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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마틴 로이드 존스] 성령 하나님과 놀라운 구원 (교리 강좌 시리즈 2)



성령 하나님과 놀라운 구원

저자
마틴 로이드 존스 지음
출판사
부흥과개혁사 | 2007-06-15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20세기 최고의 강해설교자를 통해 위대한 기독교 교리 시리즈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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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성령의 인격


기독교 교리를 연구하는 것만큼, 성경의 독특하고 신적인 영감을 놀랍게 증거해 주는 것은 없다. 교리 연구를 통해 성경이 하나의 책이며, 다양한 환경에 처한 여러 저자에 의해 오랜 시간에 걸쳐 기록되었지만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메시지에는 놀라운 일관성이 있어서 한 가지 주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다. 인류가 타락한 순간부터 하나님은 구원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하셨으며,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을 단계별로 보여준다.


1) 성령에 대한 교ㅁ리

- 성령이 구원의 적용자,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구원,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수행하신 그 위대한 구원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고 우리 안에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실행자다.


2) 성령의 인격성

첫째 : 성령과 관련해서 인칭대명사가 사용 되었음

둘째 : 성령이 성부 및 성자와 동일시된다는 사실

셋째 : 성령이 그리스도인들과 연결됨으로써 인격성을 보여 준다

넷째 : 성경이 지식,의지,주권,마음,사랑,근심 등 인격적 속성들이 성령께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2장. 성령의 신성

1) 성령의 인격성 (계속)

다섯째 : 인격적 존재만이 행할 수 있는 행동들을 성령이 행하셨다

여섯째 : 성령에 맡겨진 직무 자체가 인격적인 직무. 성령은 보혜싸comforter라고 묘사된다. 보혜사란 우리의 옆에서서 도와 주는 분을 말한다. 동일하게 단어가 때로는 대언자advocate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나는 너희를 아무 위로 없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또다른 보혜사를 보낼 것이다.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고아처럼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우리 주님 대신 오신 분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지도하고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일곱뻔째: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령은 인격적 대우에 민감하시다.

(성령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음, 성령을 모독할 수 없음, 성령을 욕되게 할 수 있음, 성령을 근심하게 ㅏㅎㄹ 수 있음)


2) 성령의 신성


-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그러나 성경은 그 신성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가르친다. 성부 하나님은 온전히 하나님이십니다. 성자 하나님도 온전히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 역시 온전히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이해하려 애쓰지 마십시오. 아무도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성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우리는 단지 성경으로 나아와 엎드려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할 뿐, 아무도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갖가지 예화들과 유추들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그 중 어떤 것도 적절하거나 완벽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문제에 대해 가장 지혜로운 처신은 그 분명한 진술을 인정하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지만 그 복되신 신성 안에는 세 위격이 존재하며, 이 세 위격은 동등하시고 영원히 공존하신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 우리 주님은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성령이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와 마찬가지로 할 말을 받아 말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복종입니다. 이것이 사역의 분담입니다. 성자는 자신이 성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하며, 성령의 사역은 성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상대의 영광을 반영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복되신 삼위일체라는 이 놀라운 교리의 신비를 엿보게 됩니다.


- 성령은 언제나 성자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우리가 성령을 받았는지 시험해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성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알고 있는지 자문해 보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에게 성자는 실제입니까?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 보이지 않는 신성의 충만과 보이는 신성의 충만, 그리고 우리에게 즉시, 또한 직접적으로 작용하시는 신성의 충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이 그의 능력으로 아들의 형상 가운데 아버지를 나타내 보이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나에게 조금이라도 소망이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성자 안에 있습니다. 그분은 눈에 보이는 분이 되셨으며, 성령을 통해 나에게 실제가 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성부께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성자 하나님은 계시된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나에게 직접적으로 힘을 행사하시는 분입니다.


3. 성령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

- 우리는 하나님이 정말로 오셨다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충만이 거하신다는 것을,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그 죄를 지워 없애셨으며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다는 것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우며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압니까? 제가 이 사실들을 아는 것은 삼위의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께서 제 안에 거하시고, 조명하시며, 깨닫게 하시고, 기름부으시기 때문에 가능 합니다.



3장. 창조와 일반 은총


1) 오순절 날 이전의 성령의 역사

-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피조물로부터 자기 자신이나 자기 영의 능력을 거두신다면 모든 피조물은 쇠하고, 기울어지고, 소멸되어 죽는다고 말합니다. 창조를 유지하는 것은 성령이십니다.


- 소위 일반은총을 책임지고 있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2) 일반 은총


- 우리는 오순절 날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중대한 문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순절은 전환점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처음에는 모든 것이 성령은 아직 오지 않으셨고 이제 오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시 살펴 보면 성령이 이미 세상에서 일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4장. 오순절의 의의


- 성령의 역사의 세 측면 (성령이 창조에 관여 / 우주를 유지 / 일반 은총의 역사)


1) 오순절 날 이전의 성령의 역사

- 성경에는 성령이 특정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사들을 나누어 주신다는 명백한 가르침이 나온다. (삼손,

모세,  성막을 세우고 설비하는 일에 특별한 능력을 가진 브살렐, 여호수아)


- 예언의 은사 전체


- 시편 51:11에서 다윗은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라고 말한다. 다윗은 오순절 이전, 구약 세대의 사람이었다....구약의 성도들은 신자들이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었지만, 성령이 없이는 신자도, 백성도 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 우리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문들이 모두 닫혀있었지만 갑자기 주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고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이것이 증거입니다. 지금까지의 증거들은 모두 오순절 날이 아직 이르지 않았고,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주님도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으며,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떄까지 이 성에 머물라"


2)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미


- 첫째 :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 성령의 사역과 작용 전체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둘째 :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 때 인용한 요엘서 2장의 예언은 '부어지다' 라는 단어를 강조함,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 범위. 성령이 보다 광범위하게 부어지리라는 것. 또한 모든 부류의 사람에게 부어지리라는 사실도 강조. "너희의 자녀들...너희의 젊은이들...너희의 늙은이들...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구약에서 성령이 주어지는 것은 비범한 일이었으며, 성령이 임하신 사람들은 아주 뛰어난 인물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일반성이다.


- 오순절에 일어난 일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로 결합된 것.


-"왜 사마리아와 에베소에서는 이런 식으로 성령이 주어졌는가? 이 두 집단과 고넬료 및 그의 집안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고넬료와 그의 집안 사람들은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은 사실상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구도자들이었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사마리아인들. 그들은 어떤 의미론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니었다. 그들은 모세오경외에 다른 구약 성경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들과 동등하다고 생각했다.


