적 자유. 그것은 생각보다 우릴 구속한다
04 그 엄청난 부정, 교회의 책임이로소이다
1) 성격상의 결함
2) 종교와 폭력
3) 광적인 믿음
4) 종교를 비난하는 성경
5) 예수의 이름으로 정의를
05 사랑의 신이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다니?
1) 심판자는 하나님? 결코 있을 수 없지!
2) 심판하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일 수가 없지!
3) 사랑의 신이라면 지옥을 허락치 않을 것이니
4) 지옥과 인간의 평등
5) 난 사랑의 하나님을 믿어
06 기독교는 틀렸다고 과학이 증명했다
1) 기적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닌가?
2) 과학은 기독교와 충돌하지 않는가?
3) 진화론이 성경의 오류를 증명하는 것 아닌가?
07 성경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야 없잖은가!
1) 역사적으로 성경을 신뢰할 수 없다
2) 복음을 전설로 치부하기엔 그 타이밍이 너무나 이르다.
3) 복음을 전설로 치부하기엔 콘텐츠가 너무나 의도와 정반대다.
4) 복음서의 문학적 형식은 전설이라기엔 너무나 세밀하다
5) 성경은 문화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어
6) 믿을만한 성경, 아니면 '스테퍼드 신'?
제2부 우리는 왜 믿는가?
08. 신이 있다는 단서들
- 철학자 앨빈 플랑팅카 : 합리적 인간 모두에게 신이 존재한다고 설득할 증거는 없다, 그렇지만 신의 존재에 대해 적어도 서른 개 정도의 대단히 그럴듯한 주장은 있다.
(1) 신비한 "뱅"
: 이 세상 만물은 우발적contingent이다. 그 존재의 이유는 그 자체의 외부에 있다. 우발적 개체들의 거대한 집합에 불과한 우주도 역시 그 외부에 있는 어떤 원인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리라. 무언가가 빅뱅이 일어나도록 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었을까? 자연의 밖에 있는 그 어떤 것, 초자연적이고 비우발적이며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2) 인간 맞이할 준비가 된 우주?
: 과학자의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보면, 마치 우주가 우리 인류의 도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중력상수, 여러 핵력에 대한 다양한 상수, 정확한 수치를 지닌 모두 15가지의 상수가 있는데, 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단 백만분의 일, 아니 어쩌면 몇 조분의 일만 틀렸어도, 우주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상태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물질은 유착될 수 없었을 것이며, 은하계도, 수많은 별들도, 혹성도, 인간도 없었을 것이다.
: 스티븐 호킹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우주가 빅뱅 같은 현상으로부터 생겨날 확률은 너무나도 낮다. 나는 여기에 틀림없이 종교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 미조정논리Fine-Tuning Argument , 인류원리Anthropic Principle - 우주가 인류의 도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수도 없이 많은 우주들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어머어마한 시간과 공간에 걸쳐 어마어마한 숫자의 우주들이 있었다 가정하면, 그 중 어떤 우주는 불가피하게 우리 같은 인류가 생존할 수 있도록 '미조정'되어 있으리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바로 그 우주이며, 그래서 우리는 여기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 '증거'로서의 미조정 논리는 합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다. 많은 숫자의 우주들이 있다는 증거는 조금도 없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할 방법 또한 전혀 없다. (ex. 스무 번 연속 에이스 4패의 스트레이트를 쥔 사람, 50명이 동시에 한 사람을 향해 총살형을 집행했지만 아무도 맞추지 못하는 사례)
어쩌다보니 유기 생명체들이 생겨난 어느 우주에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어떤 창조주가 없이도 유기 생명체가 생길 수는 있었겠지만, 너무나도 희박한 그 가능성이 진실인 것처럼 믿으며 산다는 게 과연 말이 되는 걸까?
(3) 자연의 규칙성
(4) 아름다움의 단서
: "이 세상 만물이 (버트런드 러셀의 유명한 한마디처럼) "원자들의 우연한 배치의" 결과였다면, 우리 인간이 만들어진 실제 목적도 없으며 우리는 우연의 산물일 것이다. 우리가 자연의 우연한 힘에 의한 산물이라면, 우리가 '아름다움'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특정한 데이터에 대한 이미 프로그램된 한낱 신경학적 반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음식에 대한 욕망, 음식이 존재 / 성적인 욕망, 섹스 / 피곤함과 수면 / 인간관계와 우정...내적인 욕망이 그 욕말을 채워줄 수 있는 실제 대상과 부합.
