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 저자
- 필립 얀시 지음
- 출판사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 1999-08-18 출간
- 카테고리
- 종교
- 책소개
- ECPA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책'을 6회나 수상한 이 시대 ...
내가 생각하던 하나님의 은혜란 이런 것이였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잘 보이려고 교탁에 물도 갖다 놓고, 숙제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과도 원만하게 지낸다. 이 모든 행위들이 선생님에게 '보여지길'원하며, 그에 따른 보상 (칭찬, 머리 쓰다듬기, 상장 등)을 기대한다.
하나님의 은혜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미워하는 사람의 행위 앞에서 미소를 한 번 짓고는 "하나님 칭찬해 주세요"를 속으로 읊조린다. 운전 중에 위험하게 끼어드는 차가 있어도 "하나님, 제가 참았어요" 라고 씩 웃는다. 그리고서는 칭찬을 기대했다. 이 칭찬이란 다름아닌 하나님의 '은혜'다.
칭찬받기 위한 나의노력 뒤에 오는 은혜. 내가 생각하던 은혜란 그런것이였다. 결국,칭찬받을 짓을 한개도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은혜도 존재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한 것은 하나님은 그런 차원에서 은혜를 주시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물론, 선한 행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선한 노력 뒤에 부록으로 '은혜'가 도출되는 공식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악'을 행한다는 것은 쉽지않다. 사람이기에 물론 실수를 할 수도 있지만 바로 무릎 꿇고 회개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였다.
바로 '나'다. 죄안에서, 나의 욕망만을 푯대 삼아 살아오고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사람들을 모독하며 살아오던 나를 하나님이 사랑해 주셨고, 구원해 주셨다. 그리고 은혜를 주셨다. 선한 결과 뒤에 오는 은혜가 아니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조건이 없었다.
요새 묵상하고 있는 '욥'을 생각하면 또 다른 차원의 궁금증은 생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구원 받은 후에 겪고 있는 지금의 이 고난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르릉꽝꽝 하며 욥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천지를 만들고 너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좀 알아라" 난 하나님의 선하심 속에서 하나님과 열심히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의 아들답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 나머지 모든 문제와 걱정들은 천지를 만드시고 나를 만드시고 나의 오장육부까지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실 일이다.
물론,난 오늘도 내일도 또다른 의심속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겠지만....이렇게 치열하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좋다.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단순한 분이 아니시다.
많은 경우 로맨틱한 사랑은 순수한 은혜에 가장 근접한 경험이다. 나를-나를!-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매력 있고 괜찮은 상대로 보아 주는 사람이 있다. 나를 생각하면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있다. 용서를 빌기도 전에 감싸주는 사람, 옷 입을 때 내 생각을 하는 사람, 나 중심으로 삶을 바꾸는 사람이 있다.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기독교적 감각이 뛰어난 존 업다이크나 워커 퍼시 같은 현대 작가들이 소설을 쓸 때 성관계를 은혜의 상징으로 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우리 문화가 이해하는 언어, 즉 교리로서의 은혜가 아닌 루머로서의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마지막 황제'를 보면 중국의 마지막 황제로 등극한 소년이 휘화에 수천 명의 내시를 거느리고 마술처럼 호화롭게 살아간다. 한번은 동생이 황제가 잘못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소년 황제는 '내가 잘못하면 딴 사람이 벌을 받지"라고 말한다. 시범을 보이려고 단지를 깨뜨리자 과연 신하 하나가 매를 맞는다. 예수님은 이 순서를 뒤집으셨다. 종이 잘못하면 왕이 벌을 받는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이다. 은혜란 주는 이가 친히 값을 치렀기에 값이 없는 것이다.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신앙 훈련과 자기 부인에 아무리 힘써도,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의로운 싸움에 아무리 발벗고 나서도 다 소용 없다. 은혜란 또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약화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 중략 - 하나님의 사랑에 의심이 가고 하나님의 은혜에 회의가 드는 이들에게 한 가지 간단한 처방이 있다.성경을 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이 어떤 부류인지 보면 된다. 감히 하나님과 씨름으로 맞선 뒤 평생 싸움의 상처를 안고 산 야. 그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의 시조가 되었다. 성경에는 간부요 살인범이 구약의 가장 위대한 왕이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부상한 기사도 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고 맹세한 제자가 교회 지도자가 되었는가 하면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던 도당에서 선교사로 뽑힌 사람도 있다.
용서란 믿음의 행위다. 남을 용서함으로써 하나님이 나보다 정의를 실현하는 데 뛰어난 분이심을 믿는 것이다. 용서함으로써 복수의 권리를 거두고 공평 문제의 처리를 모두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것이다. 정의와 자비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할 저울을 하나님 손에 놓아 드리는 것이다.
로마서의 처음 몇 장은비참한 인류의 상태를 고하고 있다. 숙명적 결론은이렇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러나 새 악장을 시작하는 팡파르처럼 다음 두 장에 가면 모든 형벌을 일소하는 은혜가 나온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물론 위대한 신학이다. 그러나 이런 일괄적 선언은 내가 지금껏 변죽만 올려 온 아주 실제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용서받을 것을 미리 아는데 착하게 살 필요가 있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데 굳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되려 애쓸 필요가 있나?
바울은 그가 신학적 수문을 열었다는것을 알았다. 로마서 6장에서 그는 대놓고 묻는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롬 6:1) 그는 이어서 또 묻는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롬 6:15) 두 질문 모두에 바울은 짧지만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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