빌립이 설교할 때는 성령이 사마리아인들에게 임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성령을 주기 위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수뇌부로부터 사절이 파견되어야 한다. 왜 그랬을까? 분명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충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완전하고 충만한 구약 믿음의 논리적 귀추이며 결과였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의 종교가 불완전하다는 것과, 기독교 교회가 구약에 나타난 교회인 유대 교회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인식해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방법에는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구약의 가르침 전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말하자면 갑자기 신약으로 뛰어들거나 다른 길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로 끼어들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길이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이 모든 가르침과 첫째로는 유대인의 교회였던-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예루살렘 교회에 복종해야 했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인정하고 복종해야 했으며, 그러고 나서야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


- 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인들도 나름 문제 없는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요한의 제자들이었고 요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복음에 대해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사라들의 경우도 역시 그 점을 분명하게 하고 바로 잡아야만 했다. 고넬료와 같은 이방인들의 경우에는 바로잡아야 할 오류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설교할 때 성령이 오신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경우들에는 불완전한 종교, 불충분한 이해가 있었다. 성령의 선물을 받기에 앞서 그 부분을 바로 잡아야 했다. ...고넬료와 그의 가족의 경우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들어와 세례받고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위대한 일을 나타내실 뿐이었다. 다른 두 경우에는 진리를 명확하게 믿고 편견과 잘못된 개념을 제거하는 일이 필요했다.


- 오순절의 큰 목적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의 구주시라는 사실에 대한 최종적 증거를 주는 것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둘째는 그리스도인 몸의 교회가 시작되는 것, 셋째는 교회에 더하여진 여러 민족이 이 몸의 지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주는 것.


- 오순절 날 급하고 강한 바람과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나타난 것은 성령충만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한 몸으로 연합되는 것과 교회의 시작을 강조하는 것, 특별한 현상이 일어난 이유는 이것.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은 반복해서 나타나지 않는다. 다른 경우에 벽이 진동한 일은 있었지만 이런 특별한 소리, 이 소음, 특별한 현상의 나타남은 오순절 날 일어난 사건에 그 이후에는 결코 반복된 바 없는 독특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 일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일어난 일이기에 반복될 필요가 없었다. 성령 충만은 반복될 수 있고 또 종종 반복되지만, 오순절 날 일어난 일은 우리 주님이 자기 백성을 위한 사역을 마치고 부활하사 교회의 머리가 되셨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5장.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


1) 주님 자신에 대한 성령의 사역


2) 성령의 일반적 사역

- 성령은 자신에 대해 가르치거나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시키거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시지 않는다. 성령은 언제나 우리를 주님께 집중시키며,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사역 전체의 특징이다.


-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확증하신 분에게만 그분의 몸인 그분의 백성, 곧 교회를 위해 성령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순절 날 성령이 오신 것 자체가 의의 길은 오직 하나이며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율법에 의해 스스로의 의를 확증할 수 없다. 도덕적 노력에 의해 그 의를 확증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강이며 하나님이 정하신 의의 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는 하나님 자신의 아들의 의이다.


- 우리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사탄이 유대인들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종으로 삼고 있엇다. 그들은 모두 이교도엿다.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 유대인만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하신 일과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신 것으로 인해 상황이 달라졌다. 그리스도가 전파되었고, 하늘 아래 모든 나라에 그를 믿는 신자들이 존재한다. 


- 강경 칼빈주의자란 구원은 오직 구속받은 사람들에게만 제시되어야 하고, 어떤 복음 전도자도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구원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지금 런던에는 제가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구원을 제시한다는 이유로 저를 위험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라고 말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 우리 주님은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어떤 사람들을 초청을 받았지만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복음이 그것을 거부할 사람들에게도 선포될 것임을 아십니다. 이 사실은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 성령이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시는 일

첫째 :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계시

둘재 : 회개케 하신다.

셋째 :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부르신다.



6장. 구속에서의 성령의 사역


1) 성령의 일반적 사역게 대한 보충 사항


2) 외적 부르심에 대한 상반된 반응

-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은니라' 회중이 앉아 복음을 들었을 때 어떤 사람은 그로 인해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받지 못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일반적 부르심이 주어졌지만 그 반응은 달랐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해결책이 제시되었습니다.


- 펠라기우스주의적 해답 : 영국에서 자란 사람, 펠라기우스의 가르침은 원죄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종의 중립적 상태에서 태어나 살아가며, 모든 사람은 완벽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선이나 악을 선택할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거나 거부할 능력이 있다는 견해.성령은 사람 안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성령이 하신 유일한 일은 사람을 사용해 성경을 만들어 낸 일이며, 그 후에는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 반펠라기우스주의자 : 성령은 사람들을 도우시지만 사랑은 사람들 자신에게서 생겨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소망하고 진리를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성령이 그들에게 오셔서 도운다. 사람들 스스로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고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이 이런 소망을 나타내면 성령이 도우실 것이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가 진리와 구원의 지식에 이르도록 협력하여 은혜로 도우시는 것 뿐이다.


- 아르미니우스주의 : 17세기 초 네덜란드 사람인 아르미니우스에게서 비롯됨. 그의 위대한 제자 중 한 사람인 존 웨슬리와 마찬가지로, 아르미니우스는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어서 성령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받아들여 믿을 수 있도록 충분한 분량의 은혜를 주신다고 가르침. "믿을 수 있는 능력은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지만, 일부의 사람만 그 능력을 사용하기로 선택하고 나머지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사람이 먼저 소망하면 성령이 와 그를 돕는다고 말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적 견해는 사람은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고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전적으로 부패했지만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모든 사람에게 소망하고,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성령과 협력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 루터파: 루터파의 견해 역시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허물과 죄로 죽었기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중생의 초기 단계에서 은혜 역시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구워너받고 어떤 사람들은 멸망하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는 것에 저항할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사람이 협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루터파는 능동적으로 협력할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거부할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 개혁주의적 견해 : 영국 국교회의 39개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 네덜란드 혹은 벨기에 신앙 고백들과 같은 유럽 교회들의 위대한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고백에서 가르치는 견해.

이 견해 역시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완전히 무력하고 무능력하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한 사람은 구원받고 다른 사람은 멸망하나?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특별한 사역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구원받지 않는 사람들 안에서는 행하시지 않는 일을 구원받는 사람들 안에서는 행하신다고 말한다. 이 견해는 선행적 은혜, 즉 사전에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여 그들이 믿도록 하는 은혜에 대해 말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다른 모든 일에 앞서는 중생의 절대적 필요성의 교리를 말한다.


-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고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고전적인 시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중 어떤 이론을 신봉하고 수호할 것인지는 타락시에 인류에게 일어난 일과 그 타락의 결과로 죄 가운데 있는 인류의 상태에 대해 우리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교리들을 다루었을 때, 저는 개혁주의적 견해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이 교리를 다룰 때에는 우리 이성의 한계를 자각하고 열린 마음으로 성경에 다가가며 우리 자신의 개념이나 철학에 너무 이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습니다.....다행히도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이해함으로써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고 있을 것이 분명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도, 루터파도 있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과정에 대해 잘못된 생각과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워너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해 여부로 구원 받는다면, 더 지적이고 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더 유리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이해하려고 소원해야 합니다.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고, 구원의 길 혹은 과정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믿음을 강화시켜 주고, 확신을 세워주며, 앞으로 주어질 복된 소망의 확실성을 알게 해 주는 것은 없었습니다.


