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랑클 박사의 말처럼, 행복이나 성공은 추구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훌륭한 일에 전념하다가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부산물 같은 것이다. 적어도
내 삶을 돌이켜 보았을 때, 내 계획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다. 계획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모른다. 삶을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 않고, 새로운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 있더라도 삶에는 의미가 있다. 적어도 내 삶을 돌이켜 보았을 때 행복했노라 하는 짧은 순간들은 실제로 존재 했었고 그 행복
들은 내 계획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아무런 예고 없이, 그저 내 앞에 떡하니 주어지곤 했다.
인생의 희노애락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행복하게 살려면 '인생은 행복해야 한다' 라는 명제에 거짓 선언를 하고, 고통 중에서라도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태도로
성실히 살아가면 된다. 빅터 프랑클 박사의 말처럼 '과잉의도'는 오히려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성공이나 행복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버리고 일이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유유자적한 태도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희망이 없는, 고통과 고난만 가득할 것 같은 아우슈비츠라는 공간에도 소소한 희망들은 있었다. 언제 풀려날 지 알 수 없는 그 고통스런 경험 속에서도 타인
을 배려하며, 고개를 숙이지 않고 당당히 살아간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 수는 적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 희망이 된다.
빅터 프랑클 박사는 결국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된다. 그리고 이 책을 집필하고, 로고데라피라는 심리요법을 제창한다.
희망은 있더라.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트 E.프랑클 -
# 1984년 개정판에 부친 서문
저자로서의 어떤 명성도 쌓지 않기 위해 익명으로 출판하려 했던 바로 이 책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나는 유럽과 미국의 학생들에게 거듭거듭 타이른다.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마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표적으로 삼으면 삼을수록 점점 더 놓치게 될 것이다. 성공이란, 행복과 마찬가지로 추구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보다는 훌륭한 어떤 일에 전념하다가 뜻밖에 얻어지는 부수적인 결과나 또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어줌으로써 얻어지는 부산물 같은 것일 뿐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다. 성공도 마찬가지다. 성공하지 못할까봐 걱정하지 말고 일이 되어 가는 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 나는 여러분들이 자신의 의식이 명령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이고, 여러분이 아는 한껏 실행해 나가기를 바란다. 그러면 마침내 - 그렇다, 마침내! - 성공이 바짝 뒤따라 와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성공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1 부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
- 담배를 피울 수있는 특권은 매주 일정량의 담배 배급권을 받고 있었던 카포들에게나 보장된 것이었다. 아니면 창고나 작업장의 감독으로 일하는 죄수와 힘든 일을 하는 대가로 담배 두세 개비를 받는 죄수들이나 할수 있는 일이었다.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살고자 하는 의지를 상실하고 생애 최후의 며칠 간을 '즐기고' 싶어하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러므로 누군가 자기 담배를 피운다면 그는 더 이상 버텨나갈 의지를 포기했다는 뜻이며, 살고자 하는 의지는 일단 상실하고 나면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 그 손가락 게임이 (독일 장교가 줄지어 들어오는 1,500명의 포로들을 왼쪽, 오른쪽으로 보내는)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이었는지 그 날 저녁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첫 번째 선발이었으며, 우리의 생사를 결정하는 최초의 판결이었다. 이번에 수송된 사람들의 대부분, 즉 약 90퍼센트에게 있어 그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들에 대한 선고는 불과 몇 시간 안에 집행되었다. 왼쪽으로 보내진 사람들은 역에서 곧장 화장터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나한테 들려준 이야기로는, 그 건물은 문에 유럽 몇 개 국어로 '목욕탕' 이라고 써놓았다고 한다. 죄수들이 그 안에 들어가면 비누 한 조각씩을 손에 쥐어주고, 그런 다음 -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 다음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이 끔찍한 일들에 대해 쓴 글은 많이 있으니까.
- 우리들 중 몇몇이 가지고 있던 환상들은 하나하나 무너졌으며, 그러고 나자 아주 뜻밖에도 냉혹한 농담이 우리들을 지배했다. 우리는 정말이지 우스꽝스럽게도 벌거숭이가 된 인생 외에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물줄기가 쏟아지자,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서로에 대하여 농담을 하며 명랑해지려고 애를 썼다. 결국, 진짜 물이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가!
