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십자가
- 저자
- 존 스토트 지음
- 출판사
-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 | 2007-02-10 출간
- 카테고리
- 종교
- 책소개
- IVP 모던 클래식스의 첫 작품! 십자가에 관한 가장 존경받고 ...
그리스도의 십자가 - 존 스토트 -
제 1 부 십자가를 향하여
"군중은 사라졌고 그들의 호기심도 만족되었다. 마침내 침묵이 임했고 어둠이 뒤덮혔다. 그 어둠과 침묵은, 아마 무죄한 구주께서 지금 당하시는 그 영혼의 고통을 아무도 못 보게 하고, 거기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리라.
1. 십자가의 중심성
# 십자가의 표시와 상징
- 불교 : 연꽃
- 고대 유대교 : 가시적 표시, 상징 회피 (우상 만드는 것을 거부하는 제2계명을 범할까),현대 유대교는 다윗의 별이라는 상징을 채택
- 이슬람 : 초승달
- 소련 : 망치와 낫 (산업과 농업)
- 기독교 : 최초 상징은 십자가가 아니었다. 격렬한 박해와 비난 때문에 자기들의 종교를 드러내 놓고 자랑할 수 없었다. 이제는 기독교의 보편적 상징인 십자가가 처음에는 외면당했는데 이는 그것이 직접 그리스도와 연결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죄인의 처형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카타콤 지하 묘지의 핍박받던 그리스도인들의 벽과 천장을 보면 초기 기독교의 주된 표시들은 공작(불멸을 상징?), 비둘기, 월계관, 물고기등 성격이 모호한 그림들 이었음. 이퀴티스(ichthys, 물고기)가 '예수스 크리스토스 테우 휘오스 소테르' (jesous Christos Theou Huios Soter,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의 머리 글자를 따왔다는 것은, 비밀을 전수받은 사람 외에는 아무도 눈치 챌 수 없었다.
-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기독교의 표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어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었음. 그렇다면 너무 많은 것들이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가 누운 구유, 청년시절 나사렛의 목수 의자, 갈릴이에서 군중을 가르치던 배, 사도들의 발을 씻기던 수건, 아리마대 요셉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굴려진 돌, 하나님 주권 상징의보좌, 오순절 성령의 비둘기 등)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해의 중심으로 그분의 탄생이나 청년 시절, 봉사, 가르침, 부활, 통치를 택하지 않고 그분의 죽음, 십자가에 달리심을 기념하고자 했다. 십자가상은 6세기 이전에는 사용된 흔적이 없다.
- 로마의 배경, 유대의 배경 모두에게 인간의 구세주가 십자가 위에서 삶을 마쳤다는 주장은 아주 좋은 냉소거리.
2세기 이교도 풍자가였던 사모사타의 루키아누스, 그는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에 못박힌 궤변가를 믿음 그의 율법 아래에서 살고 있다"고 비아냥거린다.
# 예수님의 조망
- 누가복음에 따르면("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눅2:41-50) 이미 12세 때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 라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자기 아버지의 일에 전념해야겠다는 내적은 충동을 느끼고 계셨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다.
- 공관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임박한 죽음을 분명하게 예견하시고 반복해서 예언하실 사실을 공통적으로 증언한다.
-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시는 바로 그 떄를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 예수님은 그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한,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1) 예수님은 유대 국가 지도자들의 적의 때문에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2) 자신의 죽음이 메시아에게 일어나리라고 성경에 기록된 것의 성취이므로,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3) 자신의 의도적인 선택
- 그분의 교훈, 모범, 긍휼과 능력의 일들이 매우 중요하긴 하지만, 그 가운데 어느 것도 그분 사명의 중심이 아니었다. 그분의 마음을 지배했던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주는 것이었다.