채울길 없는 이 갈망은 하나의 깊고, 내적인 인간 욕망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신의 존재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5) 단서를 말살 시키는 것
: 진화론자들의 말처럼 '우리의' 뇌가 도덕, 사랑, 아름다움 따위에 관해 말해주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 그게 단순히 우리의 유전자 코드를 계승시키기 위한 일련의 화학반응에 지나지 않는다면-'그들의' 뇌가 이 세상에 관해 말해주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왜 그들의 말을 믿어야 한단 말인가?
(6) 단서를 말살시키는 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단서
- 빅뱅 : 저절로 생긴 걸 수도 있다?
- 미조정 : 우주가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건, 순전히 자의적인 상황일 수 있다?
- 자연의 규칙성 : 자연이 왜 규칙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냥 자연은 규칙적이다. 그게 신의 존재를 증명하진 않는다
- 아름다움과 의미 : 그런 감각과 확신은 진화생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종교적, 미적, 도덕적 직관이 우리 조상들의 생존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 우리가 신이 존재함을 믿는다면, 우리의 우주관은 인지기능이 작동한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준다.신을 믿는다면 빅뱅도 신비할 것이 없고, 우주의 미조정이라든지 자연의 규칙성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들어맞을 것이다. 또한 신이 존재한다면, 아름다움과 사랑이 지닌 풍부한 의미에 대한 우리의 직관도 놀랄 일이 아니다.
신을 믿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들은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당신의 합리적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한다고 믿을 이유도 거의 없지만, 당신은 그런 기능을 계속하여 사용하리라.
- 단서들 중 그 어느 것도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다. 모두 이성적으로 반박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합쳐질 때 그 효과는 자극적이고도 강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09. 신을 안다는 것
(1) 자유분방한 도덕
: 인권에 대한 사례 (신은 없고 인간이 동물에서 진화한 것이라면 누군가의 권리를 짓밟는 게 잘못인가? /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잖아요 / 힘센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 먹는다면 권리의 침범인가요? / 아니요 / 그렇다며녀 인간만이 약자를 짓밟으면 유죄이군요 / 그렇죠 / 어째서 그런 이중 잣대를 사용하죠? 왜 당신은 인간이 동물과 달라야 하고, 그래서 동물들에게는 자연스러운 행위를 유독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거지요? 왜 인간만이 위대하고도 독특한 개별적인 존엄과 가치를 지닌다는 거지요? 왜 인권을 믿지요? )
: 사람들은 여전히 도덕적 확신을 갖고 있지만, 다른 시대 다른 장소의 사람들과는 달리 선악을 판단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뚜렷한 근거가 전혀 없다.
(2) 도덕적 의무라는 개념
: 개인이 내적으로 어떻게 느끼든, 그 개인이 속한 공동체나 그 문화가 뭐라고 하든, 그 개인에게 득이 되든 안 되든, 어쨌거나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바로 도덕적 의무다. 예컨대 앞서 말한 젊은 커플은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도 무조건 여성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우리에겐 도덕적 느낌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외부에 도덕의 기준이 존재하며, 그 기준으로 우리 내부의 도덕적 느낌이 평가된다는 믿음도 있다.
(3) 도덕적 의무에 대한 진화론적 이론
: 사회생물학적 혹은 진화론적 심리 - 이기적이고 잔인한 사람들보다도 이기심 없이 협력하며 행동하는 이타적인 사람들이 더 많이 살아남는다. 따라서 이타적 유전자가 우리에게 전해졌다.
비판 -> 진화론이란 목적을 위해서는 정반대의 반응도 - 자기 종족 이외의 사람들에 대한 적대행위도- 꼭 같이 도덕적이며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 철저하게 진화론적 자연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런 식의 이타주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거나, 그렇지 못하면 죄책감을 느끼는)는 이미 오래 전에 인류에게서 없어져야만 했따.
(4) 도덕적 의무가 갖고 있는 문제점
: 문화적 상대주의 - 모든 도덕적 신념은 문화적으로 형성되며(우리가 그걸 믿는 까닭은 그것을 그럴싸하게 만드는 공동체에 우리가 속해있기 때문이라는 것)어떤 문화의 도덕성이 다른 문화의 그것보다 우워러하다고 객관적으로 판단한 근거는 전혀 없다는 견해
:인류학자들은 문화적 상대주의를 강력히 지지하고 있다. 가장 논란이 많은 이슈 중의 하나는 이런 근원적인 질문에서 비롯된다 : 우리 서구인들은 무슨 권위로 만민의 권리가 평등하다는 우리들의 개념을 다른 인류에게 강요하는가? ...강압적 정부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국민들을 혹독하게 다루는 것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종종 문화적 상대주의를 이용한다...인권을 옹호하는 것과 문화적 상대주의를 옹호하는 것 사이에 선택을 해야 한다면, 인류학자들은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쪽을 택해야 한다" '캐럴린 플뤼어-로반'
그녀가 천명하는 것은 단순히 이것이다 " 여자들은 억압을 당하고 있으며, 난 그런 광행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느낀다. 우리는 우리의 서구적 가치들을 이 나라들에게 가져가야 한다. 우리의 가치가 그들의 가치보다 우월하니까"
(5) 인권이라는 껄끄러운 문제
(6) 오만불손 "누가 그래?"