- 교과서 어딘가에 사람은 일정한 시간 이상 잠자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 적ㅎ 있다. 아주 잘못된 말이다! 나도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고 확신했었다. 이것이 없으면 잘 수가 없고, 저것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둥. 아우슈비츠에서의 첫날밤을 우리는 층층이 쌓아올린 판자 위에서 잤다. 각층은 폭 6.5피트(198cm)에 길이 8피트(243cm) 가량 되는 아무것도 깔지 않은 맨 널빤지로, 그 위에서 9명씩 잤으며 9명이 담요 두 장을 나누어 덮었다. 물론 옆으로 누울 수밖에 없었으며, 서로 몸을 꼭 붙인 채 비비며 자야 했다. 혹독하게 추운 날씨였으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기도 했다. 신발을 잠자리에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진흙으로 범벅이 된 신발을 가지고 들어와서 몰래 베고 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관절이 툭 불거진 앙상한 팔을 구부려 팔베개를 베고 자야 했으니까. 그런데도 잠은 쏟아져서 모든 것을 잊게 해주었고 몇 시간이나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인간이 얼마나 많이 참고 견딜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놀라운 일을 몇 가지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이를 닦을 수 없었고, 심한 비타민 결핍증에 걸려 있었지만 잇몸은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했다. 또 셔츠 한 장을 반 년 동안이나 입고 있어서 나중에는 셔츠인지 걸레인지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수도관이 꽁꽁 얼어붙어서 몇 날이고 세수는 커녕 손 한 번 제대로 씻지 못하는 일도 있었지만, 흙일을 하다가 더러워진 손에 상처가 나도 그 상처가 곪는 일은 없었다(동상은 예외다). 또는 옆방에서 들리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잠이 깨곤 하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와 마주 누워 있는 사람이 귀에다 대고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아대도 세상 모르고 잠을 잔다.
- 자살할 생각은 거의 누구나 순간적으로라도 다 하고 있었다. 그것은 희망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생겨났으며,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이 언제나 우리 위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죽음이 항상 곁에 있다는 것이 오히려 더 많은 일들을 참을 수 있게 했다. 나는 개인적인 신념에서, 수용소에 도착한 첫날 저녁 '철조망으로 달려가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내 자신과 굳게 약속했다. (철조망으로 달려간다는 말은 수용소 안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자살 방법을 표현하는 말이다.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갖다 대기만 하면 되니까) 자살을 한다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생각해보고 있을 수 있는 온갖 기회를 다 계산해 보아도 그저 평범한 죄수로서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정말 희박했기 때문이다. 죄수들은 모든 선발에서 살아남을 몇 안 되는 사람들 속에 자신이 끼기를 바랐으나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아우슈비츠의 죄수는 충격의 제 1단계에서 이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가스처형실까지도 처음 며칠이 지난 뒤에는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가스처형실이 있는데 왜 굳이 자살 한단 말인가.
- 상처가 났거나 아니면 어디가 부었다던가 열이 났다던가 해서 이틀쯤 수용소 안에서 가벼운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진료실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때 열두 살 난 소년이 들것에 실려오는데 그는 그것을 태연하게 바라보고 서있다. 소년은 수용소 안에 맞는 신발이 없어서 맨발로 몇 시간이나 눈 위에서 차려 자세로 서있기도 하고 또 맨발로 옥외 노동을 해야 했다. 당연히 동상에 걸렸고, 당직 의사는 썩어서 시커멓게 된 발가락들을 족집게로 하나하나 뽑아내고 있다. 역겨움,공포,연민 따위는 이제 우리 구경꾼들로서는 더 이상 진정으로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죽어 가는 사람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의 모습은 ㅅ용소에서 몇 주일을 지낸 사람에게는 너무나 흔해빠진 광경이 되어서 그런 걸 보아도 더 이상 그의 마음은 동요되지 않는다.
- 냉담. 어떤 일에도 더 이상 마음을 두지 않을 정도로 감정과 느낌이 둔화된 상태인 냉담은 심리적 반응의 제2 단계가 진행되는 동안 일어나는 징후였으며, 그것은 또한 날마다 그리고 아무 때나 매맞는 일에도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얼마안가 죄수는 이 냉담이라는 것으로 자신에게 꼭 필요한 보호막을 만든다.
