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고대 로마
역사와 문화에는 어떤 흐름이 있다. 이 흐름은 사람들의 사상 속에 뿌리박고 있으며, 거기에 원천을 두고 있다. 사람은 마음의 내면 생활이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즉 그들의 사상 체계가 그들의 행동 방식을 결정한다. 이 사실은 그들의 가치 체계에서도 그렇고 그들의 창조성에서도 그렇다. 정치적 결정과 같은 단체 행동에도, 그들의 개인 생활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사상 세계의 결과들은 그들의 손가락을 통해서 또는 그들의 입을 통해서 외부 세계로 흘러간다. 이 점은 미켈란젤로의 끌에도 마찬가지이며 독재자의 칼에도 마찬가지이다.
- 한 민족의 삶이 압박을 받을 때, 그들의 세계관이 어떻게 힘을 발휘하는지를 깨닫는 일은 중요하다. 종교적 혼합과 혼합주의와 로마 문화의 결점의 영향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사실은 기독교 세계관의 강한 힘을 말해 준다. 이 힘은 하나님이 무한한 인격신이라는 사실과 그가 구약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으로, 그리고 점점 형성되고 있던 신약으로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이 스스로는 발견할 수 없는, 우주와 사람에 관한 지식을 가졌을 뿐 아니라 삶을 영위하고 사회와 국가를 판단하는 데 기준이 되는 절대적,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독특한 존재로서의 개인의 기본적 존엄성과 가치를 떠받쳐 주는 근거가 있었다.
- 연약한 기반을 가진 문화나 개인은 그 기반에 압력이 그다기 크게 미치지 않을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사람들의 문화와 자유는 쉽게 파괴된다. 충분한 기반이 없는데 압력을 받는다면, 붕괴는 오직 시간 문제이다. 그리고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도 않는다.
- 로마는 잔인했고 그 잔인성은 아마도 로마에 있는 경기장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잘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경기장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검투사의 격투와 맹수들에게 던져진 그리스도인들을 구경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왜 죽음을 당했는지 잊지 말자. 그들은 예수님을 섬겼기 대문에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다양한 종교가 로마 세계를 채우고 있었다. 그런 것 가운데 하나가 B.C 67년에 로마에 생긴, 조로아스터교의 일반적인 페르시아 풍 형태인 미트라 종파였다. 공식적으로 케사르를 숭배하던 국가의 통일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누가 누구를 숭배하든지 상관이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당한 이유는 그들이 반역자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반역의 성격을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첫째로, 우리는 그들이 예수를 하나님으로 섬겼으며, 오직 무한하신 인격신 한 분만을 섬겼다고 말할 수 있다. 로마 황제들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이러한 경배를 참지 못했다. 이런 경배를 반역으로 보았다....만약 그들이 예수님과 케사르를 함께 섬겼다면 전혀 해를 받지 않고 잘 지냈겠지만, 그들은 어떤 형태의 혼합주의도 용인하지 않았다.그들은 구약에, 그 다음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점차 기록되고 있었던 신약에 자신을 직접 계시하신 하나님을 섬겼다. 그들은 어떤 혼합도 허용하지 않았고, 다른 모든 신들을 거짓 신으로 생각했다.
두번째 방식으로....전체주의적 권력이나 권위주의적 국가는 그런 국가와그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절대자를 가지고 있는 자들을 도무지 참아낼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계시에서 그러한 절대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 도덕뿐만 아니라 국가도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 보편적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체주의적인 로마의 대적으로 몰려 맹수들에게 던져지고 말았다.
- 제국이 몰락해 감에 따라, 부패한 로마인들은 폭력과 감각적 만족을 갈망하게 되었다. 이 점은 특히 그들의 문란한 성행위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폼페이에서는 공화정이 과거지사가 되어 버린 후 1세기 정도가 지나자 남근 숭배가 심해졌다. 지나친 성행위를 표현한 조각과 그림들이 부요한 가정집을 장식했다. 폼페이의 예술이 모두 이러했던 것은 아니지만, 성적인 표현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난잡했다.