(7) 자연의 폭력에서 신의 존재를 알 수 있다는 주장
: Annie Dillard라는 작가는 "대자연"에 가까이 감으로써 영감도 얻고 머리도 식힐까 하여 버지니어주의 산악지역에 있는 냇가에서 일 년을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원하는 것 대신,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대자연은 하나의 주된 원칙, 약자에 대한 강자의 폭력이란 원칙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고 있다는 깨달음이엇다
: 폭력이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거라면,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게 잘못일까? 자연이 '부자연스럽다'고 주장하지 않는 한, 도덕적 의무를 위한 기반은 일체 없다. 잘잘못을 판단하기 위해 무언가 '초자연적'인 기준이 없다면, 대자연이 어떤 면에서 부서졌다는 걸 어찌 알겠는가.
(8) 끝도 없고 의미도 없는 존재의 논쟁
: 우린 모두 마치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추구하는 게 더 낫고, 거짓을 말하기보다진실을 말하는 게 낫고, 파괴하는 것보다 보살피고 양육하는 게 더 나은 것처럼 살아간다.우리는 이런 선택들이 무의미하지 않다고 믿으며, 어떤 식으로 살기로 하느냐는 중요하다ㅗ 믿는다. 그런데도 우주의 재판관석이 정말로 텅 비어있다면, 어떤 선택이 다른 선태보다 더 나은 거라고 "누가 그래?" 그것에 대해 논쟁을 벌일 수는 있지만, 그건 무의미한 논쟁이고 끝이 안 보이는 다툼이다.......우리가 사랑에 넘치든 잔혹하기 끝이 없든, 궁극적으론 아무 차이가 없을 것이다.
10. 죄악이라는 문제
(1) 죄악과 인간의 희망
: Barbara Brown Taylor - 의학용어나 법률용어나 모두 [죄악이란] 언어를 대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의학이 제시하는 모델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질병에 완전히 휘둘리는 게 아니다. 회개라는 과정으로 들어가겠노라고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률이 제시하는 모델과도 대조적으로, 죄악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법률의 위반이 아니라, 인간과 신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만들어진 질서가 온통 망가지는 것이다. 시몬 베이유는 '죄악이란 모두 공허감을 채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라고 썼다. 우리 영혼에 남은 신의 모습으로 뻥 뚫린 구멍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별의별 것으로 그걸 채워보려고 하지만, 그걸 채울 수 있는 건 오로지 신뿐이다.
: 앤드류 델방코(컬럼비아대학 인문학교수) 사례 : AA모임에서 한 젊은이의 이야기 (자신은 무결점하며 모든 실수는 다른 사람들의 부당함과 배신 때문이였다고 함, 복수를 하겠다고 함, 스스로를 정당화 하려는 욕구에 갇혀 있었고 그가 깨닫기 전에는 만사가 악화될 것도 분명했다) 곱슬머리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사십 대의 한 흑인이 델방코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이렇게 말했다.
" 나도 스스로를 낮추는 방법을 터득하기 전에는 저런 느낌이었다오"
나중에 델방코는 <A Real American Dream: A Mediatation on Hope>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 그건 단순히 멋들어진 한마디 이상이었다. 종교라고 하면 나도 제법 안다고 주장해왔지만, 그것은 내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종교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나와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내 삶을 콘트롤해야" 한다든가, "정말 나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는 말들을 쏟아내고 있을 때, 내 옆에 앉은 사람은 자만심은 희망의 적이라고 하는 오랜 칼뱅주의 교리에서 위안을 찾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음을 배웠다는 얘기다"
(2) 죄악의 의미
: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1849년 <죽음에 이르는 병>
" 죄악이란: 절망으로 인해 신 앞에서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싶지 않은 상태
믿음이란 : 스스로이며 스스로이기를 원하는 자아가 투명하게 신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 "
: 인간은 누구나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는 모종의 방법을 찾고, 자기가 쓸모없는 건달이 아닐까 하는 포괄적인 두려움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좀 더 전통적인 문화에서 가치라든가 정체성이라는 센스는 가족에게 의무를 다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우리네 개인주의 문화에서 사람들은 성취, 사회적 지위, 재능, 혹은 연애관계 따위를 바라보는 경향이 짙다.....어쨌거나 우리는 모두 무언가의 기반 위에서 우리 정체성을 확립한다.