- 기묘하게도 상황에 따라서는, 상처 하나 주지 않는 타격이 눈에 보이는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철로 위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무리 날씨가 나빠도 일을 계속해야 했다. 나는 철로에 자갈을 고르게 깔면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딱 한 번 삽에다 몸을 기대고 숨 좀 돌려볼까 하고 일을 멈추었을 뿐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때 감시병이 뒤를 돌아볼 게 뭔가. 그는 내가 빈둥거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내게 준 아픔은 어떤 모욕도 주먹질도 아니었다. 그는 누더기를 걸치고 비쩍 마른 모습으로 자기 앞에 서있는 이 인간에게 말은 물론이고 욕설조차도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에게는 아마 내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희미한 어떤 물체 정도로 보였던지, 장난하듯 돌멩이를 하나 집어들어 나한테 던졌다. 마치 야생 짐승의 주의를 끈다던가 가축을 제자리로 불러들인다거나 하는, 아무튼 자기와는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어서 벌을 줄 필요조차 없는 어떤 생물에게 하는 행위로 보였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 겉보기에 감정이 굳어버린 것 같은 죄수라도 분개 - 학대나 고통을 받는 데에 분개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따르는 모욕에 대해 분개하는 것이다 - 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이런 이야기를 시시콜콜 하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나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인간이 내 인생에 대해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을 들어야 했기 때문에 피가 머리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 냉담. 두 번째 징후인 이것은 필수적인 자기 방위기제였다.현실은 흐릿해지고, 모든 노력과 모든 감정은 한 가지 일에만 집중되었다. 그것은 자기 목숨과 다른 동료의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 죄수가 가장 자주 꾸는 꿈은 어떤 것일까? 빵, 케이크, 담배 그리고 따뜻한 목욕이었다. 이런 단순한 욕구들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죄수는 꿈속에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이런 꿈들이 도움이 되는지 어떤지는 별개 문제이다. 꿈을 꾼 사람은 꿈에서 깨어나 수용소의 현실로 돌아와야 했으며, 현실과 환상 사이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어느 날 밤 나는 한 동료 죄수가 끙끙대는 소리에 잠이 깨었는데, 그 날 밤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자면서 몸부림을 치는 것으로 보아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는 게 분명했다......그러나 그를 흔들어 깨우려고 손을 뻗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멈칫했다......즉 아무리 무서운 꿈이나 아무리 두려운 일일지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리고 내가 지금 막 그 사람을 불러내려고 하는 이 수용소의 현실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 죄수들이 겪는 인간 이하의 생활과 자기 생명을 구하려는 데에만 집중된 노력은 목숨을 건지기 위한 일이 아니면 무엇이든 무시해 버리도록 했으며, 그것은 또한 정서가 완전히 고갈된 현상도 해명해 준다.
- 풍요로운 지적 생활을 누렸던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훨씬 더 고통스러웠을 테지만(그런사람들은 흔히 예민한 체질이니까), 그러나 그들의 내면적인 자아가입은 손상은 생각보다 적었다. 그들은 끔찍한 주위 환경으로부터 내면적 풍요로움과 정신적 자유가 있는 삶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이것이 체질상 별로 튼튼하지 못한 죄수들이 건장한 체구를 타고난 죄수들보다 수용소 생활에서 더 잘 살아남은 역설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열망할 수 있는 궁극적이며 지고한 목표라는 것이다. 그제야나는 인간의 시와 인간의 사상과인간의신앙이 말하려고 하는 가장 위대한 비밀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남길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도 짧은 한 순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조용히 생각해 보면서 더없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것을 이해하게 되었다......내 생애 처음으로 이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천사들은 무한한 신의 영광을 영원토록 명상한다."
- 내면적으로 풍요로워지자 죄수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황폐해지고 정신적으로 궁핍해진 현재 상태에서 과거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 거기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나는 상상 속에서 버스를 타고, 아파트의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전등을 끈다. 우리의 생각은 흔히 그런 세세한 것들에 집중되었고, 그런 추억에 잠겨 눈물을 흘렸다.
- 죽음이 눈 앞에 닥쳐왔다는 절망감에 마지막으로 저항을 하다가 문득 나의 영혼이 대지를 뒤덮고 있는 암울한 빛을 뚫고 나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영혼이 희망 없고 의미 없는 세상을 초월해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궁극의 목적이 실재하는가 하는 나의 질문에 어디선가 "그렇다" 라는 승리에 찬 대답이 들려 오는 것을 들었다.
- 한 사람이 받는 고통은 기체의 움직임과 비슷하다. 빈방에 일정한 양의 기체를 넣어보면, 그 방이 아무리 커도 기체가 골고루 채워질 것이다. 이와 같이 고통이란 크든 작든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가득 채운다. 따라서 인간의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다.
- 우리는 병이 나서, 일하러 나가지 않아도 되었고 점호를 받지 않아도 되었다. 온종일 막사 한 구석에 누워 졸면서 하루 한 번씩 배급되는 빵과 국물 한 그릇을 기다렸다. 그러나 우리는 만족스러웠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다......병이 나서 막사에서 졸고 있다는것이 얼마나 큰 구원이었던가! 그것은 어쩌면 그 이틀만큼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것이었으리라!