- 저의 결론은 성령이 멸망한 채 남을 사람들 안에서는 행하시지 않는 특별한 사역을 구원받을 사람들 안에서 행하신다는 것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3) 구원의 순서


- '구원받을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행해지는 특별한 사역이 있다면 어떤 순서에 따라 이 사역을 행하시는가?'


- 몇 가지 가능한 순서를 제시해 보겠씁니다. 저는 그 가운데 하나를 고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첫 번째이자 근본적인 문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며,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구원받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 때문에 칭의를 그 다음에 놓고, 또 그 때문에 중생이 뒤를 잇습니다. 그로부터 믿음이 도출되며, 거기에서 양자 됨이 나옵니다.다음에는 회심을 놓을 수 있는데 여기에는 회개와 돌이킴, 그리고 믿음이 포함됩니다. 다음은 성화, 그리고 그 다음은 견인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 칭의 -> 중생 -> 믿음의 도출 --> 양자됨 --> 회심(회개,돌이킴,믿음)->성화->견인


- 반면에 순전히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배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의 자각, 회심, 믿음, 칭의, 중생, 양자 됨, 성화, 영합과 견인, 제가 위의 세 가지를 주된 분류법으로 제시했지만, 여러분은 각각의 항목의 위치를 거의 무한정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대단히 유용한 영적 훈련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지나치게 연대적 사고를 하는 것음 위험함, 시간적 요소의 강조에 따른 오류 (요소들이 엄격하고 기계적인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어져야 한다고 보는)


- 저는 오늘밤에 제가 다룬 모든 내용을 여러분께 말씀드릴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상당히 고민했습니다. 저의 이런 생각을 아내에게 말했더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 모든 내용을 말한다면 사람들은 혼란에 빠질거예요. 그건 어려워요. 신비라고요."



7장. 효력있는 부르심


1) 효력 있는 부르심


- '제자'라고 묘사된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도 두 집단으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떠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스도가 다른 집단을 향해 "너희도 가려느냐?" 물으시자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슴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라고 대답했습니다. 한 집단은 믿지 않고 집으로 갔으며, 똑같은 말을 들은 다른 집단은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러 있으면서 더 많은 것을 듣고 싶어했고, 그것을 즐거워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차이가 생길까요? 그 말씀이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유효했으나 그것을 거부한 구워너받지 못한 자들의 경우에는 유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부르심 외에도 이런 효력 있는 부르심이 존재하며, 어떤 사람이 구원받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복음의 부르심이 유효하게 임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에클레시아는 '부름 받은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부르심 받은 자들, 그리고 부르심의 결과 구별된 자들의 모임입니다.


- 외적인 부르심과 효력 있게 된 부르심 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부르심은 내적이고 영적인 부르심이라는 것이 정답입니다.


-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부르심에 반응했으며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것이 명백해집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껍데기인 외적 말씀에 매달렸을 뿐,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대단히 강력한 진술이지만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타락의 결과 본성상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육신의 생각은....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사도바울의 이 진술로부터 저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 그것을 즐거워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 사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추론합니다.


- 내적인 부르심이란 영혼 안에서 성령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 그것은 즉각적이고, 영적이며,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입니다. 이 부르심은 우리 안에서 새로운 양식의 영적 활동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이 작용이 없이는 우리는 어떤 참된 영적 행동도 할 수 없습니다.


- "오직[그러나]-대비가 이루어집니다-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주목하십시오-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우리 신자들, 그리스도인들-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 왜 그렇습니까?-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다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신령한 자- 바로 우리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분별하나 또는 이해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성령은 나를 때리거나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내 의지에 작용하여 나로 하여금 이 일을 바라고, 기뻐하고,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은 인도하시고, 설득하시고, 나의 의지에 작용하셔서 복음의 부르심을 효력 있게 만드십니다. 이 일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절대 실패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실 대 그 역사는 효력이 있습니다.



8장. 중생:새로운 성향   Regeneration: a New Disposition



: 지난 강의에서 성경이 구원받은 사람의 경우에는 효력 있는 부르심이 있다고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부르심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임하시는데, 우리는 이것이 각 사람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의 결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신자들 안에서 부르심을 유효하게 만드는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우리의 고찰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1) 중생 교리의 중요성


: 일반적인 부르심을 효력 있게 만들기 위해 성령이 하는 일 - 중생Regenaration


: 우리는 앞에서 구원의 순서, 즉 이 일들을 어떤 순서로 살펴보아야 하는지의 문제를 고찰했으며, 저는 이것이 불가피한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이지만 구원받은 자들 안에서는 효력있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무엇이 그 부르심을 효력있게 만듭니까? 성령이 중생시키십니다. 이 유효한 부르심과 중생 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흥미롭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중생은 유효한 부르심보다 선행합니다. 혹자는 "그렇다면 왜 중생을 먼저 다루지 않으셨나요?"라고 물을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일반적 부르심에서 출발했을 때, 우리는 사람들이 두 집단으로 나뉘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부르심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유효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무엇이 부르심을 효력 있게 만드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중생입니다. 하지만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순서가 바뀌어 중생한 자들이 일반적 부르심에 반응하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 부르심이 효력 있게 되는 것은 그들이 중생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2) 중생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성령이 우리 안에 만들어 내시는 이 위대한 사건을 묘사하기 위해 성경이 사용하는 다양한 언어

첫째, 중생

둘째, 낳다 혹은 다시 낳다

셋째, 낳음

넷째, 살리다


: 중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찰하기 전에, 중생을 회심과 구분해야 한다. 중생은 회심이 아니다. 회심은 우리가 하는 것인 반면, 중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다.

회심은 어느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실제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하지만, 중생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사람들이 회심할 때 혹은 돌아설 때 그들은 자신들이 중생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회심은 중생 이후에 온다. 사람들 안에서 먼저 위대한 변화가 일어났기 대문에 그들의 외적인 삶과 생활에 변화가 잇는 것이다.


씨를 뿌리는 것과 그 씨부림의 결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중생은 생명의 씨를 심는 것을 의미하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와는 명백하게 구분해야 한다.

중리가 중생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실제로 태어나는 출생이 아니라 발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 중생시에 일어나는 일의 본질 (부정적)

1) 중생은 인간 본성의 실체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생의 교리가 무엇이건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실체, 혹은 원 재료가 변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2) 중생은 우리에게 실재하는 물질적 실체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변화이다.

3) 인간 본성 자체가 완전히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4) 인간의 기능이나 본질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5) 단순히 도덕적 개혁을 의미하지 않는다.


: 중생시에 일어나는 일의 본질 (긍정적) - 새로운 영적 삶의 원리가 심어지고 영혼을 지배하는 성향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남.