(3) 죄악이 개인에 미치는 결과
: 인간에겐 오로지 신과 우상 사이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신을 부정한다면....이 세상의 무엇인가를 숭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는 그런 것들을 오직 세상의 사물로 본다고 믿지만, 사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안에 신의 속성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4) 죄악이 사회에 미치는 결과
: 우리가 내 가족, 내 계급, 내 종족, 내 종교 따위를 더 깊이 사랑하고 더 강한 끈을 느낄수록, 다른 종교나 다른 종족 등에 대한 우워러감을 느끼지 않기란 한층 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인종주의, 계급주의, 성차별주의 따위는 무지의 문제도 아니고 교육을 못 받아서 생기는 문제도 아니다. 푸코를 위시한 우리 시대의 사상가들은, 배타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자아 정체성을 갖기란 생각보다도 훨씬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진짜 문화 전쟁은 혼란에 빠진 우리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그 마음은 우리를 좌지우지하는 것들, 우리가 우월하다고 느껴서 배타적이 되도록 유도하는 것들, 손에 넣어도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들을 향한 터무니없는 욕망으로 인해 부서지고 있다.
(5) 죄악이 우주에 미치는 결과
: 우리가 신에게 봉사하는 대신 우리 스스로에게 봉사하기로 맘먹은 순간, 창조세계가 무너짐 (질병, 유전적 혼란, 기아, 자연 재해, 노쇠, 죽음 자체 등등...죄악의 결과)
(6) 무엇이 이 모든 걸 제대로 고칠 수 있을까?
: 루이스의 "기독교 쉬운가 어려운가?" 중
'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생각은....인간은 다양한 욕구와 관심을 지닌 자연스러운 자아를 갖고 있다는 것....도덕과 사회의 모든 요구가 충족되고 나서도, 이 가련한 자연의 자에에게 여전히 나름대로의 삶을 살 수 있고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주어지기를 우리 모두 바라고 있다. 사실 우리는 세금을 내기 위해 끙끙대는 정직한 사람과 많이 닮아 있다. 세금을 내긴 하지만, 그래도 먹고 살만큼은 남아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방식은 다르다. 더 힘들기도 하고 더 수월하기도 하다. 그리스도가 말하기를 "나에게 모든 것을 달라. 너희 시간의 약간, 돈의 약간, 일의 약간을 내게 주고 나머지는 너희의 자연적인 자아가 가지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난 너희를 원한다. 너희의 소유물을 원하는 게 아니다. 나는 너희들의 자연적인 자아를 고문하려고 온 게 아니다...대신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자아를 주리라. 그러니 자연의 자아는 몽땅 내게 넘겨라...너희가 사악하다고 생각하는 욕망 뿐 아니라 너희가 결백하다고 생각하는 욕망까지 모든 욕망을 말이다. 네 껍데기를 완전히 다 내놓으란 말이다. 대신 내가 새로운 자아를 주리라."
: 죄악은 단순히 나쁜 짓을 하는게 아니라, 신의 자리에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가져다 놓는 것이다.
11. 종교와 복음
(1) 자기중심의 두 가지 형태
: 지킬박사와 하이드 中
' 이 새로운 삶을 처음으로 숨 쉬는 순간, 나는 내 자신이 훠러씬 더 사악하고 열 배나 더 사악하고 내 원래의 악마에게 노예로 팔려 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의 생각은 마치 포도주처럼 나를 들끓게 하고 기쁘게 만들었다....에드워드 하이드의 행동과 생각 하나하나는 자아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자선이나 그 밖의 선행에도 헌신하는데, 이는 헤드워드 하이드로서 저질렀던 짓에 대한 속죄의 몸짓이기도 하고, 동시에 단순히 이타적인 행동으로써 자신의 이기적인 본성을 억누르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날 지킬 박사는 공원 벤치에서 자신의 선행을 곱씹으며, 자신의 몸 속에 하이드씨가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생각한다.