- 병동에 들어온 지나흘째 되던 날 내가 막 야간작업반에 배속을 받았을 때였다. 주임의사가 급히 들어오더니, 발진티푸스 환자들이 있는 다른 수용소에 가서 의료활동을 하겠다고 자원할 생각은 없느냐고 내게 물어왔다. 내 친구들이 간곡히 만류하는것도 듣지 않고,나는 자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작업반에서 일하면 나는 얼마 못 가 곧 죽게 될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꼭 죽어야 한다면 의미 있게 죽어야 하지않겠는가.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비생산적인 노동자로 식물처럼 살다가 죽어 가는 것보다야, 그래도 의사로서 동료들을 위해 애쓰고 도와주는 것이 의심할 나위 없이 훨씬 더 값진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나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수학이니 희생은 아니었다.
- 강제수용소 재소자들의 정신적 반응은 어떤 육체적 상태나 사회학적 상태에 대한 단순한 표현 이상인것이 틀림없는 듯하다. 비록 수면부족과 불충분한 음식 그리고 여러 형태의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재소자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죄수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은 그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에 달려있지, 수용소라는 환경 탓만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황에서조차도 누구든지 자신이 지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기본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 한 인간이 자기의 운명과 또 그에 따르는 모든 고통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느냐, 자기에게 주어진 시련을 어떻게 감당하느냐 하는 것은, 설사 그가 가장 힘겨운 환경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그의 삶에 깊은 의미를 더해주기에 충분한 기회를 줄 것이다. 그것은 결국 용기있고, 고귀하며 남을 배려 하는 사람이 되는것이다.....우리는 어려운 상황을 견뎌냄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도덕적 가치들을 획득할 기회를 이용하든지 아니면 버리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선택이 자신의 고통이 가치 있는 것이 되느냐 못 되느냐를 결정한다.
- 그런 높은 도덕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된다는 건 사실이다. 죄수들 중 몇 사람만이 충만한 내적 자유를 계속 지녔고, 또 고통으로부터 주어진 그런 가치들을 획득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례가 단 한 사람뿐이라 하더라도, 그 한 사람만으로도 인간의 내적인 힘은 인간을 외적인 운명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음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는다.
-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에 갇혀 있어야 할 지 알 수 없는 것이 무엇보다도 괴로웠다는 것이다. 죄수들은 자기가 해방될 날이 언제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상 감금 기간은 불확실한 뿐만 아니라 기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저명한 심리학자는 강제수용소에서의 삶이란 '잠정적 존재' 라고 했다. 우리는 여기에 덧붙여서 '기한을 알 수 없는 잠정적 존재' 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 실직 노동자를 예로 들어보자. 그의 존재는 잠정적인 것이 되고 말았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미래를 위해 살 수 없고 어떤 목표를 세울 수도 없다. 실직한 광부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보고서를 보면, 실직상태가 빚어낸 그들 특유의 일그러진 시간- 마음의 시간 - 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죄수들 역시 이 기이한 '시간체험' 으로 고통받았다. 수용소에서는, 하루 같은 짧은 시간 단위는 끊임없이 가해지는 고문과 끝이 없을 것 같은 노역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좀 큰 시간 단위, 예를 들어 일주일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는 것 같았다.
- 우리의 '잠정적 존재'를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죄수들에게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빼앗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자신이 실재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게 견디기 몹시 힘든 외적 상황이야말로 인간에게 자신을 뛰어넘어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그런 사람들은 자주 잊어버린다. 수용소의 어려움을 자신의 정신력을 시험해 보는 기회로 삼기는 커녕, 그들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도 않고 아주 보잘것없는 것으로 경멸하였다. 그들은 현실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과거 속에서 살기를 더 좋아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삶이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 오직 몇 사람만이 정신적으로 높은 차원에 이를 수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인간의 위대함을 성취할 수 있는 아주 드문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의 실패와 죽음으로 보이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정상적인 환경에서였다면 절대 성취할 수 없었을 자기 실현을 통해서 인간의 위대함을 이룩하였다. 우리들 중 이 몇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평범하고 열의도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말이 꼭 들어맞는다. "삶이란 치과 의사 앞에 앉아 있을 때와 같다. 당신은 항상 정말로 아픈 건 이제부터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땐 이미 끝난 뒤이다."
-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특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서 자신을 구하는 수단이 된다.