: 모든 사람에게는 성향이 존재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결정하는 듯 하다. 사람들의 기능들과 능력들을 주관하여 한 사람을 예술적이 되게 하고, 다른 사람은 과학적이 되게 하는 것이 성향이다. 중생에서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이와 같이 행하셔서 우리의 근본적 성향을 변화시키시는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나의 인격과 행위, 그리고 나의 기능들을 사용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성향 속에 하나님은 거룩한 원리, 새로운 영적 생명의 씨앗을 집어 넣으신다.


: 다소 시절의 사울, 능력이나 이해력,의지,기억력에 대하여 탁월하고 뛰어난 사람이였다. 하지만 그는 교회를 핍박하고 기독교 교회를 박멸하려고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다메섹으로 내려간다. 잠시 후, 그가 전무후무하게 복음을 전파한다. 동일한 능력,재능,인격이였지만 정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바울의 영혼의 기능들이 변한 것이 아니라 전체 방향성, 전체 경향, 사고방식이 변했다. 그는 새로운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 중생이 하는 일은 모든 것의 배후에 있으면서 방향과 방식과 방법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성향을 다루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 생명의 씨를 심는 발생과 성향의 변화는 잠재의식 속에서 일어난다. 무의식 속에서라고 말할 수 잇다. 그것은 우리가 직접 감지할 수 없는 비밀, 측량할 수 없는 작용입니다. 실로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조차 없습니다. 중생에 대해 우리가 첫번째로 알 수 있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중생을 이해할 수 없고 그 비밀에 참으로 도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중생은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으로서 사람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그 어떤 기여도 하지 않는다.


: 절대로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려 노력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당신답길 원합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만드셨으며, 그 모습 그대로일 때 하나님을 최고로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항상 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거의 모든 면에서 똑같은 그리스도인들을 주의하십시오. 그것은 영적이기보다 심리적인 변화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9장. 새로운 출생


1) 중생의 본질과 특성에 대한 예화


: 접붙임 나무 - 처음에는 한 나무에 두 성품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옛 가지를 쳐내면 새 가지가 점점 전체를 지배할 것이며, 결국에는 원하는 열매만 생산하는 배나무가 될 것이다.


: 새 생명을 심으면 첫 단계에는 하나의 나무에 재배된 본성과 야생의 본성이 모두 존재하게 된다. 하지망 이 야생가지들을 쳐내 접붙여진 가지에만 영양이 가도록 신경을 쓰면, 그 가지가 튼튼해져서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점점 다른 가지를 정복하고 지배하게 될 것이다.


2) 중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

: 하나님의 성품과 죄의 결과물인 사람들의 성품이 중생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다.


3) 중생은 어떻게 생기는가 

: 세례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니며,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미 거듭났다는 증거를 보인 사람들이었다는 성경적 증거가 사도행전 한 곳에서만도 수없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실로 그들은 거듭났기 때문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새로운 출생의 증거를 제시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표적과 인침으로 세례가 주어진 것입니다.


4) 중생과 말씀과의 관계

: 성향이 변화되고 올바르게 되었다면 말씀이 임했을 때 효력 있게 될 것입니다. 말씀은 결과를 내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 중생은 말씀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인 것입니다. 그들을 다루고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셨습니다.


: 중생이 언제나 말씀을 듣고 믿고 받아들여야만 일어난다고 주장한다면 갓난아기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중생은 전능하신 하나님은 지각이 없는 갓난아기에게도 성인에게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생명의 씨를 심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말씀을 통해 간접적으로 발생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하시는 것인지 고찰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 강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생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며, 하나님이 태초에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새로이 창조하시는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가르치고 있습니다.


5) 중생은 잃어버릴 수 없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그런 사람을 계속해서 죄에 거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중생한 사람은 결코 죄의 삶 안에 거하지 않으며 거할 수도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죄에 빠질 수는 있으나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면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사람이 거듭났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시금석입니다.



10장.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


: 중생했음을 아는 것은 중생 교리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저는 이것을 중생으로 인한 결과라고 부릅니다.


1) 영적생명의 표지

: 중생은 우리 안에 영적 생명의 원리가 심어지는 것. 아기는 울거나 움직임으로 자신이 살아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증명, 생명을 가졌다면 어떤 형태로든 그 생명을 표현하게 됨,

영적 생명도 다른 형태의 생명과 마찬가지이다.


:요한일서에 나타난 생명(중생)의 시금석

1.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믿는 것

2. 계명을 지키는 것 (하나님의 자녀, 거듭난 사람들은 계명들을 지킬 뿐 아니라, 계명들이 기쁨입니다)

3.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음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4. 형제를 사랑하는 것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과 육체, 이 둘은 서로 싸우고, 혹은 "거스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그 안에 큰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성령은 하나님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원하지만, 마귀가 역사하는 다른 영역인 육체는 어두움의 나라를 위해 그들을 원합니다. 그래서 그 둘은 서로 소유권 다툼을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충돌의 장소라는 것, 일종의 대격전이 자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합니다. 그들은 이 두 세력, 이 두 권세들을 의식하며, 그것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알 자격이 있습니다.


: 중생하기 전의 옛 생활에서는 당신은 자신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고 모든 일은 당신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압니다. 말하자면 당신이 그 투쟁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당신 안에 당신 자신과는 별도로 또 하나의 영이 있어서 당신을 다루고, 당신 안에서 역사하고, 당신을 세상과 떨어지게 하고, 당신에게 진리를 가리켜 보여 준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성령의 작용을 인식하며,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탄의 권세를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거듭났다는 대단히 좋은 표지는 그들이 사탄의 존재와 역사를 지금까지 어느 때보다도 더 민감하게 의식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으로서는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크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됩니다.....하지만 사람들이 일단 하나님의 나라, 빛의 나라로 옮겨지면, 마귀는 새로운 노력을 기울여 영적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공격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생명, 자기들의 존재 자체를 놓고 싸우고 있는 이 다른 존재를 의식합니다. 육체와 성령의 충돌은 중생의 증거입니다.


- 또다른 대단히 좋은 시금석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저 하나님께 복을 받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소망을 의식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큰 기쁨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물론 누구나 복을 받기 원합니다. 하지만 자녀의 독특한 표지는 그들이 대상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아버지를 원합니다. 그들은 자기 아버지를 더 잘 알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선물보다 그 선물을 주시는 분에게, 복보다는 복 주시는 분에게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시편 기자가 표현했던 "살아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이 무엇인지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영혼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당신이 어떤 상태에 있든 당신에게 하나님 자신을 알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면 당신은 자신이 중생했음을 알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연인의 마음은 "하나님과 원수"이기 때문이며, 바울이 말하듯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원수가 되었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씌어진 신문기사는 아무리 막연하더라도 쉽게 믿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지만 자녀들은 하나님을 알고 싶어합니다.