# 사도들의 강조점
- 신약 성경의 주요 서신 기자들 - 바울, 베드로, 요한 - 은 십자가의 중심성을 증언하는 데 일치하며,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도 이 점에서 마찬가지다. (가장 짧은 몇몇 서신들은 십자가에 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이 사실, 또한 주로 윤리적인 설교인 야고보의 서신이 십자가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안디ㅏ)
- 바울은 자기의 복음을 "십자가의 도"로 정의하고 자기의 사역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로 정의했으며, 세례를 "그의 죽음 속으로" 들어감으로 정의하고, 주의 만찬을 주의 죽으심의 선포로 정의한 것을 전혀 이상한 일로 생각지 않았다. 그는 과감하게, 비록 십자가가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거치는 돌"로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본질 그 자체라고 선언했다.
#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장함
-우리는 신약 성경의 주요 저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중심성을 믿었다는 점과, 그들의 확신은 바로 주님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그들이 믿었다는 점에 대해 전혀 의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초대의 사도 시대 이후의 교회가 십자가를 기독교의 표시와 상징으로 삼은 데는 두 가지 굳건한 근거가 있는데,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분의 사도들의 교훈이 그것이다. 이점에서 교희의 전통은 성경을 충실하게 반영했음이 입증된다.
- 십자가를 참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는 수치스럽게 여겨지고 심지어 가능하게 여겨지던 십자가가 그분의 추종자들에게는 가장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그들은 종이 주인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배웠으며, 고난은 영광에 이르는 수단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 신앙과 불신앙이 가장 크게 갈리는 곳은 바로 이 십자가에 대한 각각의 태도에서다. 신앙이 영광을 발견하는 바로 그곳에서 불신앙은 수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 이슬람교의 코란은 죄를 담당하는 구주의 죽음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코란은 적어도 다섯 번, "어떤 영혼도 다른 사람의 짐을 져서는 안 된다"고 단정적으로 선언한다. "짐을 진 어떤 영혼이 도움을 호소할 때,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도 그 짐을 나누어 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비록 알라가 자비로우며, 회개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을 용서한다고 할지라도 "각 사람은 자기 행위의 열매를 거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 십자가에 대한 가장 냉소적인 거부, 독일의 철학자요 언어학자인 프리드리히 니체.
<안티크리스트>의 서두에서 그는 선을 "권력에의 의지"라고 규정, 악을 "연약함에서 나오는 모든 것" 행복이란 "권력이 증가한다는 느낌" 한편 "어떤 악덕보다도 더욱 해로운 것"은 "빈약한 구성과 유약한 것에 대한 적극적 동정심, 즉 기독교" 라고 했다. 적자 생존에 대한 다윈의 강조를 우러러본 그는 모든 형태의 연약함을 멸시했으며, 그 대신에 "초인"과 "용감한 지배 종족"의 출현을 꿈꿨다.
"동정의 종교"인 기독교는 "멸망을 위하여 무르익는 것을 보존하며", 따라서 "진화의 법칙을 방해한다."
2. 그리스도는 왜 죽으셨는가?
- 유대 지도자들은 율법을 존중하지 않는 예수님의 태도에, 또한 그분의 도발적인 선언에 몹시 분노했다. 한편 로마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유대인의 왕으로 선언하고, 따라서 가이사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혁명적인 사상가요 설교가로 비쳤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혁명적인 행동가로 간주하기도 했다.
# 로마 군병들과 빌라도
- 예수님의 죽음의 직접적인 책임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선고를 집행한 로마 군인들에게 돌려져야 한다.
-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한 언도를 피하고자 했으며(그는 예수님이 무죄라고 믿었다), 동시에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하는 행동도 피하고자 했다.(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유죄를 믿었으므로). 그는 네 가지 도피 수단을 시도했다.
(1)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며 따라서 헤롯의 사법 권할하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결정의 책임을 헤롯에게 미루기 위하여 그 사건의 재판을 넘겨주었다. 하지만 헤롯은 형을 선고하지 않은 채로 예수님을 돌려 보냈다.
(2) 미봉책을 시도했다. "때려서 놓겠노라"(눅23:16,22).....하지만 이 것은 야비한 짓이다. 예수님이 무죄라면 그분에게 채찍질을 하지 말고 즉시 석방해야 했기 때문이다.