- 미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죄수는 파멸되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면서 정신력까지도 함께 잃어버렸다. 그는 퇴행하였으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쇠퇴했다.....그런 현상을 보통 어느 날 아침 죄수가 옷 입고 세수하고 점호장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면서 시작된다. 간청도, 주먹질도, 위협도 소용이 없었다....그는 단순히 포기한 것이다. 자기 배설물 속에 드러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있으며, 더이상 그를 괴롭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참고 견딜 수 있다"고 니체는 말했다.....슬프게도 자신의 삶에서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사람은 목표도 목적도 없었다. 그러니 계속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 사람은 곧 죽었다. 용기를 복돋워주려는 말을 모두 거부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나는 삶에 기대할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였다. 그런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는가?
정말로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느냐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무엇을 기대하느냐이다 라는 것을 우리 자신이 배워야 했고, 더 나아가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했다. 우리는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기를 멈추고, 대신 자신이 삶으로부터 끊임없이 질문을 받는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의 대답은 말과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처신이어야 했다. 삶은 궁극적으로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할 책임과 또한 각 개인에게 끊임없이 주어지는 삶의 과업들을 수행할 책임을 가지려 하기 때문이다.
- 어떤 때는 단순히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감내해야 할 떄도 있다. 모든 상황 하나하나가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답은 언제나 오직 하나 뿐이다.
자신의 운명이 고통받게끔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고통을 과업으로, 오직 자기에게만 주어진 단 하나뿐인 과업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는 고통속에서조차도 자기는 이 우주에서 유일하고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자기를 그 고통에서 구해주거나 자기를 대신해서 고통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자기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뿐이다.
- 오래 전에 우리는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단계를 지나왔다. 그것은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적극적으로 창조함으로써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것으로 삶을 이해하려는 데에서 생긴 천진난만한 질문이었다. 우리들에게 있어 삶이란 죽음과 고통받고 죽어 가는 모든 것들을 두 팔을 크게 벌려 껴안는 것이었다.
- 일단 우리가 고통의 의미를 알게 된 이상, 우리는 소용소의 끔찍한 고통을 무시하거나 헛된 환상을 품거나 또 억지로 낙관적인 생각을 함으로써 그 고통을 줄이거나 가볍게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고통은 이제 하나의 과업이 되었고, 그것에 등을 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고통 속에 성취할 기회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 릴케가 노래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Wie Viel ist aufzuleiden!"(헤쳐나가야 할 고통이 얼마나 많은가!)
- 그래서 나는 먼저 가장 시시한 말부터 꺼냈다. 나는 말했다. 이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지 여섯 번째 겨울을 맞고 있지만 우리의 상태가 그대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태는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들 각자가 지금껏 경험한 고통 중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손실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희망을 가질 이유가 있다. 건강, 가족, 행복, 직업적 능력, 행운, 사회적 지위 - 이런 것들은 모두 다시 얻을 수 있거나 되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어쨌든 우린 아직 성한 몸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경험한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앞날에 한 재산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더 강하게 만든다."
- 집에 돌아온 사람에게 있어서 모든 경험 중 최고의 경험은 모든 고통을 겪은 후에 이제는 하나님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경이로운 느낌이다.
제 2 부. 간략하게 본 로고데라피
- 로고데라피가 정신분석에 비해서 덜 회고적이며 덜 내성적인 방법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로고데라피는 보다 미래에, 다시 말하면 환자가 앞날에 충족시켜야 할 의미에 초점을 두고 있다. 동시에 로고데라피는 정신신경증 발생에 중요한 요인이 되는 모든 악순환 형성과 피드백기제를 파괴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신신경증 환자의 전형적인 자기 중심적 사고가 지속적으로 증진되고 강화되는 것을 막고 그것을 파괴한다. ......로고데라피를 통해 환자는 자기 삶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자신의 삶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킨다.
-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긴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미 성취한 것과 앞으로 달성해야 하는것 사이의 긴장, 또는 현재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과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사이의 간격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긴장은 인간에게는 본래부터 있는 것이며 따라서 정신적 안정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사)는 환자가 자신에게 잠재해 있는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주는 일에 주저해서는 안 된다....사람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마음의 안정, 또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항상성, 즉 긴장 없는 상태라고 하는 것을 나는 정신건강상 위험한 오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가치 있는 목표와 자유의지로 선택한 일을 위한 노력과 투쟁이지, 긴장 없는 상태가 아니다.