- 마지막 시금석, 하나님의 자녀는 단순히 죄사함을 받고 죄의 결과들을 피하기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는 것이 무언인지도 안다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라"....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죄의 결과를 싫어하고 죄로 인해 벌받기를 원하지 않지만 죄에 대한 인식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참된 죄의 자각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죄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를 미워합니다. 우리 주님이 그들에 대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의와 참된 거룩함에 대한 이러한 주림과 목마름을 불신자들은 알 수 없습니다.그들도 선한 삶과 자기들의 기준에 합당하게 행하기를 원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것을 능가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그저 특정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청결한 마음을 원합니다.



2) 그리스도와의 연합 



11장. 그리스도와의 연합 


1)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

1. 영적인 연합 : "우리가....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성령을 통해 이같이 놀랍고 신비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2. 신비적 연합 : 둘이 합하여 한 몸이 될 뿐 아니라 그 둘은 친밀한 방법으로 묶여 있어서 둘이 정말로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신비적 연합입니다.

3. 생명의 연합 : 우리의 영적 생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나온다는 의미,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에 의해 유지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4. 유기적 연합 : 받기만 할 뿐 아니라 주기도 한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우리는 그저 수동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관계, 유기적인 연합이 있다. 머리뿐 아니라 각 지체들도 활동을 하고 생명력을 지닌다.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기여를 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엄청난 개념입니다. 

: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교회의 영적 수준이 이토록 낮은 주된 이유는 이런 교리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주관적 견지에서 생각하며, 뭔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는 나머지, 거룩하게 되는 길은 우리 자신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고 우리의 고귀한 부르심과 특권적 위치를 인식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5. 개인적 연합 : 로마카톨릭,영국국교회카톨릭파들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그리스도에게 연결될 뿐, 개인이 직접 우리 주님과 연합하는 일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씩 개인적으로 주님께 나갈 수 있으며, 집단적으로만이 아니라 단독으로도 주님께 연합되어 있습니다.

6. 분리될 수 없는 연합 : 연합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이루어진다.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2) 연합이 이루어지는 방법

: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살리십니다. 그것이 연합입니다. 그러므로 효력있는 부르심과 중생,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일에서 주된 사역은 성령이 행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결과 우리의 믿음이 작용하기 시작하며, 우리의 믿음이 이 연합의 중대한 부분이라는 사실도 강조해야 합니다. 믿음은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 사항이며, 이 사실은 필연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믿음에 대한 성경의 교리를 고찰하도록 인도합니다....오직 믿음이 활성화될 때에만 이 연합과 우리의 중생, 기타 우리가 살펴본 모든 일을 인식하게 됩니다. 


3) 연합의 결과

: 객관적 - 언약적 / 주관적-영적 

: 저는 심지어 계속해서 객관적인 면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싶은 생각까지 듭니다. 언제나 주관적인 것보다 객관적인 것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관적인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상의 느낌을 원하며, 그런 느낌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 근거들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 감정이 사라지면 우리도 불행해지게 되는데, 이것은 모두 우리가 객관적인 진리에 근거해서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성경이 가르쳐 주는 바는 모든 인류가 아담과 이와 같은 언약적 연합안에 있다는 것입니다.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아담에게 언약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법적인 의미에서 그가 행한 것은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아담이 범죄했기에 우리도 범죄했습니다. 그가 타락했기에 우리도 타락했습니다. 이것이 원죄와 원죄책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한 편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똑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가르침 사이의 대응관계를 인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약적으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6장 6절을 주관적으로 혹은 경험적 의미에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객관적인 의미입니다. 내가 언약적으로 그리스도와 결합했기 때문에, 그가 못 박혔을 때 나도 못박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주관적이고 영적인 결과들  

- 우리가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됩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목적입니다.....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우리가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이 세상에 살고 계셨을 때의 모습처럼 변화됩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 중 맏아들입니다. 그 결과 우리도 당연히 열매를 맺게 되고 주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5장의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 중세 시대의 어떤 사람들은 주님과 주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일을 너무 깊이 묵상한 나머지 그들의 손에 못자국, 즉 성흔(stigmata)이 나타나기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잘 모르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 우리와 주님과의 연합 때문에 우리는 주님처럼 영혼의 탄식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그 깊은 관심과 고통, 영혼의 고뇌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복되신 주님이자 구세주와 우리가 연합한 것의 주관적 결과 가운데 하나입니다. 



12장. 회심Conversion 


:우리 존재의 깊숙한 곳에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일을 행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살펴보았습니다. 효력있는 부르심과 중생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 살펴본 모든 것은 다 거기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그 일이 이루어지는데 있어 우리의 의식은 필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 여기 중생한 사람, 중생한 영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뭔가를 할 것입니다. 이 행동이 바로 회심의 순간입니다.


1) 회심이란 무엇인가

: 새로운 본성이 옛 모양의 삶을 그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첫 번째 행위, 중생한 영혼이 무엇인가로부터 무엇인가를 향해 이동하는 첫 번째 행동.


: 회신은 무엇보다도 성령의 사역이며, 성령은 효력 있는 부르심을 통해 그 일을 하십니다. 이 교리는 이미 살펴보았으며 중생은 이런 과정을 통해 일어납니다. 부르심이 유효하게 되며, 그 부르심은 우리를 다음 단계, 즉 우리의 행동으로 이끕니다. 인간의 행동을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셨을 것입니다. 회심을 무엇이라 정의하든 간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뿐 아니라 사람의 행동도 언급해야 합니다. 부르심은 효력 있게 임하며,부르심에 효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대해 무언가를 합니다. 부르심과 반응, 이 두 측면이 회심입니다.....

회심을 다룰 때는 반드시 인간의 활동도 똑같이 강조해야 합니다. 중생과 연합에서 우리는 완전히 수동적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마음 속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회심에서 우리는 행동하고 움직입니다. 부르심을 받아 행하는 것입니다. 


2) 회심의 특성 

: 일시적인 회심 -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하지만 우리 주님이 바로 이 사람에 대해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한 일시적인 회심의 의미입니다. 그는 말씀을 받은 듯이 보입니다. 그는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안에는 뿌리가 없었고, 그 때문에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 거짓 회심 - 일시적 회심의 경우는 그 회심이 성경의 진리가 전해진 결과 일어난다, 거짓 회심은 진리가 아닌 다른 동인에 의해 발생한 현상 


: 그들은 죄를 버렸고 이제 선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거짓 회심인 이유는 그들에게 회심의 필수적 요소인 진리와의 관계맺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오로지 현상에만 관심이 있고,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삶 전체가 완벽하게 변했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이 있다면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은 오직 심리학책을 보는 것뿐입니다. 심리학은 요 몇년간 큰 인기를 끌면서 기독교의 믿음을 아주 강력하게 공격합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을 변호할 때는 절대 우리의 경험만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변호 수단은 객관적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회심을 주의 깊게 규정하지 않으면 이렇게 거짓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해 줄 말이 없게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3) 회심의 구성 요소 


: 회심을 규격화시키고 일정한 워너리를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 


: 우리는 온통 감정만 강조합니다. 이것은 극도로 위험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감정은 여러 변수 가운데 하나이며, 감정을 강조하다 비극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회심에는 두 개의 필수 요소가 있으며, 이들은 복음서, 사도행던, 서신서 등 성경 모든 곳에서 강조됩니다. 