'나는 과거의 죄를 미래의 행실로써 갚고자 결심한다. 그리고 이 결심이 어느 정도의 선이라는 결실을 맺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은 내가 지난해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얼마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애를 썼는지 알고 있따....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그들의 소홀함이 갖는 게을러터진 잔인함과 나의 활발한 선행을 비교하면서, 바로 그런 허장성세의 순간에 은근히 미소를 짓고 있을 때....돌연한 현기증이 나를 사로잡더니...아래를 내려다보자...아, 나는 다시 한 번 에드워드 하이드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이거야말로 치명적 사태의 전환이다. 지킬 박사는 처음으로 본의 아니게 - 약을 먹지 않고서도- 하이드씨로 변하고, 이것은 종말의 시작이 된다. 자신의 변형을 더 이상 컨트롤할 수 없게 된 지킬 박사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여기서 저자의 통찰력은, 내가 생각 하기엔, 참으로 심오하다. 약을 먹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그는 하이드씨가 된 것일까? 많은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지킬 박사는 자신이 죄인임을 안다. 그래서 선행을 축적함으로써 그 죄를 덮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실제 그런 노력은 그의 자만과 자기중심을 위축시키기는 커녕, 그걸 악화시킬 뿐이다. 그런 노력 때문에 그는 우월감과 독선과 자만을 갖게 되고, 급기야는, 보라! - 지킬 박사는 하이드씨가 된다! 그의 선량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바로 그의 선량함 때문에 말이다!
: 자기 중심의 두 가지 형태 - 1) 성질이 아주 고약해서 규칙이란 규칙은 모조리 어기는 것 / 2) 아주 착하게도 규칙이란 규칙은 모두 지키면서 독선적으로 변하는 것
2) 독선적 종교가 남긴 폐해
3) 은총의 차이
: 우리의 정체성과 자기존중 - 종교의 틀 안에서 스스로의 기준에 걸맞게 살면 스스로 우월하다고 느끼며 참된 길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경멸함. 손수 선택한 기준에 맞게 살지 못하면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으로 어쩔 줄 모름
내가 개인적으로 복음을 아주 힘없이 붙잡고 있을 땐, 내 자신에 대한 견해가 위의 두 가지 극단 사이를 오락가락 햇다. 학업,직장의 실적, 인간관계 등 내가 세운 기준을 만족시켰을 경우, 나는 자신감이 넘쳤지만 겸손하진 못했다. 기준에 못 미치고 있었을 때엔, 겸손해지긴 했지만 자신감은 없어진 패배자의 기분이었다.
: 그리스도 안에서는 내 결함에도 불구하고 은총에 의해 받아들여질 뿐 아니라, 내가 그런 결함을 기꺼이 인정하기 때문에 은총으로 받아들여짐을 알 수 있었다.
나의 흠으로 인해 예수가 나를 위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 예수가 나를 위해 죽음을 기꺼워했다는 것: 이것은 깊은 겸손과 자신감을 동시에 가져다 준다.
그것을 뻐기며 뽐내는 것도 없애주고, 질질 짜며 주눅 드는 것도 없애준다. 어느 누구보다도 우월하다고 느낄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어느 누구에게든 뭘 증명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남들이 날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런 걸 스스롱게 자주 통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12 (진짜) 십자가 이야기
1) 첫 번째 이유 : 참된 용서는 값비싼 고통이다
: 본 회피거 감옥에 있을 때 섰떤 편지
" 제발 저에 대해선 초조해하거나 불안하게 생각지 마시고, 절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만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물론 잊지 않으시겠지요. 저는 저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너무나도 확신하며, 앞으로도 언제나 그 신념 속에서 살기를 희망합니다. 제가 감사하고 기뻐하며 저의 인생행로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의심 하지 마십시오. 저의 과거는 하나님의 자비로 가득하며, 제가 지은 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으로 사함을 받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자신을 위해 했던 일을 고스란히 실행하는 본회퍼의 모습을 본다. 예수는 그의 죄를 떠안고, 그 대가를 치렀다. 이제 본회퍼는 자유롭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같은 일을 한다. 그는 신의 용서를 이용하여 인간의 용서를 이해하는 것이다.
2) 신의 용서
: 행해진 악이 심하다면 어느 누구도 '그냥' 용서할 수는 없다. 용서란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는 대신, 내가 그걸 떠안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가 새로워지고 변화할 수 있도록 사랑의 손길을 뻗을 수 있으니까. 용서란 내 스스로 죄악의 짐을 걸머지는 것을 뜻한다.
3) 두 번째 이유 : 참된 사랑은 사적인 교류다
: 온전하고 행복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나에게서 거의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지만, 정서적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사랑하면서도 나 자신은 어떻게 감정적으로 완벽하게 흔들림 없을 수가 있겠는가....내가 대화를 하면 그들이 좀 더 튼튼해 지거나 긍정적이 된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내 자신이 정서적으로 녹초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그들이거나 나 자신이거나, 둘 중 하나다. 정서적으로 그들을 부추겨 올리려면, 나는 그만큼 정서적으로 피폐해질 각오가 되어야 한다.