실존적 공허
- 자신의 존재가 공허하다고 느끼면 갖가지 가면을 쓰거나 위장을 한다. 때때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되면 그것을 대신하여, 권력에 대한 의지나 재물을 얻으려는 의지로 보상되기도 한다. 다른 경우에서는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된 자리에 쾌락을 추구하는 의지가 자리잡기도 한다. 실존적 공허를 성적 보상으로 메우려는 것이다.
삶의 의미
- 삶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그 날 그 날에 따라 그리고 수시로 달라진다. 문제는 막연한 삶의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순간에 그 사람의 삶에 있어서 무엇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쉬운 말로 대답하라는 것은, 체스 챔피언에게 제일 좋은 수가 뭐냐고 묻는 것과 같다. 체스 경기에서 그대 그때의 상황과 상대방 특유의 개성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제일 좋은 수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의 추상적인 의미를 찾아서는 안 된다. 사람마다 실현해야 할 구체적인 과업이 있으며, 살아가면서 그것을 실행에 옮길 자기만의 특별한 직업이나 사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안에서 그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도 없고 그의 삶 또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과업은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의 특수한 기회만큼이나 독특하고 유일한 것이다.
- 궁극적으로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어선 안 되며, 질문을 받은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는 다는 말이고,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됨으로써만 삶에 대답할 수 있을 뿐이며, 삶에 책임을 짐으로써만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로고데라피는 책임을 지는 데에서 존재의 참된 본질을 찾는다.
로고데라피에 의한 삶 속에 존재하는 의미를 찾는 세가지 방법
1) 일을 창조해 내거나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2) 무엇인가를 체험하거나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고통을 향해 우리가 취하는 태도로써.
첫째는 성취하는 방법으로 매우 분명하다. 둘째와 셋째는 좀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두 번째 방법은 선이나 진리, 아름다움 같은 것을 체험함으로써, 자연과 문화를 체험함으로써,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한 인간을 유일무이한 바로 그 사람 속에서 체험하는 것, 즉 그를 사랑함으로써 찾는 방법이다.
고통의 의미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운명을 만나게 되었을 때 조차도 삶에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럴 때 우리는 좀처럼 보기 드문 인간의 잠재능력을 최고의 상태로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바꾸고, 한 사람의 곤경을 성취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더 이상 상황을 바꿀 수 없을 때 - 수술이 불가능한 암 같은 불치병을 생각해 보자 -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키려 한다.
- 인간의 주된 관심은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는 것이 로고데라피 기본 신조 중의 하나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확신하면 기꺼이 그 고통을 받아들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고통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의미란 고통 속에서조차도-만약 그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이 확실하다면- 찾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뿐이다. 그러나 만일 피할 수 있는 고통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의미 있는 일은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일일 것이다....불필요하게 고통 당하는 것은 용감한 것이 아니라 피학적인 행위이다.
- 자신의 일을 하거나 인생을 즐길 기회로부터 단절되는 상황이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서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것이 고통의 불가피성이다. 고통에 대한 이러한 도전을 용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삶은 최후의 순간까지 의미를 지니게 되며, 이 의미를 문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간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삶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삶의 의미에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잠재의미까지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 내가 강제수용소에서 겪었던 체험 하나를 다시 생각해보자. 그때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정확한 통계에 의해서도 입증되었듯이 28대 1도 안 되었다. 아우슈비츠에 도착했을 때 외투 안에 감추어둔 내 첫 번째 원고가 구제될 가망은 전혀 없는 듯했다. 그리하여 나는 정신적 자식을 잃은 고통을 겪어야 했고 그 일을 극복해야만 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그리고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육신의 자식도, 정신의 자식도 그 어느 것도 남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나의 삶에 궁극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내가 그토록 열심히 찾으려고 애쓰고 있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미 나에게 마련되어 있었으며, 또한 곧 나에게 주어지리라는 사실을 나는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일은 내 옷을 모두 내주고 그 대신 아우슈비츠 정거장에서 곧바로 가스처형실로 보내진 어떤 죄수의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물려받았을 때 일어났다. 내 원고뭉치 대신, 새로 얻어 입은 외투 주머니에서 발견한 것은 히브리 기도서에서 찢어낸 기도문 한 장이었다. 유태인의 가장 중요한 기도문인 셰마 이스라엘Shema Yisrael이었다. 이와 같은 '우연의 일치'를, 내 생각을 단순히 종이 위에 적기만 하지말고 그 생각대로 살라는 도전으로밖에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겠는가.