"회개와 믿음"  즉각적이건 점진적이건 상관없습니다.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둘 중 하나가 없다면 회심이 아닙니다. 둘 다 필수적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왜 회개가 먼저 나와야 합니까?  신약의 첫 번째 설교자, 세례요한의 선포,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 주 번째 설교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였으며, 주님 역시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권면하셨음, 세례요한과 마찬가지로 주님이 첫 번째로 가르치신 것도 회개였습니다.


: 오늘날 복음주의 기독교의 가장 큰 약점은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체험에 관심이 있습니다. 행복에 관심이 있습니다. 주관적 상태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영혼의 첫 번째 필요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모든 사람의 잘못된 점은 그들이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회개를 처음에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원래의 문제이며 타락과 원죄의 주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13장. 회개 


1) 용어의 의미  

:회개 - 다시 생각해 마음을 바꾸는 것 / 후회 / 행동의 변화 


2) 회개의 근원

: 회개는 사람들 편에서 행동을 취하도록 이끄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스가랴 12장 10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은총과 간구 없이는 회개가 있을 수 없습니다.


: 복음 전파는 회개를 일으킨다(요나의 설교를 통한 니느에 사람의 회개)


3) 회개에 관여하는 영역


: 회개에는 전인whole person이 관여한다. 

(지성,감정,의지)


: 의지 -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게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고 아바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세리들에게 "이르되 부과된 것 이외에는 거두지 말라" 군인들에게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의지가 개입 하여야 합니다.


4) 회개의 주제 

: 하나님에 대해 변화된 견해를 갖게 됨,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 


5) 회개의 결과 


1. 하나님에 대한 견해와 생각의 변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


2. 죄의식과 자신의 무가치함에 대한 자각 (위대한 성도일수록 그 사실을 더 깊이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더 깊이 회개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부패했다는 것과 타락과 원죄의 결과 자기들 안에 비열함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들은 자신의 연약함, 무력함을 압니다 자기 힘으로 산상수훈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지한 사람일 뿐입니다. 산상수훈의 첫 번째 구절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는 자들입니다. 


3. 인생에 대한 관점의 변화 - 거룩함의 추구 


4. 구원을 열망하여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함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에 비추어 우리가 갖게 되는 자기혐오는 구원에 대한 열망을 일ㅇ키고, 이어서 구원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하도록 만듭니다....그렇게 하면서 잠시 동안 오류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좋은 표지입니다.....이어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타오르는 열망을 갖게 됩니다.) 


6) 회개와 후회의 차이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회개에 이르지 않는 근심도 있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바로 이것입니다]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만든다.



14장. 구원하는 믿음


1) 믿음이란 무엇인가

: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구원이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는 도구 혹은 통로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존재하는 충만함에 연결시켜 줍니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 우리는 믿음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하니다.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자연적 기능이에요. 우리는 삶에서 언제나 믿음을 발휘하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어요. "당신이 기차를 타고 런던에서 브라이튼까지 간다면 그건 믿음을 발휘하고 있는 거예요. 기관과 기관사, 철도, 침목, 볼트와 너트등을 믿고 있는 거지요." 또는 "비행기를 타고 갈 때 그 사람은 믿음을 발휘하고 있는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논지에 전적으로 반대하며, 이런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차에 앉아 브라이튼까지 가는 것은 믿음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수확적 확률법칙에 근거해서 뭔가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믿음이 아닙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차에 앉아 있을 때 그것은 기차로 여행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경험에 근거해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기차로 여행하는 것이 대체로 안전하다는 것을 배웁니다. 이것은 특정한 사실들을 일반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얻어지는 논증에 의거해 행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의미의 믿음이 전혀 아닙니다. 


성경이 묘사하는 믿음은 독특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탄생은 믿음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찰스 웨슬리는 그의 찬송가에 이 이야기를 반영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주님의 권능을 믿는 것을 주님은 아시나이다

주님이 이 믿음을 이루셨으니 


믿음은 그가 언제나 갖고 있었던 자연적 능력이 아닙니다.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중에 나는 간절히 바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브라이튼에 도착하리라는 것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학적 확률법칙에 의거해서 행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구십구 세였으며 사라는 구십세 였습니다. 인간의 모든 경험상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 믿음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 정답입니다.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 믿음에 대한 자세한 고찰


- 믿음의 구성요소 

신념 / 신뢰 / 헌신


: 진리에 대한 동의는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다.


: 성경에 대한 전문가이면서도 삶으로는 자신이 결코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지적으로는 받아들이지만, 한 번도 마음이 끌린 적도, 감동을 받은 적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 번도 자신을 헌신한 적이 없습니다. 


: 믿음 안에는 지적인 동의 이상의 어떤 것이 있습니다. 신뢰와 헌신이 있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신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 믿음과 이성의 관계

 : 믿음은 이성의 문제가 아니다

: 믿음은 계시에 굴복하는 초이성의 영역이다

: 믿음에 의해 성경에 굴복할 때 그 안에 있는 놀라운 합리성을 발견하게 된다. 

  (믿음은 스스로를 의도적으로 이 책, 성경에 가두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철학자처럼 행동하기를 거부합니다. 특정한 질문들을 던지는 것을 거부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질문 합니다. 그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절대로 이해하지 못 할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위대하고, 너무 신적이고, 너무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받아들이고 질문을 그치십시오. 사람들 안에 진정 믿음이 생겨났다는 가장 좋은 표지는 그들이 특정한 질문들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성경으로 나아와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이성은 여러분을 성경 안으로 데려가지 못합니다. 


- 믿음과 지식의 관계

: 깨달음으로서의 지식 역시 믿음의 구성요소다.

: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식이 존재한다. 

: 필수적인 교리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우리의 죄악되고 멸망하는 상태를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15장. 확신 


1) 확신에 대한 다양한 견해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 확신은 믿음의 필수적 부분이 아니며 확신이 없어도 믿음을 가질 수 있지만, 동시에 확신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확신을 소망해야 하고 그것을 얻기까지 쉬지 말아야 한다.


2) 믿음과 확신의 관계


: 의심은 믿음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인해 믿음이 연약하거나 적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의심은 죄로 인해 생길 수도 있씁니다.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지면 정죄감을 갖게 되고, 이어서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죄를 고백하고 제거하여 다시 깨끗하게 될 때까지 의심의 상태에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믿음은 남아 있지만 연약하고 불확실한 상태이며, 그들은 잠시 동안 의심의 희생자가 됩니다.