: 무언가가 심각하게 결핍된 사람들을 향한 삶을 뒤바꾸는 사랑은 예외 없이 모두 내가 대신 희생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과 어떤 식으로든 사적으로 엮이게 되면, 내 힘이 그들에게 흘러 들어가면서 그들의 결함은 나에게 흘러 들어온다.
4) 위대한 자리바꿈
: 십자가라는 위대한 자리바꿈에 의해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더 이상 돈,지위,경력,인종이나 계급의 자만심 따위를 통하여 자기정당화를 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는 하나의 카운터컬처를 창조하고, 이 카운터컬처 안에서는 섹스,돈,그리고 권력이 더 이상 우리를 컨트롤하지 못하며, 파괴적으로 쓰이는 게 아니라 생명을 주고 공동체를 구축하는 데에만 사용된다.
5) 십자가 이야기
: 내 자신이 예수의 이야기 속에 직접 등장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완전히 변했다. 두려움과 자만이 마침내 사라진 것이다. 예수가 나를 위해 죽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은 나를 자만에서 벗어나 겸손하게 만들었다. 예수가 나를 위해 기꺼이 죽었다는 사실이 나를 두려움에서 건져냈고 확신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14 부활의 실재
: 만약 예수가 부활했따면, 당신은 그의 말을 모두 믿어야 해요. 만일 그런 일이 없었다면, 그가 무슨 말을 했건 신경 쓸 일 없잖아요? 최대의 이슈는 당신이 그의 가르침을 좋아하느냐가 아니라, 그가 정말 부활을 했느냐 하는 겁니다.
1) 텅빈 무덤과 목격자들
: 시체가 없어졌다는 것과 목격자들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복음서에서가 아니라,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였다. 예수가 죽은 지 15~20년 후에 그 편지가 쓰였다는 것은 모든 역사학자들이 예외 없이 동의하는 바이다.
고린도전서 15: 3 ~ 6 -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으니, 이는 성경 말씀대로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묻혔다가, 성경 말씀과 같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베드로에게 나타나셨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음이라. 후에 그는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는데, 그들 중 이미 죽은 자도 있으나 대다수는 아직 살아있다.
-> 바울이 글을 쓰고 있을 당시 오백 명의 사람들의 대다수가 아직 살아있으니까 보강 증거를 원하면 그들과 대화를 할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 모든 복음서에는 예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것이 여자들이었다고 적혀 있다. (당시 여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서, 여자들의 증언은 증거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톰 라이트는 이런 기독교의 메시지를 처음 섬포한 사람들이 이야기에서 여자들을 빼버리라는 압력을 엄청 받았을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여자들을 뺄 수가 없었다. 이야기가 너무나 멀리 퍼져버린 것이다.
또한 라이트의 주장처럼, 시체가 없어진 무덤이라든가 직접 예수를 만난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전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건 역사적으로 한층 더 분명해진다. 텅 빈 무덤만 있고 예수를 만난 이야기가 없으면 누가 그걸 부활이라고 결론짓겠는가. 누군가가 사체를 훔쳐갔다고 가정했을 거다. 반대로 에수를 봤다는 이야기는 있으나 무덤에 시체가 그대로 있었다 해도, 그걸 부활이라고 단정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후에 그들을 만났다는 이갸기는 흔하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같이 사실일 때에만 비로소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결론지을 것이다.
2) 부활과 불멸
: C.S. 루이스가 말한 '현대 지상주의' - 초자연적인 것을 쉽게 믿었던 옛날 사람들은 육신의 부활을 금세 받아들였겠지만, 우리 현대인들은 그것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인다고 상상하는 것. 그건 사실과 다르다. 어느 시대의 지배적인 세계관으로 보든 간에, 한 개인의 육신이 부활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스-로마 사고방식 : 영혼은 좋은 것, 물질계는 약하고 부패하고 불결한 것. 구원은 육신에서 해방되는 것. 이런 세계관에서 자유로워진 영혼이 다시 육신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대인들 : 유대인들은 물질계를 좋게 봤다. 유대교의 가르침은 부활은 완전히 새로워진 온 누리의 한 부분. "아무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났대!" "말이돼? 질병과 죽음이 끝났다는 거야? 이 세상에 진짜 정의가 자릴 잡았다고? 늑대가 양떼와 함께 누웠다고? 웃기고 있군!" 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3) 새로운 세계관, 폭죽처럼 터지다
: 유대인들에게 어떤 인간을 숭배 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은 절대적인 신성모독이었다. 그럼에도 수백 명의 유대인들이 하룻밤 사이에 예수를 숭배하기 시작했다.....그들이 만약 예수의 부활을 봤다면 설명이 될 것이다.