(3) 잘못된 이유로 (군중이 예수님의 석방을 택한다면) 옳은 일(예수님을 석방하는)을 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유월절에 죄수 하나를 특별 사면해 주는 총독의 전례를 기억해 내고서, 백성이 예수님의 사면을 요구하기를 바랐다.
(4) 예수님의 결백함을 옹호하고자 노력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마 27:24) 그러고 나서 손이 채 마르기도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받도록 넘겨주었다.
- 빌라도를 정죄하면서, 그와 똑같이 도리에 어긋난 우리 자신의 행동은 간과하기 쉽다. 그리스도께 전심으로 헌신했을 때 오는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 역시 편리한 핑계를 찾는다. 다른 사람에게 결단을 맡기기도 하고, 마지못해 타협하는 쪽을 택하기도 하며, 혹은 잘못된 이유에서 예수님을 칭송하려고 하며, 심지어 공적으로는 충성을 단언하면서도 동시에 마음속으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한다.
-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였지만, 또한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였다. 그리고 군중이 이겼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는 군중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이 말이 결말을 짓고 말았다. 이것은 명예와 야망 사이, 원칙과 편의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의 기로엿다. 그는 그 때 이미 두세 가지 사건으로 디베료 가이사와 불편한 관계였다. 따라서 그는 또 다른 불편한 일을 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유대 백성과 제사장들
- 비롯 빌라도를 무죄로 선언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가 진퇴 유곡에 빠져 있었음을 분명히 인정해야 하며, 그를 그곳에서 꼼짝 못하게 만든 것이 유대 지도자들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님이 직접 빌라도에게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고 말씀하셨다)
- 제사장들이 예수님에 대해 품은 적의의 근본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정치적 안정과 교리적 진리와 도덕적 순결을 염려했다는 것이 전적인 이유였을까? 빌라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잡히신 것은 그들이 내세운 이유, 특히 황제에 대한 그들의 가장된 충성심 때문이 아니었다. 스웨터H.B Swete가 말했듯이 "그는 그들이 숨기고 있는 질투라는 천박한 악덕을 간파했다." 마태의 발을 빌리면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거만하지 않은 사람은 타인을 질투하지 않는다. 그런데 유대 지도자들은 교만했다. 그들은 종족적으로, 국가적으로,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교만했다.....예수님과의 경쟁은 본질적으로 권위의 투쟁이었다.
# 배반자 가롯 유다
- "만약 예수가 죽어야 했다면,결국 누군가가 그를 팔아야 했다. 유다는 단지 섭리의 도구였으며, 예정의 희생자였을 뿐이다.".....유다가 그 일을 실행한 것은 사탄이 먼저 그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넣어" 주고 나서 그 뒤에 실제로 "그 속에 들어간"다음인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유다의 죄를 사면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이전에 어느 때엔가 음모를 세운 것이 분명하므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의 배반이 성경에 예언되었다고 해서 그를 자유로운 행위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구약에 예언되어 있다고 해서 그 죽음이 자발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누가는 뒤에 그의 '불의'에 관하여 언급하였다.(행 1:18). 사탄의 영향력이 아무라 강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스스로 그 영향력에 자기를 개방한 때가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유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유다에게 있다고 간주하신 것이 명백하다. 왜냐하면, 다락방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은 접시에서 떡 한 조각을 찍어서 그에게 주심으로써 최후의 호소를 하셨기 때문이다.
- 어떤 사람들은 유다는 유대인 열심당원으로서, 예수님과 그 추종자들에게 가담하면서 그들의 운동이 민족 해방운동이라고 믿었으며, 그가 마침내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정치적인 망상 때문이었든지, 아니면 예수님으로 하여금 일어나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확신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 상황을 재구성하려는 사람들은 '가룟 Iscariot' 이라는 그의 이름에서 확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가룟이라는 이름은 '가룟인 man of Kerioh' 이라는 의미로서 그의 출신지를 표시한다는 것이다. - 그리욧 Kerioth은 여호수아 15:25에 언급된, 유다 남방의 한 마을 이름이다.
