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김기현>
1. 여는 말_ 인생, 단 하나의 물음
- 세계 종교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구원론적 구조입니다. 이는 현재 상태에 대해 불만족스럽다는 것과 함께 현 상황의 변화를 추구한다는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종교가 구원과 해방에 대한 관심이라는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구원과 해방을 제기하는 고난과 죄의 현실이 없다면, 해방이 필요하지 않을 테니 당연히 종교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 고난이 없다면 종교도 없다는 것이 억측은 아닙니다. 고난이 없다면, 세상이 파라다이스라는 말이 지나치다며, 그래도 지금과는판이하게 다를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손봉호 선생은 고통이 존재하지 않으면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라고 합니다. "윤리적이든 윤리 외적이든, 우리의 삶에 악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과 문화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갖추었을 것이다."
- 신학이란 모름지기 텍스트로서의 하나님과 성서를 컨텍스트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라면 이 땅의 소리, 그것도 한에 사무친 아우성 소리를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 고난은 지성으로 궁구해야 할 문제라기보다 살아내야 할 신비입니다. 이를테면 의미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현실과 하나님의 자비를 조화시키기에는 인간의 지성이 심히 허약합니다. 숱한 신정론이 일말의 진리는 담고 있지만, 포괄적인 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비난의 소리마저 들립니다. '신정론의 악'이라는 말까지 서슴치 않고 직격탄을 날립니다. 고난은 앎과 이해 너머의 것임에 분명합니다.
- 하박국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찬양으로 끝납니다. 저항의 골짜기에서 (합 1장) 침묵의 성곽과 성전으로 (합 2장), 마침내 찬양의 정상 (합 3장)에 올라서는 하바국서는 고난이 논리적 문제이기에 앞서 믿음의 문제요, 신앙의 신비라는 것을 새삼 주지시켜 줍니다.
- 고난 자체가 원천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그것이 고난을 묻는 자에게 주어진 대답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찬양하는 것입니다.
- 고통의 실체는 딱 부러지게 무엇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정작 물어보면 잘 모른다고 대답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고통도 그러합니다.
- 일반적으로 악은 도덕적 악과 자연적 악으로 구분됩니다.
: 도덕적 악 - 인간에게서 옴, 전쟁,살인,증오,불의,사기,수군거림,분쟁 등
: 자연적 악 - 인간과 무관하게 발생, 지진,태풍,화재,늙고 죽는 것 등
- 20세기 마지막 히브리 사상가로 불리는 Abraham Joshua Heschel은 "예언자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를 묻고는 "악에 대해 민감한 사람" 이라고 대답합니다....예언자들이 그렇게 격력하게 반응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과 고통받는 자의 눈물을 철저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 의심은 세간의 미신과 달리 도리어 건강한 믿음일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묻는 욥, 의심하는 하박국, 그리고 항의하는 요나는 불신앙의 표본이 아니라 신앙의 한 모델이라는 말에 그는 퍽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전화상이었지만 역력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불신앙의 동의어는 불순종입니다. 믿음은 신뢰, 이해, 순종을 총괄하는 용어입니다. 의심은 그중 이해에 해당합니다. 반면에 불신앙은 무관심으로서,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거나 무조건 의심하는 절대적 회의주의입니다. 신자에게 의심은 성장을 위한 과정이지만, 불신앙은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입니다.
나는 의심은 신앙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믿음과 의심을 동일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심이 전체적으로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회색 지대에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의심이 신앙의 한 모습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 Paul Tillich는 한 가지 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의심과 믿음의 상관관계에 대해 현명하게 말합니다. "진지한 의심은 믿음을 확인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관심의 대상에게 진지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 고난은 우리가 당연히 여겼던 모든것을 일거에 의문에 부치는 특이한 힘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그분의 삶의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는 것을 일말의 의심 없이 믿던 신자라도 고난에 직면해서는 돌변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분의 계획에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내면에 켜켜이 묻어 두었던 물음들이 순식간에 폭발한다.