- 무감각은 후기 제국의 주요한 특징이었다. 무각감이 나타난 여러 방식 가운데 하나는 예술에서 나타난 창조력의 결핍이었다. 공식적으로 후원을 받던 예술의 몰락을 쉽게 보여주는 예가 있는데, 그것은 로마의 콘스탄틴 개선문에 있는 4세기의 작품이 트라얀 황제 시대 이래로 기념물에 사용되었던 2세기의 조각물에 비해 초라하다는 것이다. 엘리트들은 사회 생활을 지적으로 탐구하는 일을 포기했다. 공식적으로 후원을 받던 예술은 퇴폐적이었고, 음악은 점차 과장되었다. 심지어 동전의 초상화들까지 저질이 되었다. 모든 삶에는 무관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로마의 경제가 심한 인플레와 사치스러운 정부에 시달리며 더욱 악화되면서, 무관심에 대처하기 위하여 권위주위가 심해졌다. 노동이 더 이상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자 국가 권력이 점차 노동을 관장하게 되었고, 자유는 사라졌다.예컨대, 법률이 통과되어 소농민들은 자기 토지에 묶여 버렸다. 그래서 전반적인 무감각과 그 결과들 때문에, 그리고 압제적인 통제 때문에, 이 옛 문명이 유지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
로마는 야만족의 칩입과 같은 외적인 힘 때문에 몰락한 것이 아니다. 로마의 몰락은 내적으로 견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며, 야만족은 다만 그 붕괴를 완결지었을 따름이다.
제2장 중세
- 신약 성경에 나타났던 초대 기독교는 점차로 왜곡되어 갔다. 인본주의적 요소가 덧붙여졌던 것이다. 즉 교회의 권위가 점차로 성경의 가르침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에 인간의 공로를 첨가하는 것에 있다고 점차 강조되었다.
- 로마 군대 사령관이었던 모리스의 행동은, 로마 황제 아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고 있던 동안 취할 수 있었던 한 가지 가능한 반응을 보여주는 좋은 보기가 된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박해를 주도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리스도인들의 편에 속하려고 자신의 휘장을 부관에게 넘겨 주고, 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죽음을 당했다.
-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는 768년에 프랑크(Frank)왕국의 왕이 되어 800년 성탄절에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황제로 대관되었다.그는 엄청난 정력을 가진 강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위대한 용사였고,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다. 그가 이전에는 로마 제국에 속했던 서유럽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하자, 교황이 집전하여 로마의 황제 대관식처럼 치러진 그의 대관식은 쉽사리 뒤따라왔던 것이다. 그 대가로 그는 교황에게 이탈리아에 있는 강력한 영토 기반을 제공하고 또한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 있는 게르만, 독일 부족 가운데 있는 앵글로색슨 족 선교사를 후원하는 등 여러 모로 교회를 힘있게 했다....
샤를마뉴 치하에서 교회는 더욱 일반적인 문화 세력이 되었다. 교회 권력은 국가 권력과 공존하게 되었고 문화적으로 두 영역은 서로를 부양했다. 학자들은 지원을 받았고, 그들의 작업은 독창적인 것은 아니엇으나 순수한 열심, 열정 그리고 체계적인 전파를 통한 새로운 열기가 있었다.
- 로마네스크에서 고딕으로 변화하는 동안, 마리아 숭배가 교회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로마네스크 교회들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적이 없지만 프랑스의 고딕 교회들은 압도적으로 그녀에게 봉헌되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어떤 점증하는 긴장을 발견하고 느끼게 된다. 즉 중세의 태동은 각성된 문화적, 지적 생활과 각성된 경건으로 특징지어졌지만 동시에 교회는 성경적 교리의 왜곡이 심해지면서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곧 유럽의 사상은 두 가지 노선으로 양분되었는데, 둘 다 우리 시대로 이어져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첫째는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적 요소이며, 둘째는 성경에 근거한 종교개혁의 가르침이다.
- 르네상스라는 이름에 걸맞는 어떤 변화가 결국 나타났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인간의 재탄생이 아니고, 어떤 인간관의 재탄생이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인간에 관한 사고 방식에 큰 변화가 있었으니, 이는 인간을 모든 사물의 중심에 두는 변화로서 이 변화는 예술에 표현되었다.
- 르네상스 인본주의-그리고 그 이후의 인본주의-는 오직 사람에서 출발하므로, 존재와 도덕에 의미를 주는 보편자나 절대자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지 못했다.
- 두 가지의 사실이 이제 뒤따라올 것의 기반을 제공하는데, 첫째는 점차로 각성된 중세의 문화적 사상과 경건이며, 둘째는 성경과 초대 교회의 교훈에 대한 증가된 왜곡이다. 즉 인본주의적 요소가 개입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교훈을 눌렀고, 타락한 인간이 그리스도의 공로에 자신의 공로를 쌓음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독교와 고대 비기독교적 사상의 혼합(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강조와 같은)이 있었다. 이로 해서 사람들은 자신이 자율적이고 사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의 불행한 측면은 그 왜곡들을 재확증했다는 점이다.