광적인 유대 민족주의에 열중한 그들은 로마의 식민 지배로부터 국가의 독립을 회복해야겠다고 결심하고서, 그들이 로마의 앞잡이로 여기고 멸실하는 정치적 숙적들을 암살하는 일도 불사했다.
- 또 다른 주석가들은 이런 재구성의 근거가 너무나 빈약하다고 보고 유다의 결함을 정치적인 동기보다는 도덕적인 잘못, 즉 요한 복음 기자가 말하는 탐욕에 돌린다. 요한의 말에 따르면, 유다는 사도단의 "돈궤를 맡은 자"로서 공동의 금전을 맡아서 책임졌다.....유다는 무책임한 낭비라고 여긴 마리아의 행동 (예수님꼐 향유를 붓는)을 목격하고 그것을 비난한 후에 그는, 손실의 얼마를 벌충하려고 곧장 제사장들에게 간 듯하다.....요한의 주장에 의하면 유다를 지배한 최후의 동기는 돈에 대한 욕심이었다. 일년 치 급료에 해당하는 돈을 허비한 것에 심히 분노한 그는, 그 금액의 겨우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액수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
# 그들의 죄악과 우리의 죄악
- 우리는 지금까지,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한 주요 책임자로 제시한 세 사람 - 빌라도, 가야바 그리고 유다 - 을 주목했다.....처음에 유다가 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겨주었다(탐욕), 다음에는 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넘겨주었다(시기), 그런 연후에 빌라도가 군병들에게 예수를 넘겨주었고(비겁함)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 만약 우리가 그들의 위치에 있었다면 우리 역시 그들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했다. 왜냐함ㄴ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등을 돌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유다처럼 우리의 탐욕을 위하여, 제사장들처럼 우리의 시기를 인하여, 빌라도처럼 우리의 야망을 위하여 예수님을 희생시킨다.
- "누가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주었는가? 돈을 위하여 유다가 넘겨준 것이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빌라도가 넘겨준 것도 아니다. 시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넘겨준 것도 아니다. 바로 사랑 때문에 성부께서 넘겨주신 것이다." -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
- 인간의 차원에서 보면 유다가 예수님을 제사장에게 넘겨주었고, 제사장은 그분을 다시 빌라도에게 넘겨주었고, 빌라도는 그분을 군병들에게 넘겨주어서 군병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차원에서 보면, 성부께서 예수님을 내주셨고, 예수님도 자기 자신을 내주어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 예수 그리스도는 왜 죽으셨는가? 나의 첫 번째 대답은 , 그분은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죽음을 당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과 정반대인 또 하나의 답을 제공해서, 해답에 균형을 맞춰야겠다. 예수님은 죽음을 당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자신을 내주심으로써 죽으신 것이다.
3. 심층적 진리
-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어떤 중요성이 있기에, 그 끔찍함과 수치와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미리 계획하시고 예수님은 그것을 당하기 위해 오셨을까?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2)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자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3)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 우리의 죄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은사를 받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4)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신 것이다.
: 그분의 죽음과 우리의 죄가 연결된다면, 그 연결은 단순한 결과적인 연결(그분이 우리의 잔인성의 제물이었다는)뿐만 아니라, 형벌의 연결(그분이 무죄한 인격으로서, 우리의 죄가 받아야 할 형벌을 담당하셨다는)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죽음은 죄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죄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성경은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의 죽음을 자연적인 사건이아니라 형벌의 사건으로 본다. 죽음은 하나님의 선한 세계에 칩입한 이질적인 요소이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원래 의도의 일부가 아니다.
# 다락방 최후의 만찬
- 주의 만찬은 하나님의 선물과 인간의 수락에 관한, 영구적으로 가시적인 상징으로 남아 있다.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으로 의도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다락방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분이 자신과 자신의 사명에 관하여 가지신 생각의 중심을 차지했으며, 그 분은 우리에게도 그것이 중심이 되기를 원하셨다.