파스칼의 표현대로, "목에 칼이 들어오는데도 증언을 했던 그 목격자들은 믿어도 좋다". 거의 모든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기껏 날조된 거짓말을 위해서 이렇게 강력한 자기희생을 한다면 믿겠는가.
4) 부활의 도전
: 부활의 메시지는 이 세상이 소중하다는 것이다. 부활절의 의미는, 불의와 폭력과 타락이 체질처럼 된 세상에서 신은 그런 것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신의 모든 에너지를 가지고 노력하고 게획하여 예수의 승리를 그 모든 것 위에 군림하도록 하리라는 뜻이다. 부활절을 제거해버린다면, 기독교가 물질계의 문제를 도외시한다는 칼 마르크스의 비난은 아마도 정당할 것이다. 기독교가 한낱 소원성취라는 프로이트의 말은 옳을것이다. 기독교는 겁쟁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니체의 말도 아마 정당할 것이다.
14 춤추는 신
1) 거룩한 신의 춤
: 기독교에서 신은 비개인적인 것이나 정적인 것이 아니다. 단순한 하나의 이ㅜ격조차도 아니다. 신은 다이내믹하게 펄펄 뛰는 활동이요 삶이며 일종의 드라마이고 거의 일종의 춤이다...이 삼위일체 생명의 패턴이야말로...현실의 바로 중심에서 용솟음치는 에너지와 아름다움의 위대한 샘이다.
2) 사랑의 춤
: 세상은 영원에서 영워너가지 서로를 사랑했던 인격들의 공동체인 신이 창조했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서로서로 자기 자신을 내주고 타인들을 향하는 사랑을 하도록 만들어졌다. 자기중심은 신이 만든 것의 짜임새를 파괴한다.
3) 창조의 춤
: 신은 무한히 행복하다. 영광을 돌리고 기쁨에 넘친 사랑을 서로서로에게 쏟아 붓는 인격들의 공동체가 신의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그의 존재의 종심에는 '타인 지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남들의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이 인간에게 자기를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고 섬기라는 명령은?' 그렇다. 신은 복종하고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라고 명령한다. 그는 우리의 기쁨을 원한느 것이다. 신은 자기중심을 통해서 무한한 행복을 찾는 게 아니라, 자신을 내주고 다른 이들을 지향하는 사랑을 통해서 행복해진다. 그리고 그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우리 인간이 이와 꼭 같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삶 전체의 중심에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를 가져다 놓는 것이다.
4) 춤의 상실
: 자기중심은 심리적인 소외상태를 만든다. 자기몰입이라든지, 미소도 짓지 않은 채 우리의 욕구와 결핍과 치료와 자아와 기록 등에 집착하는 것보다도 우리르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자기 중심은 사회의 해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서로 다른 국가, 인종, 계급 그리고 개인들 사이에서 관계가 깨어지는 근본 원인에는 자기 중심이 있다.
5) 다시 춤을 추자
: 예수가 당신을 위해 죽었을 때, 그는, 말하자면, 함께 춤을 추자고 손을 내민 것이다. 당신이 그에게 반응을 보인다면, 모든 관계는 치유되기 시작할 것이다.
6) 그 춤의 미래
: 우리는 천국이 우리의 세계로 내려와 그것과 하나가 되고, 거기서 파괴되고 불완전한 모든 것들을 정화하는 모습을 본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것을 새로운 에덴동산이라고 묘사했는데, 여기엔 다시금 인간과 자연의 완벽한 조화가 있을 것이며, 인종간의 반목과 전쟁이 없어짐에 따라 상처와 질병과 죽음도 사라질 것이다. 더 이상 가난한 자도, 노예도, 범죄자도, 상심하여 애도하는 자도 없을 것이다.
7) 기독교적인 삶
: 신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환희와 기쁨을 점점 더 많이 공유하도록 했다. 신이 자신의 내부에 환희와 기쁨을 누리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가장 먼저 신에게 영광을 돌리면서(우리 자신이 아니라 신을 숭배하고 섬기면서); 둘째로 신의 영광이라는 형상대로 만들어진 다른 인간들의 존엄을 지키고 보살피면서; 셋째로는 신의 영광을 반영하는 대자연의 세계에 나타나는 신의 파생적인 영광을 소중히 껴안으면서 그의 기쁨을 공유한다. 우리가 신을 경배하고, 인류 공동체에 봉사하며, 창조된 환경을 보살필 때에만 비로소 신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누릴' 수 있다.
에필로그. 자, 이제 어디로 가는 거지?
1) 당신을 움직인 동기들을 체크해보라
: 당신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기독교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봉사하도록 만들려고 발을 들여놓고 있는가? 후자라면 그건 일종의 샤머니즘이요, 당신의 기도와 예배로써 신을 컨트롤하려는 시도다. 그건 신을 믿는 게 아니라 신을 악용하는 것이다.