제3장 르네상스
- 단테는 자국어로 중요한 작품을 저술한 초기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저술은 깊이 있고 심오한 아름다움을 지닌 뛰어난 천재적 작품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적 요소가 발전하는 과정에 있던 단테는 작품 전반에서 암암리에 기독교 세계와 고전적 이교 세계를 혼합함으로써 토마스 아퀴나스의 잘못된 측면을 따랐다. 신곡에서 두 가지 예를 언급해 보자. 첫째, 단테의 지옥 안내자는 로마의 시인 버질인데 그는 마치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단테에게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다. 둘째, 지옥에서 가장 악독한 죄인들은 예수를 배반한 유다와 케사르를 배반한 브루투스Bruts와 카시우스Cassius이다.
재미있는 점은, 자연 대 은총 문제가 단테의 저술 속에 등장하는 베아트리체와 단테의 아내의 대립 속에 분명하게 반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단테는 생애 내내 (실제로는 한두 번 보았을 따름인)베아트리체를 사랑했고, 자신들의 사랑을 낭만적인 이상으로 승화시켰다.....반면에 1285년에 결혼한 그의 아내는 그의 시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그의 아이들을 키우는 데에만 필요한 사람이었다.....감각적인 사랑에는 순간저 육체적 반응을 넘어서서 진정한 의미를 줄 수 있는 정신적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통일적으로 유지하지 않고, 이것을 일종의 상층부(upper story)와 하층부(lower story)로 양분했다. 소설가와 시인들의 감각적인 사랑은 하층부에 속하고, 서정 시인들의 이상 적인, 정신적인 사랑은 상층부에 속했다. 이런 상황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함을 낳았을 따름이었다. 아내는 가정부였고,반면 이상화된 여자는 몸 없는 환영이었다.
- 이제 인본주의가 득세하기 된 사실을 보기 위해서 당시 예술의 다른 측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플로렌스의 학술원에는 미켈란젤로의 커다란 방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양쪽 벽에 "자신을 바위에서 떼어내려고 하는" 사람들을 표현한 미켈란젤로의 조각상들을 볼 수 있다. 이 조각상들은 1519년과 1536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이 진정한 인본주의적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을 위대하게 만들어 갈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자신을 바위에서 떼어네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자연에서 떼어내고 거기서 자유로베 될 것이다. 인간은 승리할 것이다.
......마침내 방의 핵심적 위치에 있는 찬란한 다비드 입상에 이르게 된다. 세상에 있는 예술 작품 중에 이것에 비길 만한 것은 거의 없다. 미켈란젤로는 흠이 많아서 어느 누구도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대리석 조각으로 이 위대한 입상을 조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비드는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 다윗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다비드는 단지 제목이었을 따름이다. 미켈란젤로는 다윗의 유대교를 알았지만, 입상의 인물은 할례를 받지 않았다. 우리는 이 인물을 성경의 다윗이라고 생각할 수 없고, 오히려 인본주의적 이상 곧 인간은 위대하도다라는 표현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생애 말년 미켈란젤로가 인본주의가 충분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는 표시가 있다. 미켈란젤로는 생애 후반기에 비토리아 콜로나라는, 종교개혁 사상에 영향을 입은 어느 여인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플로렌스의 대성당에 있는 피에타에서 미켈란젤로는 니고데모(혹은 아리마대 요셉-그 인물이 누구든지간에)를 자신의 얼굴로 나타내었는데, 이 두 피에타에서는 인본주의적 자신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줄어들었다.
- 레오다느로 다빈치 : 인본주의적으로 수학에서 출발하면 사람들은 오직 개별자만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그 뛰어난 재능으로 파악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서 출발하는 사람은 수학의 기초 위에서 결코 의미에 도달할 수 없을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오직 개체 사물들, 개별자들을 가지고서는 결코 보편자나 의미에 도달할 수 없고 다만 기계로 끝나게 될 뿐임을 알았다.
제4장 종교개혁
- 1517년 10월 31일, 마리튼 루터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이 사실을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452년에서 1519년까지 살았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루터의 반박문은 레오나르도가 죽기 2년 전에 발표된 셈이다. 레오나르도가 죽기 10년 전인 1509년에 칼빈이 탄생했고, 레오나르도가 죽은 해에 루터가 라이프치히에서 에크 박사와 논쟁을 벌였다. 1516년 레오나르도를 프랑스에 데려온 프란시스 1세는 칼빈이 1536년에 자신의 기독교 강요를 헌정했던 그 프란시스 1세이다.