2) 그리스도는 새 언약을 세우기 위해, 또한새 언약이 약속한 사죄를 조달하기 위해 죽으셨다.
3) 이 죽음의 혜택들(언약과 사죄)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개인적으로 그것을 전유해야 한다.
- 다락방 사건과 주의 만찬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들이 유월절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구약 성경의 희생 제사라는 견지에서 이해하셨음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
- 예수님은 이 시련을 가리켜서 쓴 '잔' 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가능하면 이 잔을 마시지 않을 수 있도록 그것이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면 이 잔은 무엇일까?......예수님은 공생에 전체를 통하여 불굴의 용기를 보여 주셨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 그 분이 고통이나 모욕이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추측하는 것은 나에게 바보 같은 일로 보인다.
플라톤의 설명에 의하면, 아테네의 감방에서 소크라테스는 "떨지도 않고 안색이나 표정 하나 바꾸지않고" 독약이 든 잔을 받았다. 그 잔을 입술로 가져가, 매우 즐겁고도 담담하게 그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마셨다." 친구들이 눈물을 흘리자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부조리한" 행동을 나무랐으며, "평온을 유지하며 용감하라."고 그들을 격려했다. 그는 아무런 두려움이나, 슬픔이나 저항없이 죽어갔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모욕을 당하고 핍박과 중상을 당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정작 본인은 자기가 가르치신 것을 실행하지 못하신 것인가? 사도들은 그 분이 가르치신 대로 했다....그들은 실제로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 고통과 버림당함은 그들에게 기쁨과 특권이었지, 무서워서 피해야 할 시련이 아니었다.
사도 이후의 시대에는,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와 연합되려는 간절한 염원이 있었다. (이그나티우스, 폴리갑, 알반, 사두 선다 싱 등)
- 그분이 피하셨던 잔은 그 성격이 달랐다. 그 잔은 매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육체적인 고통을 상징하지 않으며, 또한 자기 백성에게까지 멸시와 버림을 받아야 한다는 정신적 고통을 상징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것은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진다는 영적인 고뇌, 달리 말하자면 그 죄 위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견뎌야 한다는 영적인 고통이다.
- 예수님은 자기 앞에 놓인 잔이, 악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술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과, 따라서 그 잔은 몸(비틀거리게 함)과 마음(혼란시킴)을 완전히 빗나가게 해서 술 취한 상태로 만든다는 사실을 아셨다....예수님의 무죄한 영혼은 이렇게 인간의 죄에 접촉하는 것을 회피하고자 멈칫거렸던 것이다. 죄에 대한 심판이 가져다줄, 아버지로부터 소외되는 경험에 대하여 그분은 두려움을 느끼고 뒤로 물러나셨다.
- 동산에서의 고뇌는 십자가 위에서의 더 큰 고뇌로 통하는 창문을 연다. 만약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예상하기만 해도 그렇게 끔찍했다면, 그 실제는 어떠하겠는가?
# 십자가 위에서의 유기의 외침
-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하실 때는 한밤에 밝음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실 때는 한낮에 어둠이 있었다" - 더글라스 웹스터 -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나를 버리셨나이까"
- 암흑 속에서 예수님은 완전히 혼자가 되셨으며,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다. 칼뱅이 말했듯이, "만약 그리스도께서 육신만 죽으셨다면, 그 죽음은 유효하지 못했을 것이다...만약 그 분의영혼이 그 형벌을 함께 받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육신의 구속자밖에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분은 정죄받고 버림받은 인간의 무서운 고통을 그의 영혼으로까지 담당하심으로써 더 크고 엄청난 값을 치르신다" 이와 같이 실제적이고도 무서운 분리가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 분리는 성부와 성자가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그 분리는 우리의 죄와 거기에 해당하는 공평한 보응으로 말미암았다......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셨다는 사실이,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세상을 자기에게 화목케 하셨다"와 같은동일하게 성경적인 단언과 균형을 이뤄야 함을 우리가 이미 주장했지만, 이 분리에 대한 신학적 반론과 문제들에 대해서는 뒤에 생각하게 될것이다. 크랜필드는, 예수님이 "단순한 느낌뿐만 아니라 실제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진리와, "이런 하나님의 버리심은 전적으로 참된 것이지만, 동시에 복되신 삼위 하나님 연합은 그 때도 깨어진 것이 아니라는 역설"을 모두 강조하는데, 이것은 옳다.