2)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만지 따져봐?
: 예수를 믿음으로서 내 삶이 바뀌고 세상을 보는 견해가 영향을 받지 않는 한, 그냥 예수를 믿는다고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3) 재고조사(!?)
- 콘텐츠의 이슈 : 천지차아조, 죄악, 신으로서의 예수, 십자가, 부활 등 기독교 메시지 중에서 당신이 이해할 수 없거나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가?
- 일관성의 이슈 :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아직도 당신이 풀 수 없는 의구심이나 이의가 있는가?
- 대가라는 이슈 : 전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면 당신이 무언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인가? 그런 서약에 대해서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위와 같은 아웃라인을 사용하면 당신이 완전히 기독교에 몸을 내맡기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을 분석하고 밝혀낼 수 있다.
4) 행동 개시
: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하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 신과 당신 사이의 관계를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회개는 바로 당신의 '내 스스로 구원하기' 프로젝트가 가장 큰 죄악임을 깨닫는 순간 시작된다.
우리는 나쁜 행동에서 뿐만 아니라 좋은 행동에서도 우리 자신의 구세주, 우리 자신의 주님이 되고자 한다. 교회와 종교에 부지런히 헌신하는 일조차도 어쩌면 회개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
: 회개란 나의 희망, 나의 의미, 나의 안전을 위해 내가 줄곧 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해왔음을 고백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저질렀던 잘못 뿐 아니라 우리의 선행에 대해서조차 회개해야 한다는 뜻이다.
: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가 스스로 주장한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 우리는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것, 십자가에서 구원을 확보햇다는 것, 부활했다는 것)
: 나뭇가지 예시 ( 절벽에서 추락, 삐죽이 튀어나온 나뭇가지, 당신에게 유일한 희망, 당신의 몸무게를 지탱할 만큼 튼튼하다고 치자. 당신이 나뭇가지가 트튼하다는 확신으로 가득하지만 실제로 손을 뻗어 붙잡지 않는다면 당신은 끝장이다. 반대로 '저 나뭇가지가 날 지탱해 줄 수 있을까' 라는 의심과 불안으로 가득하지만 어쨌거나 손을 뻗어 그걸 잡는다면, 당신은 목숨을 구한다. 왜? 실제로 당신을 구해주는 것은 당신의 튼튼한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강렬한데 나뭇가지가 허약하다면, 믿음이 나약하더라도 나뭇가지가 튼튼한 경우보다 치명적으로 불리하다.
: 그러므로 당신이 대안적인 믿음이나 대안적인 신을 인식하고 그걸 거부하면서, 당신의 도덕적 노력이나 성취가 아니라 예수가 했던 일을 기반으로 해서 부디 관계를 맺어달라고 하나님에게 요청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신앙은 시작된다.
5) 공동체에 대한 헌신
6) 은총의 트라우마
: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소설 계시Revelation의 스토리
터핀 부인- 진료실 안의 사람들을 요모조모 재보며 우월함을 느낀다. 다른 사람들처럼 만들어 주지 않아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린다. 메리 그레이스란 소녀가 뚜껑 열려 부인의 목을 조른다. 부인은 이게 계시라 생각한다. 메리는 외친다 "지옥으로 돌아가란 말이야, 이 늙어빠진 혹부리 멧돼지야!"
부인은 말한다 "왜 하필 나죠? 흑인이든 백인인든 주위의 쓰레기 같은 것들 중엔 내가 베풀지 않은 자가 없어요. 난 교회를 위해서도 힘썼죠.....하루종일 루트 비어나 마시면서 길가에서 빈둥대고, 씹는담배를 입에 넣었다가 아무 웅덩이에나 뱉어내거나 얼굴에 떡칠을 하고, 나도 역겨운 짓을 하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당신이 도대체 뭐길래 그래요?"
그리고 환상을 본다.
많은 영혼들이 천국을 향해 몰려가고 있었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손뼉을 치며 개구리같인 풀쩍풀쩍 뛰어가고 있는게 아닌다....맨 뒤쪽에서 따라가는 사람들을 봤더니, 자기 자신이나 클로드처럼 갖출 것은 대충 다 갖추거 하늘이 내리신 위트도 적절히 썩면서 살았던 그런 종류의 사람들임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그들은 엄청 점잔을 빼며 다른 사람들의 꽁무니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언제나 그랬듯이 정연한 질서와 상시과 점잖은 행실을 대표하고 있었다.....
예수도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똑같은 말을 하여 그들을 경악으로 몰아넣었었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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