우리는 두 가지 일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첫째로, 남부에서는 절정기의 르네상스가 인간은 만물의 중심이고 자율적이라는 인본주의적 이상에 대부분 기초를 두고 있었고, 둘째로, 북부 유럽에서는 종교개혁이 그 반대의 해답을 주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종교개혁은 절정기의 르네상스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을 때에 루터와 더불어 막 폭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 종교개혁 사상가들에 따르면, 성경과 교회가 권위를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 아래 있지 결코 그 위에 있거나 동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즉 오직 성경이라는 모토였다. 이 주장은 초창기 기독교 이후에 교회에 스며든 인본주의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핵심적 활동의 내용은 교회에 들어온 인본주의적 왜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수년 동안 자라다가 1500년에 완전히 발전된 인본주의적 사상이 침투했던 방식은 다시 검토할 가치가 있다. 첫째로,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와 같게 되었다. 둘째로,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사역에 인간의 공로의 요소가 강하게 부각되었다. 셋째로,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 성경적 가르침과 이교 사상 사이의 혼합이 심해졌다......
제5장 종교개혁-계속
- 종교개혁자들은 사람에 대하여 낭만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타락을 매우 강조하면서, 모든 사람이 실로 죄인이므로 견제와 균형은 특히 권력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이해했다.이런 이유로 칼빈은 제네바에서 종종 자신에게 부여되는 권위를 취하지 않았다.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은 이런 일들에 관하여 부처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형식화되거나 제도적인 권위와는 반대로, 칼빈의 영향력은 도덕적이며 비형식적이었다. 이는 정치적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문제에서도 그러했다. 예를 들면, 그는 매주 주의 만찬을 가지기를 원했지만, 제네바의 목사들의 다수가 원하는 뜻을 따랐다. 그래서 주의 만찬을 세 달에 한번씩막 기념했다.
- 종교개혁의 흐름 속에 있던 사람들은 자신이 따르노라고 주장하던 성경의 가르침에 어떤 점에서는 일치하지 않았다. 그들이 성경을 마땅히 따라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영역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두 가지가 두드러진다. : 첫째로 인종에 대한 왜곡된 견해와 둘째로 축적된 부의 자비심 없는 사용이다.
제6장 계몽주의
우리는 계몽주의의 유토피아적인 희망을 다음의 5가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성,자연,행복,진보 그리고 자유. 그 희망의 사고 방식은 철저하게 세속적이었다. 르네상스 동안에 나타난 인본주의적 요소가 계몽주의로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그리고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적 요소들이 종교개혁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면, 계몽주의는 종교개혁에 대해 완전히 반정립이었다. 둘은 전적으로 다른 것을 배타적인 방식에서 상징하고 또 그거에 근거했고, 둘은 전적으로 다른 결과를 낳았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사람과 사회는 완전해질 수 있는 것이엇다.
- 프랑스 계몽주의의 사람들은 아무런 기반도 갖지 않았고 다만 자신의 유한성을 가지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들은 도버 해협 건너 영국의 종교개혁을 바라보고, 기독교적 기반 없이 건축하려고 했지만 대학살과 독재주의적 통치자 나폴레옹과 더불어 막을 내렸다.
- 1789년 6월 자유주의 부르주아의 프랑스 혁명 계획의 서막이 그 절정에 도달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그의 그림 '테니스 코트의 서약'에서 이 장면을 그렸다. 여기서 국민 의회가 헌법을 제정하기로 맹세했다. 명백하게 그들의 기반은 순전히 인본주의적인 권리 이론이었다. 1789년 8월 26일 그들은 인권 선언문을 공포했다. 듣기에는 멋있지만 그것은 의지할 기초가 없었다. 인권 선언문에서, "최고 존재(the Supreme Being)는 "국민의 주권" 즉 백성들의 일반 의지와 같은 것이었다. 이 점은 영국의 무혈 혁명과 대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13년 전에 만들어진 미국의 독립선언문의 결과와도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한편은 종교개혁에 기반을 둔 것이고, 다른 한편은 그것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
- 르네상스 인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계몽주의의 사람들도 기독교적 기반과 유산을 제쳐두고 기독교 이전의 고대로 눈을 돌렸다.