- 유기의 외침 직후의 예수님의 말씀
1) 내가 목마르다 : 그 분의 큰 영적 고통이 육체에까지 나타난 것,
2) 다 이루었다 : 테텔레스타이 tetelestai, 완료 시제이므로 "이미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영원히 이루어진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3)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죽기 직전에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그 업적에 주목한다. 이것은 잔인하게 사형을 집행한 사람들에 의해 완성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다 이룬 자는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 분은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다. 의도적으로, 자유로이 그리고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 대신 심판을 당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구원을 마련하셨으며,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새 언약을 세우셨으며, 중심적인 언약의 축복 곧 죄 용서를 받을 수 있게 하셨다.
- 결론적으로 십자가는 세 가지 진리를 강하게 보여 준다.
1) 우리의 죄는 너무나 끔찍한 것임에 분명하다.
만약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직접 우리의 불의를 담당하지 않고는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의 불의를 의로운 방식으로 용서하실 다른 방법이 없을 정도라면, 우리의 불의는 실로 심각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 사실을 이해할 때만, 우리는 자기 의와 자기 만족을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구세주로 여기고 의지할 수 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할 만큼 놀라운 것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의 운명속에 그대로 내버려두실 수도 있었다....하나님은 십자가의 살벌한 고통에까지 우리를 찾아나서신다....이와 같은 사랑에도 감동하지 않는다면, 그의 마음은 굳은 바위와 같다. 하나님의 행동은 사랑 이상의 그 무엇이다. 그것을 표시하는 바른 명칭은 '은혜'인데, 이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에게 베푸는 사랑이다.
3) 그리스도의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선물임이 분명하다.
그분은 자기 자신이 생명의 피라는 높은 값을 치르고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사셨다. 우리가 치러야 할것이 무엇이 남아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그분이 선언하셨으므로 우리가 담당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는 죄를 짓고서도 언제나 하나님의 사죄에 의지할 수 있다는 죄 허가증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도리어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근거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동시에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가장 강력한 자극이 된다.
제2부 십자가의 핵심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없애지 않으면서 그분의 거룩을 표현하시며, 우리의 죄를 묵과하지 않으면서 그분의 사랑을 표현하실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동시에 자신을 만족시키실 수 있는가? 이 시점에서 우리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셨다는 것이다.
4. 사죄의 문제
-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는 유일한 근거라는, 복음서에 의거한 우리의 주장은 특별히 많은 사람을 당혹케 한다. 그들은 "왜 우리의 사죄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지해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 "왜 하나님은 십자가 없이, 우리를 그냥 용서하시지 않는가?"
1) 만약 우리가 서로 용서하듯이 하나님도 그렇게 단순하게우리를 용서하실 수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죄의 심각성을 심사 숙고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 11세기 말의 대주교 안셀무스-
2) 당신은 아직 하나님의 위엄을 깊이 생각한 적이 없다.
- 하나님과 인간 혹은 거룩과 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삐뚤어져 있을 때는 속죄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당연히 삐뚤어지게 된다.