얼마후 내가 곧 죽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 위기상황에서도 나의 관심은 내 동료들의 관심과는 달랐다. 그들의 의문은, "우리가 수용소에서 살아남게 될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모든 고통은 아무 의미가 없을테니까" 하는 것이었다. 나를 따라 다니는 의문은 이런 것이었다. "이 모든 고통,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죽음에 의미가 있을까? 만일 의미가 없다면 결국은 살아남아야 할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우연한 일-탈출하느냐 못 하느냐와 같은- 에 그 의미가 달려있는 삶이라면 결국 살 가치도 전혀 없다."
초의미 the super-meaning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몇몇 실존주의 학자들이 가르치듯 삶의 무의미함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절대적인 의미를 합리적인 말로는 파악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로고스에는 논리보다 깊은 뜻이 있다.
초의미라는 개념을 알지 못하는 치료 전문가는 머지않아 자기 환자 때문에 당황하게 될 것이다. 내가 여섯 살짜리 딸아이에게서 질문을 받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왜 우리는 선한 주님이라고 말하나요?" 그래서 나는 말했다. "몇 주일 전 너는 홍역을 앓았었잖니? 그런데 선한 주님께서 네 병을 완전히 낫게 해주셨잖아?" 그러나 어린 딸은 그 말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 애는 이렇게 반박했다. "그래요, 하지만 아빠, 잊지 마세요. 그 분이 나한테 홍역을 가져다 주신 게 먼저예요."
삶의 일과성
인생에서 참으로 덧없는 것은 잠재 가능성뿐이다. 가능성이란 실현되는 바로 그 순간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삶의 일과성은 책임감을 만들어낸다. 본래 한 번 지나가 버리면 그뿐인 잠재 가능성들을 어떻게 우리의 현실로 만드는가에 모든 것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수많은 현재의 가능성들 중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한다. 이들 중 어떤 것을 무위로 하고 어떤 것을 실현시킬것인가?
무엇을 한적이 있다는 것이 가장 확실한 실재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염세주의자는 벽애 걸린 달력을 매일 한 장씩 찢어낼때마다 점점 얇아져 가는 것을 두렵고 슬픈 마음으로 지켜보는 사람과 비슷하다. 반면에 인생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사람은 매일 달ㄺ에서 한 장씩 뜯어내어 그 뒷면에다 일기를 몇 자 적은 다음 전의 것들과 함께 차곡차곡 조심스럽게 묶어두는 사람과 같다. 그는 이 일기에 적어놓은 모든 귀중한 것들과 이미 최선을 다해 살아온 자신의 모든 생애를 자부심과 기쁨으로 회상할 수 있따. 자신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들 그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젊은이들을 보면서 그들을 부러워할 이유가 있을까? 혹은 흘러가 버린 청춘을 그리워하며 향수에 젖을 무슨 이유라도 있을까? 무엇 때문에 그가 젊은이들을 부러워하겠는가? 젊은이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 젊은 사람에게 마련되어 있는 미래 때문일까?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원,천만의 말씀. 가능성 대신에 나는 내 과거 속의 실체를 가지고 있는 걸. 내가 한 일과 사랑했던 사람의 실체뿐만 아니라 용감하게 견뎌낸 고통의 실체까지도. 그 고통들은 비록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은 아니더라도 내가 정말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들인 걸."
- 예측불안을 출발점으로 삼아보자. 환자가 두려워하고 있는 바로 그것을 일으킨다는 것이 이 공포증의 특색이다. 예를 들어, 넓은 방에 들어가거나 많은 사람을 대하게 되면 얼굴이 붉어질까봐 걱정하는 사람은 실제로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예상보다 더 많이 붉히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소원은 생각의 아버지' 라는 말을 '공포는 사건의 어머니' 라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매우 아이러니컬하게도, 두려움 때문에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식으로, 강제된 의도는 강제로 바라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과도한 의도, 즉 '과잉의도'는 특히 성적 신경증의 사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남성이 자기의 섹스 능력을 입증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여성이 오르가즘을 경험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들은 성공하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쾌락은 그저 부수적인 결과나 부산물이어야 하며, 그것 자체를 목표로 삼으면 그 정도에 따라 소멸되거나 망쳐지게 된다.
- 로고데라피는, 로고데라피 테크닉이 '역설적 의도'라고 부르는 것, 즉 두려움이 두려움을 낳으며 또한 과잉의도는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는 이중적인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 타고난 유머감각으로 자기 자신에게 초연해 질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특별히 사용해야만 한다. 자기 자신에게서 분리될 수 있는 인간의 이 기본적인 능력은 로고데라피 치료 테크닉에서 말하는 역설적 의도가 작용될 때마다 실현된다. 그와 동시에 환자는 자신의 신경증 증세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을 수 있게 된다. 이 말은 고든 W.올포트 교수의 말과도 일치한다. 그는 [개인과 종교] 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경증 환자가 자신을 보고 웃을 수 잇게 된다면 그는 이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며 아마 치료되고 있는 중일 것이다."