 의심은 믿음의 본질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믿음이 능동적인 것이며, 적용해야 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우리 주님이 배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을 생각해 봅시다. 주님은 주무시고 계셨으며 제자들은 배가 곧 가라앉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바라보시며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너희는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적용하지 않고 있다" 믿음이 적용되어 행동을 유발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한동안 의심의 희생자가 되기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믿음이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하며 진리를 붙잡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 또한 일종의 행동입니다. 우리가 순전히 수동적인 상태에 머물러 뭔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만 있다면, 믿음보다 의심이 앞설 가능성이 높 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이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우리는 의심을 제거할 것이며 믿음은 더 강해질 것입니다.


: 객관적 확신과 주관적 확신은 차이가 있다. 존 웨슬리의 예- 마음에 '이상한 따뜻함'을 느꼈던 앨더스게이트 가에서의 사건 이전에도 존 웨슬리는 진리를 믿었고 그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객관적 확신이었다. 하지만 그 날 밤이 되도록 그가 가지고 있지 않았던 내면의 사건이 바로 주관적 확신이었다.


: 그들은 자신이 진리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 하지만 저는 나의 내면, 스스로의 확신에 대해서는 행복하지가 않아요."

 참된 확신은 물론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두 가지를 다 포함합니다.


3) 참된 확신의 근거


1.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슴만이 유일한 확신의 근거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2. 생명의 증거 

-첫 번째 시험 기준 :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 

-두 번째 시험 기준 : 형제를 사랑하는 것 

-세 번째 시험 기준 : 계명을 지키는 것 

-네 번째 시험 기준 : 성령을 소유하는 것 


: 성령을 소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다섯 가지 증거

(1).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참으로 믿는다는 사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속죄의 교리들을 참으로 믿는다는 사실 

(2). 내가 이 지식을 더욱 사모한다는 사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기 원한다면,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도달했다면, 자신의 인간적 이해력과 모든 철학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면, "나는 가르침을 받고 싶어요. 나는 모든 면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고 싶어요"라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여러분이 성령을 갖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직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들만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싶어하고 그분의 이끄심에 복종하고 싶어합니다.

(3).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증거 (죄를 드러내는 것)

(4). 성령의 열매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5). 양자됨의 영 


3.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 


: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주목하십시오-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 사람에게 주님은 자신을 영적인 방식으로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실 분이 바로 지금 주님이 말씀하고 계신 성령입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기도 


" 주 예수여, 당신을 내게 생생한 실재가 되게 하소서

  바깥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믿음의 눈으로 더 생생하게 보도록 

  세상의 가장 달콤한 인연보다도

  더 귀중하고 친밀한 가까움으로"


이것이 확신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근거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실재가 되시기 때문에, 약속대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이것은 확실한 지식입니다. 성도들이 이 사실을 증언한 것을 살펴보면 흥미롭습니다. 이 경험은 신학의 모든 학파에서 나타납니다. 루터가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경험했습니다. 휫필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웨슬리, 피니, 무디 등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면에서 신학적 견해가 달랐지만, 그들 모두는 성령이 자신들의 영으로 더불어 증언하심을 경험케 하셨다는 사실을 증언했으며, 이 경험이 압도적인 것이었다고 느꼈습니다. 

 무디는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뉴욕 시의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경험의 영광과 장엄함과 탁월함 때문에 자기 육체가 짓눌리고 죽게 될 것 같아 손을 맞잡고 하나님께 멈추어 달라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수반되는 감정들은 엄청나게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이 확신의 궁극적 근거입니다. 피니의 경우 이 경험은 계속해서 밀려드는 파도처럼 왔습니다. 그는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 보고 그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십시오. 존 웨슬리의 경우에는 이처럼 압도적인 경험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에 '이상한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까?

(1) 당신의 믿음을 확증하십시오. 만일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면, 당신이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를 의지하고 있는 면은 없는지 확인하십시오. 자신의 모든 의를 더러운 옷과 같이 여기고 있는지 확인하고, 천 년을 산다 해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기에 결코 적합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십시오. 십지가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에만 오로지 의지하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의에만 오로지 의존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성경 말씀을 스스로에게 적용하고, 그 말씀을 알아 가며, 읽으십시오.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 그분의 약속을 성취하시고 여러분에게 자신을 나타내 달라고 구하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4) 참된 확신과 거짓 확신

:참된 확신은 특징은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입니다. 

: 만일 여러분이 스스로를 점검하고 있다면, 그것은 참된 확신의 표지입니다. 거짓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 점검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5)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구원의 확신


횟필드가 이 놀라운 확신, 성령의 이 직접적인 증거가 어떻게 그에게 주어졌는지 묘사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오랫동안 이 확신을 추구한 끝에 병에 걸렸습니다.


' 병은 칠 주 동안 계속되었으며, 그것은 이 모든 기간 복되신 성령이 나의 영혼을 정결케 하시는 영광스러운 방문이었다. 나의 이전의 모든 천하고 악명 높은 죄들과 심지어 나의 마음 속의 죄들까지도 이제 절실히 느껴졌다. 나는 즉시 생각나는 대로 그 죄들을 기록하고 아침이고 밤이고 하나님 앞에 그것들을 고백했다. 나는 허약했지만 종종 저녁에 골방에서 두 시간을 보냈으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헬라어 성경과 홀 주교의 탁월한 묵상집을 놓고 기도했다. 칠 주가 끝날 무렵, 그리고 열 두 달 이상 육체와 마음의 말할 수 없는 압박 속에서 신음한 후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나를 자유하게 해 주셨다. 어느 날 유난히 목이 타고 입안이 불쾌하게 끈적이는 것을 느끼고는 갈증을 가라앉히려 여러 가지를 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가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셨을 때, 그의 고난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침대에 엎드러져서 "내가 목마르다, 내가 목마르다." 라고 외쳤다. 잠시 뒤 나는 나 자신이 치유됨을 알았으며 너무 무겁게 나를 누르고 있던 짐에서 해방되었다. 애통의 영이 내게서 제거 되었고 내 구주 하나님을 참으로 참으로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며, 한동안 어디로 가든지 시편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기쁨은 점점 더 확고해졌으며,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 이후 간혹 중단되었던 순간을 제외하고는 내 영혼에 거하면서 더 커져갔다.'