중요한 점은, 우리 인간의 용서와 하나님의 용서 사이에는 결코 유사성이 없다는 것이다....."우리가 서로 무조건적으로 용서하므로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와 같이 하셔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궤변을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천단함을 노출하는 것이다....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초보적인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제기해야 할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즉, 왜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는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시는가가 아니라,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은 그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 사죄의 문제는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인간의 반항, 하나님의 본성과 우리의 본성 사이의 필연적인 충돌에 의하여 야기된다. 우리의 죄와 죄책만이 사죄의 장애가 아니다. 죄책을 짊어진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의 대응 또한 장애물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신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 사랑이 '거룩한 사랑'이라는 사실, 즉 죄인들을 동정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죄를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그런 사랑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실 수 있었는가? 즉 그분의 거룩함을 죄와 타협하지 않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사랑, 자기의 사랑을 좌절시키지 않으면서도 죄인들을 심판하는 거룩함을 어떻게 표현하실 수 있었는가? 인간의 악에 직면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거룩한 사랑으로서의 자신에게 충실하실 수 있었는가? 이사야의 말대로, 어떻게 하나님은 동시에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 되실 수 있었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행동을 취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의로움 이라는 단어와 구원 이라는 단어는 결코 단순한 동의어로 취급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분의 주도적 구원의 행동은 그분의 의로움과 어울리는 것이었으며, 또한 그 의로움의 표현이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그 거룩한 사랑 속에서 우리의 불순종에 대한 완전한 대가를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불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을 수 없는 사죄를 베풀기 위하여, 우리가 받아 마땅한 심판을 자신이 당하셨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동일하게 표현되었으며, 영원히 화해를 이루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만족되었다.'
- 많은 사람이 십자가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잘못된 대답을 제시하고, 심지어는 애당초 잘못된 질문을 제시하는 이유는, 그들이 죄의 심각성이나 하나님의 위엄을 세심하게 심사숙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죄의 심각성
-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죄의 사악한 자기 중심성이다. 모든 죄는 예수님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부르신 그것을 어기는 것인데, 이는 단지 우리의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창조주요 주님으로 인정하고 순종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거부함으로써 그 계명을 범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피조성 속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위존적 위치를 거절하고, 도리어 독립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죄는 도전, 교만,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하나님께 대하여 인간은 독립적이라는 주장...자율적인 이성, 도덕 그리고 문화의 구성체다" -에밀 브루너-
- 현대 사회에서 죄가 사라진 이유를 조사하면서 메닝거 박사는 첫째로 "이전의 많은 죄sin가 범죄crimes로 바뀌었으며", 그리하여 그것을 다루는 책임이 교회에서 국가로, 성직자에서 경관에게로 넘어갔고, 한편 다른 죄들은 질병으로 혹은 적어도 질병의 징후로 바뀜으로써, 이 경우에는 형벌이 치료로 대치되었음을 주목한다. "집단의 무책임성"이라고 불리는 세 번째의 편리한 장치에 의하여 우리는 자신의 이상 행동에 대한 책임을 우리 자신이 아니라 사회전체 혹은 사회 내의 많은 집단 중의 하나에게 전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메닝거 박사는 계속해서 '죄'라는 단어를 우리의 어휘에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그 말이 표현하는 실체를 인정하라고 당부한다.
# 인간의 도덕적 책임
- 우리는 분명히 유전자와 성장 배경의 지배를 받는다.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인간을 단순한 컴퓨터 혹은 동물이라고 선언하는 환원주의에 저항한다....양자 택일 상황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있음을 안다.
- 우리는 유전자에 따라서, 환경 혹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자동 기계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자신을 위해 창조하신 인격적인 존재다...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정체된 자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성격은 더욱 세련될 수 있다. 우리의 행동은 변할 수 있다....실로 우리는 다르게 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 말콤 지브스, 샘 배리, 데이비드 앗킨스 -
- 원죄의 교리는 우리가 물려받은 본성 자체가 자기 중심성으로 인해 오염되고 뒤틀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하나님이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또한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신다. 그분이 우리를 향하여 인내하시고, 화내기를 더디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시는".....하나님의 메시아도 연약한 자들에게 온유하셔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
- 우리의 책임이 감소된다는 성경의 인정이 우리의 책임이 없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변함없이 우리를 도덕적인 책임을 지는 행위자로 취급한다. 성경은 "생명과 선, 죽음과 악" 사이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필요성을 우리에게 맡긴다.
- 인간은 자기 창조주에게 응답하며, 또한 그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생각하고 의지하는 존재"로, "신성한 자존자에 의하여 피조된, 그의 대응자Counterpart 로 이해되어야 한다.