- 역설적 의도는 또한 수면장애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불면에 대한 두려움은 잠을 자야 한다는 과잉의도를 갖게 하는데, 이 과잉의도가 이번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이 유별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는 환자에게 잠을 자려고 애쓰지 말고 그 반대로 하라고,즉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깨어 있으려고 노력해보라고 항상 충고한다. 다시 말하면 잠을 자야 한다는 과잉의도는 잠을 이루지 못할 거라는 예측불안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잠들지 않으려는 역설적 의도로 바꿔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잠이 올 것이다.
- 역설적 의도가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강박충동 상태와 공포증을 치료하는 데에는 유용한 도구로 쓰일 수 있다. 특히 예측불안으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경우에 효과가 크다. 더욱이 그것은 단기 치료법이다. 단기 치료이기 때문에 치료효과도 일시적일 것이라고 단정하면 안 된다.
- 어떤 증세가 어떤 공포증에 의해 생기면 그 공포증은 증세를 일으키고, 그러면 그 증세가 이번에는 그 공포증을 강화시킨다. 이와 비슷한 연쇄작용은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들과 싸우는 강박관념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로 인해 환자는 자기를 괴롭히는 생각들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압력은 반대압력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증세는 더 강화된다! 그와는 반대로, 환자가 자신의 강박관념과 싸우기를 그치고 그 대신 역설적인 방법으로 - 즉 역설적인 의도를 적용해봄으로써 - 그 강박관념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애쓴다면, 악순환은 근절되고, 증세는 줄어들다가 마침내는 없어지고 만다.
- 예측 불안은 역설적으로 중화되어야 하며, 과잉의도와 과잉투사는 역투사로 중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역투사도 결국은 환자가 삶에서 자신에게 알맞은 직업과 사명에 적응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순환형성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신경증 환자가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면 안 된다. 그것이 연민이든 동정이든 간에, 치료를 위한 계기가 되는 것은 자아초월이다!
- 인간은 다른 여러 사물들 속에 있는 한 가지 사물이 아니다. 사물들은 서로가 서로를 결정하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결정적인 존재이다. 주어진 재능과 환경의 범위 안에서 어떤 인간이 되었는가는 그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 세대는 실제적이다. 우리는 실제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처형실에 초대받은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주기도문이나 셰마 이스라엘을 외우며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스처형실로 들어가는 존재이다.
제 3 부. 1984년 판에 부친 후기 -비극적 낙관론의 사례-
- 비극적 낙관론은, 로고데라피에서 일컫는 비극의 3요소(고통,죄악, 죽음) 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누구든지 현재도 앞으로도 변함 없이 낙관적이라는 것을 뜻한다......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란 잠재적으로 의미 있음을 전제로 한다. 또한 삶의 부정적인 것들을 자기 나름대로 긍정적인 혹은건설적인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의 역량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가지고 주어진 상황을 최상의 것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다.....그것은 (1) 고통을 인간적인 성취 및 실현으로 바꾸기 (2)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보다 낫게 변화시킬 기회를 이끌어 내기 (3) 삶의 일과성으로부터 책임 있는 행동을 취할 동기를 이끌어내기이다.
- 유럽인들이 보기에 미국 문화의 특징은 '행복해져야 한다'고 끊임없이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 같다. 그러나 행복이란 얻으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과로서 생기는 것이어야 한다.
-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본래부터 감추어져 있으나 드러나지 않고 있는 잠재의미를 주어진 상황에서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해질 이유를 찾는 존재이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각양각색의 많은 사람들을 똑같이 굶주리게 해보라. 배고픔이라는 절박한 자극이 증가함에 따라 개인적인 차이는 모호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 채워지지 않는 식욕이라는 한 가지 표현만이 일제히 나타날 것이다." 천만다행히도,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강제수용소의 내부 사정을 몰라도 되었다. 그의 환자들은 아우슈비츠의 오물 속이 아니라 빅토리아풍의 호화로운 긴 의자에 누워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개인적인 차이'는 '모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차이를 보였다. 즉 백조와 성자의 가면을 스스로 벗어 던졌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여러분들은 더 이상 주저말고 성자라는 말을 쓸 필요가 있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를 생각해 보라. 그는 단식하다가 마침내 아우슈비츠에서 석탄산 주사로 살해되었다. 그리고 1983년 성자로 모셔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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