- 의심이 병들지 않고 살아 있는 영혼의 흔적이기 위해서는 믿음이 전제 되어야한다. 의심보다 믿음이 우선 한다. 의심에서 출발하면 믿음에 이르지 못하지만, 믿음은 의심을 경유하여 다시 믿음에 당도하게 된다.
- 디르티히 본회퍼는 두 사람(부자 청년과 율법사)의 근본적인 잘못을 날카롭게 짚어 냅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싶어 합니다. 순종하기를 꺼려하는 본심을 지식으로위장하려 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물음 이면을 간파하십니다. 그들 자신을 물음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예수는 젊은이의 물음을 문제시한 것이 아니라 젊은이 자신을 문제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묻는 자에게 따르는 자가 되기를 원하라고 명하십니다.
- 믿는 자는 의심합니다. 의심하는 자가 곧 믿는 자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자는 진지해야 합니다. 순종의 각오 없이 하나님을 물음의 대상으로 삼고 턱없이 의혹의 눈길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고난의 신비에 관한 우리의 물음과 의심에 대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든지 그대로 따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없이 객기와 치기로 의심하는 것은 영혼이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럴 바에는 본회퍼의 말마따나, 묻지 말고 행하는 것이 백번 낫습니다. 믿는 자는 의심하고, 진리에 순종하는 가운데 그 해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참스 킬볼의 종교가 사악해 지는 다섯 가지 징후.
1) 종교가 특정한 이념과 해석을 절대적인 진리로주장하는 것
2) 상호 대화와 건전한 의심을 배제한채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것
3) 이상적인 시대를 설정하고 국가에 실현하려는 것
4) 목적이 모든 수단을 승인하여 종교의 체제를 지키는 것이 때로 모든 수단을 정당화해 주는 목적이 되는 것
5) 전쟁과 폭력을 '거룩하다'고 선포하는 것
킴볼은 종교의 교리와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애초부터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도 인정하기를, 시초부터 그런 것은 종교의 핵심적 특징이다. 다만, 어떠한 의문도 허용하지 않는숨 막히는 강압에 짓눌려 내 스스로 사고하는 법을 자진해서 반납하려는 광기를 문제의 원천으로 지목한다.
- 아담과 이브는 그 율법 뒤에 숨은 이유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직접 도전해 보려 하지도 않고, 어른답게 대화해 보지도 않고서 그냥 율법을 깨드렸다.
논쟁을 벌여 보는 것, 즉 심사숙고해 본다는 것은 고통과 투쟁의 길로 들어섬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다소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누구나 그러한 일에서 물러나 고통스러운 단계를 회피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모두가 게으른 것이다. 아담과 이브 이래로 우리의 모든 조상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그러니 원죄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게으름이다. - 스캇 펙 -
-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는 세 친구들의 근본적인 잘못에 대한 욥의 태도를 "구체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인간의 고통과 희망을 고려하지 않고 신학화하는 방법에 대한 거부" 라고 규정합니다. 그들의 하나님의 성품 중 학 축인 사랑과 긍휼을 망각하였음, 그분의 정의를 무시간적이고 무상황적으로 적용한 탓입니다. 그들의 주징이 하나도 그른 것이 없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의 고난의 일부에는 죄에 대한 벌로서의 인과응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형벌은 아닙니다. 아무 의미 없는 고난도 있고, 성숙과 연단을 위한 고난도 있습니다.
- 고난에는 동일하고도 공통적인 경험이 있다고 착각합니다. 이를 철학자들은 본질주의라고 합니다. 하나의 단어에 하나의 고정된 의미만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그것이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는지의 여하에 따라 의미의 낙폭이 상당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부모님을 사랑한다, 조국을 사랑한다, 오래 사랑하던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사랑한다, 만난 지 사나흘도 안된 이십대 초반의 젊은 남녀가 사랑한다는 말은 단어는 같을지라도 그 의미가 확연히 다르다.