- 타락이 인간의 책임을 심각하게 약화시키지 않았는가? 지금도 여전히 인간은 자기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그렇다.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인간은 순전히 연약하기 때문에만 죄를 짓지는 않는다.실제로는 그가 연약함 속에늘 '자기를 방임하는' 것이다. 가장 우매한 죄인에게도 일말의 결정 능력은 여전히 있으며 "실로 하나님을 향한 방자한 반항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근거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참된 죄책과 거짓된 죄책
- "기독교는 병을 필요로 한다...구원 절차에서 교회의 전체 체계의 감춰진 진짜 목적은 병을 일으키려는 것이다...사람은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병드는 것이다." - 니체 -
니체는 기독교를 죄의 병에 대한 치료약이라고 한 점에서 부분적으로 옳았다. 결국 예수님도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아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세리와 죄인들'에게 힘을 쏟는 것을 변호하셨다. 하지만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병들게 '만드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는 말에 우리는 강하게 반대한다.
- 탕자는 '자기 아버지게로 올' 수 있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 돌아와야'(즉 그의 자기 중심성을 시인해야) 했다. 화해의 기쁨 이전에 회개의 겸손함이 필요하다. 만약 탕자가 돌아오지 않고 먼 나라에 그냥 머물러 있었거나 혹은 돌아왔더라도 회개하지 않은 상태로 돌아왔다면, 반지도, 새 옷도, 입맞춤도, 잔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죄이식은, 그것이 우리를 집으로 돌아오게 해줄 때만 커다란 축복이다.
-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피상적인 치료는 언제나 오진 때문이다. 그런 처방을 내리는 사람들은, 죄의 심각성을 부인하는 현대의 속이는 정신의 제물이 된다.....율법은, 우리를 정죄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좋은 선물이다. 이것은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보내어서 거기서 칭의를 얻도록 하기 때문이다.
- 오늘날 세계에서 죄의 핵심적인 형태는 무감각이다...아담과 하와에게 무감각이란 뱀으로 하여금 자기들이 할 일에 대해서 말하도록 방치한 것이다. 그것은...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일을 포기함을 의미한다"..선택은 인간됨의 본질에 속한다. 단순히 하나님이 되려고 시도하는 것만이 죄가 아니라 우리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얼버무림으로써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도 죄다." "어떤 뱀도 우리에게 우리가 할 일을 지시하지 못하게 하라." 나치 전범들이 가장 자주 내세우는 변명은, 단지 명령만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정은 언제나 동일하게 그 책임을 그들에게 물었다.
-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책임이 어느 정도 감소된 사실 - 어떤 환경에서는 - 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책임의 감소는 언제나 인간성의 감소를 수반함을 강조한다.
- C.S 루이스는,유명한 에세이 "인도주의 형벌론"에서 형벌은 정당한 응보라는 개념을 포기하고 그대신에 형벌을 그 범죄자를 위하고(범죄자의 변화) 사회 전체를 위한(범죄의 방지) 인도주의적 배려라는 개념으로 대치하려는 현대의 경향에 개탄한다....우리가 범죄자의 마땅히 받아야 할 응보가 무엇인지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무엇이 그를 치료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이 그와 같은 짓을 못하도록 막을까 하는 것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교묘하게 그 범죄자를 정의의 영역에서 완전히 추방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그를 권리에 종속되는 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단순히 대상, 환자, 한 '사례'로 대하는 것이다" 라고 그는 말한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의지에 거스려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 또한 우리가 질병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상태에 대하여 그가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그가 아직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하지 않았거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의 수준으로 취급되며, 유아,저능아,가축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형벌이 아무리 엄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응당 그것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와, '우리가 더 잘 알았어야 한다' 는 이유로그 형벌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으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거룩과 진노
- 그분의 눈은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우리와 그분을 분리시켜서 그분의 얼굴이 우리에게 감추어지게 하며, 따라서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기를 거부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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