구세군에 속한 어떤 사람도 같은 내용을 말했습니다. 이 사람 역시 진리를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객관적인 확신을 갖고 있었으나 주관적인 확신은 갖지 못했으며 그것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 나는 그 날 아침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삶을 살고,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동으로나 하나님께 절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자 하는 열망으로 주리고 목마른 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한 없는 욕구를 가지고 깨어났따. 그런 욕구를 갖고 나는 성경을 폈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읽는 중에 예수님은 나에게 이생에 사는 사람이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복을 주셨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계시였다. 천국의 사랑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내 영혼은 불 앞의 양초처럼 녹았다. 나는 흐느끼고 또 흐느꼈다. 주님을 향해 죄를 짓고, 주님을 의심하고, 주님의 영광이 아닌 나를 위해 살아왔던 것이 혐오스러웠다. 자신을 위한 모든 야망은 이제 사라졌다. 타오르는 불이 나방을 태워 버리는 것처럼 순전한 사랑의 불꽃이 그 야망을 태워 버렸다. 나는 기쁨으로 울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아침 식사 전에 보스턴 코몬스에서 걸어 나왔다. 오, 나는 얼마나 그분을 사랑했는지! 그 때 나는 예수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내 마음은 그 사랑으로 찢어질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는 그분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찼다. 나는 작은 참새가 지절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사랑스러웠다. 작은 벌레가 꿈틀거리며 내 앞으로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발을 살짝 들고 그 위로 넘어갔다. 어떤 생물도 다치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개들도 사랑했고, 말들도 사랑했고, 거리의 작은 장난꾸러기 아이들도 사랑했고, 내 옆을 서둘러 지나가는 낯선 사람도 사랑했고, 이교도들도 사랑했고, 온 세상을 사랑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이 모든 것을 하셨다. 복되도다.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이여, 나는 순결해지기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내 가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얼마나 주리고 목말라했던가. 그분은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고 나를 만족시키셨다. 신중하게 말하건대 하나님은 나를 만족시키신다. 하나님의 나의 교사, 나의 인도자, 나의 상담자, 나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신다.


이제 곧 세상을 떠나려 하실 때 우리 주님은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성령을 통해 그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매들리의 존 플레처가  표현했듯 "하나님의 아들의 영적인 나타남"을 보게 될 때, 그들은 아무 것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는 절대적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우리가 아직 이 확신을 가지지 못했따면, 이제 가질 수 있습니다. 이 확신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은 자신을 나타내 주셨습니까? 주님께 허드슨 테일러의 짧은 기도를 올려 드리십시오. 주님은 그 기도에 주님의 방법으로, 주님의 때에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제가 인용한 두 사람에게는 서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들과는 또다른 경험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 느낌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성령이 오실 때 알게 될 것입니다. '느낌이 있는지 여부에 신경 쓰지 말고 당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기만 하라'는 가르침을 믿지 마십시오. 이 사람들은 실제로 느낌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게 하나님의 아들이 영적으로 나타나실 때, 우리는 그에 대해 스스로를 설득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명백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16. 이신칭의 


 

: 칭의에서 우리는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선포되는 것입니다. 칭의를 통해 의롭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을 성화와 혼동하는 것입니다. 칭의는 법적인 혹은 법정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율법을 집행하는 재판관이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율법에 대해 만족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칭의는 선언적 행동입니다. 


: 야고보서 2장 14~26절에서 믿음에 관한 말,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라고 했지만 야고보는 '행함으로'라고 함. 

이에 대한 대답은 바울과 야고보 모두 칭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믿음의 특성을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들과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들의 행위와 삶과 행동으로 스스로를 의롭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 바울은 "아니다. 의롭다 하심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구원한 것은 그의 믿음이다" 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오늘날의 어떤 사람들처럼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한 나는 구원받은 것이다. 내가 무엇을 행하느냐는 정말이지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리스도인이요 신자라고 말한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며 나의 죄는 용서 받을 것이다"라고말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7. 양자됨 


1) 양자됨의 의미 

2) 양자됨의 증거

3) 양자됨의 결과

- 성령이 주시는 영광의 자유

-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됨

-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하심

- 하나님의 징계

- 상속권

- 안전하고 확실한 보증


18. 성화: 여러 견해들


1) 성화에 대한 논쟁

- 논쟁에 대한 역사

- 이 문제에 접근하는 올바른 자세


2) 성화의 의미

- 구분되어 하나님께 드려짐

- 거룩하게 되는 내적인 변화

- 성화의 또다른 정의


3) 성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한 견해들

- 완전주의자의 견해

- 반작용의 원리에 의한 성화

- 거듭난 순간 시작되어 영화롭게 될 때 완성되는 성화


19. 성화: 하나님의 일과 우리의 일 


1) 구원의 전 과정의 목적인 성화 

- 성화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 피해야 할 오류들

-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성화


2) 성화의 주체

- 성화를 이루시는 하나님

- 성화를 이루는 우리의 행동




20장. 성령이 행하시는 강력한 과정 


1) 성화는 단번에 받는 것이 아니다

- 성화는 주어지는 것이라는 주장

- 이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오용되는 성경 구절들과 반론

- 성화는 이루어 나가는 것임을 보여 주는 성경 구절들


2) 성화는 언젠가 얻게 되는 체험이 아니다

- 극적인 체험과 성화가 동일시 될 수 없는 이유

- 체험과 성화의 관계


3) 성화는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성장이다

- 구약 성경으로부터 유추한 그리스도인의 삶

- 성화의 과정에 대한 하나님의 뜻




21장. 로마서 6~8장이 말하는 성화


1) 로마서 6~8장의 개요

- 로마서 6~8장의 의의

- 개략적 내용 분석


2) 로마서 6~8장의 내용 분석

- 죄와 타락의 결과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한 구원

-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

- 여전히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육체

-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질 궁극적 승리


3) 성화에 대한 고찰의 결론


22장. 세례와 충만 


1) 성령세례 

- 이 문제에 접근하는 올바른 자세

- 성령세례라는 용어가 사용된 성경 구절

- 성령세례의 의미


2) 성령충만

- 성령충만의 의미와 의의

- 성령충만과 부흥 




23장. 성령세례에 대한 추가적 고찰 


1) 성령세례를 탐구하는 올바른 자세 

- 극단을 피하라

- 역사의 교훈 


2) 성령세례와 구분해야 하는 것들

- 성령세례와 중생의 차아ㅣ

- 성령세례와 성화의 차이

-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차이


3) 성령세례의 올바른 의미

-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타나심

- 성령세례의 예를 보여주는 인물들 

- 성령세례와 감정

- 성령세례와 거짓 체험의 구분



24장. 인 치심과 보증


1) 인 치심의 의미 

- 인의 기능과 목적

- 성령의 인


2) 성령의 보증

- 보증의 의미

- 보증이 되신 성령


3) 성령의 인 치심과 보증을 누리기 위해 피해야 할 행동들

- 성령을 소멸하는 것

-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 



25장. 성령의 은사


1)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 영적 은사는 자연적 은사와 전혀 다른 것이다

- 성령은 자기 뜻대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다

- 모든 그리스도인은 은사를 가지고 있다

- 은사들의 가치는 다르다

- 모든 은사는 사랑 안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는 보편적 은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2) 은사의 지속성

-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은 반복되지 않는다

- 사도와 선지자의 은사들은 사도시대 이후 중단되었다

- 지속성에 따른 은사의 분류


3) 성령 모독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