그래서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고난에 공통 경험이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 기존의 대답을 생각 없이 받아들이라는 압력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욥의 신앙을 '저항의 영성' 이라 할 수 있ㅅ다.
하나님을 향한, 창자가 뒤틀리는 욥의 부르짖음에 비하면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특히 회중 앞에서 드리는 공중기도는 핏기도 없고 밋밋해서 감칠맛 나는 고기나 야채요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식어 버린 감자나 맛없는 음식에 가깝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님께 화내는 편이 낫다.
- 기독교는 고통의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실제로는 날마다 고통스러운 세상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실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의로운 존재'라는 믿을만한 보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에게 고통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C.S 루이스)
- 기독교가 만약 다신론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고난을 야기하는 악한 신을 하나 만들면 됩니다. 조로아스터교나 마니교와 같이 선과 악의 두 원리와 신으로 세계를 설명하거나, 그리스 신화의 불멸의 신 에리스 같은 신을 설정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항의할 수 없습니다.....하지만 기독교는 유일신 신앙입니다....모든 것이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고, 악과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떨어드린 이는 카톨릭 신자였고, 그날 아침 그가 과업을 잘 수행하고 무사히 귀환할 것을 빌어 준 것도 군종신부였고, 원자탄이 떨어진 지역은 일본 최고의 카톨릭 지역이었고, 원폭 투하지는 정확하게 성당과 수녀원이었습니다.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또 다른 하나님의 백성을 무참히 살해했고, 하나님의 일꾼이 그를 축복하고 보호를 기원했습니다.
- C.S 루이스는 무신론자 시절에 우주에 편만한 고통을 보면서, 어차피 인류가 파멸할 수밖에 없는 숙명 속에 지낸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존재 부정이라고 보았습니다......우주의 현실에 대한 우울한 전망의 설득력만큼이나, "우주가 그토록 나쁜 곳"인 만큼이나 세상은 찬란하게 아름답고, 선량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입니다...악과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면, 선과 의인으로 인해 하나님이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면, 무신론자들은 선이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서 하나님 없는 세상의 참담함을 설명해야 하는 딜레마를 안고 있습니다.
-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면서도 내게 고난을 허용하신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여간 까다롭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면 그 사랑으로 고난마저도 제거하거나 피하도록 해줏야 하는데, 그러시지 않는 이유가 우리로서는 쉽사리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설령 지성적으로는 이치에 맞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간단치 않았던 고난을 어느 정도 통과하면서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사랑하는 만큼 고난을 주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만큼 사랑받은 것입니다.
- 고난은 그 자체가 크고 작음에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믿음의 태도냐, 아니면 불신앙적 태도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옥한흠 -
- 고난에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이는 의미를 찾고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애쓸 것이고, 고난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이는 의미 없는 고난이었으므로 의미 없는 인생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 우리는 고난을 뜻 없는 고난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뜻 있는 고난으로 받아들일지를 선택해야 합니다....뜻이 있다면, 사랑의 하나님이 이런 모진 시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뜻을 계시해야 하는지, 정말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뜻이 없다면, 인생 자체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고난받는 것도 억울한데, 아무 까닭 없이 한갓 짐승처럼 그렇게 고통 속에 뒹굴어야 한다면 더 억울합니다.
- '고통 자체가 결코 선은 아니지만 선이 될 수 있다.' 고통을 파괴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창조적으로 응대하면, 즉, 선용하면 선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고통 그 자체로는 결코 이로운 것이 아니며, 늘 싸워야 하는 대상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시련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다. - 폴 투르니에-
-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더라도, 고난 자체가 결코 축복이나 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 자체가 복이라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사디스트나 마조히스트일 겁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과 은혜로 그 모든 것이 서로 아귀가 착착 맞아 꼴을 갖추도록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큰 그림과 맥락 가운데서 고난을 이해하고, 고난이 선이 되도록 창조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우리에게 요청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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