- 종교개혁의 나라와 남부 유럽과 공산주의 국가 사이에 나타나는 대조를 살펴보면서, 우린느 종교개혁에서 나온 정치적, 사회적 부요를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 종교개혁의 합의가 충분히 미치지 못한 다른 곳에서조차 성경적 견해에 따라서 불의와 싸우려는 절대 기준이 있었다. 샤프츠베리, 윌버포스 그리고 웨슬리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이 싸우는 악과 불의는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특히 인종과 축적된 부의 자비로운 사용의 부분에서 마땅히 소리를 높여야 할 때 너무 자주 침묵했음을 우리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말해야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침묵했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입장과는 일치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와는 달리 인본주의자들은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를 말할 수 있는 궁극적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본주의자는 궁극적인 것, 즉 비인격적 우주는 옳고 그름, 잔인함과 잔인하지 않음에 대하여 중립적이며 침묵한다. 인본주의는 절대기준을 제공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인본주의의 필연적 결과로, 인본주의는 개인 도덕과 정치생활에 있어서 자의적인 것에 방치되어 있다.
- 성경적 기반에서는 절대 기준들이 있고 따라서 우리는 인종 차별과 사회 불의를 포함하여 어떤 것이 옳거나 그르다고 말할 수 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 신약에 따르면, 예수님은 우셨을 뿐만 아니라 분노하셨다.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던 분은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고 죽음의 비정상성에 대하여 화를 내실 수 있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기초를 둔 기독교인에게 죽음은 비정상적인 것이며,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잔인함이기도 하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이 세계를 만드셨을 때는 없던 것이었다. 기독교인은 존재하는 것의 궁극의 실재와 싸우지 않고, 즉 하나님과 싸우지 않고 인간이 하나님께 반항함으로 생겨난 비정상성과 싸울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절대 기준이 있으므로, 정의는 절대적으로 선한 것으로 보아야지 공정한 방편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제7장 근대 과학의 발흥
- 역사에서 두 시기가 거의 동시에 나타났는데 그것은 절정기 르네상스와 그와는 대조적인 종교개혁이다. 그런데 우리가 다루어야 할 제3의 현상이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그것을 우리는 종종 과학혁명이라고 부른다.
-로마 교회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를 공격했을 때, 이는 두 사람의 가르침이 성경과 다른 요소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교회 당국은 그것이 이유라고 생각했으나, 실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가 교회 전통 교리의 일부가 되었고 갈릴레오의 견해는 이들 요소와 분명하게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실상,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와 성경이 서로 양립할 수 있다고 변호했고 이 점이 바로 그가 재판받게 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에서 1519년까지 살았다.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1517년 교회 문에 붙였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1536년에 출판되었다. 1546년에 루터가 죽었다. 천문학자인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에서 1543까지 살았고, 1530년에 자신의 이론의 기초적 윤곽을 밝혔는데, 이는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도는 것이지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540년대에는 세 가지 사건이 발생햇다. 첫째로, 코페르니쿠스가 쓴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가 그의 사망 후에 출판되었다. 둘째로, 베살리우스가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를 출판했다. -흔히 이 책을 '인체 해부에 대하여'라고 부른다. 셋째로, 아르키메데스의 라틴어 번역 전집의 초판이 1544년 바젤에서 출판되었다. 이 일은 근대 과학 발달에 핵심이 되는 몇몇 수학적 방법들을 도입했다.
- 아이작 뉴턴 경은 20대의 젊은 교수로 케임브리지 대학에 있을 대, 모든 물체 사이에는 보편적 인력이 있고 그것은 계산될 수 있따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그 힘을 중력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사실을 후에 '철학의 수학적 원리들'에서 설명했다. 이 책은 인간 사상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책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또한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있는 네빌 뜰에서 행한 실험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떨어뜨린 물체의 소리와 일정한 거시에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방향 사이의 간격을 측정하여 소리의 속도를 계산해 낼 수 있었다.
전생애를 통하여 뉴턴은, 자신이 믿는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여고 힘썼다. 17세기 과학자들은 이유why에 대해여 관심을 두지 않고 방법how에만 매달렸다고들 말한다. 이 점은 사실이 안디ㅏ. 뉴턴에게는 다른 초창기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유에 대한 문제가 없었는데, 이는 그가 우주를 차아조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생애 후반에 뉴턴은, 비록 거의 출판되지 않았지만 과학이 아닌 성경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썼다. 뉴턴이 그의 모든 시간을 과학에 썻기를 바란다고 인본주의자들은 말했다. 그들은 그가성경 공부에 보낸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그들은 실로 눈이 먼 사람들이다. 화이트헤드와 오펜하이머가 강조한 것처럼, 만일 뉴턴 등이 성경적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과학에 대한 아무런 기반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제8장 철학과 과학에서의 붕괴
1장에서 다룬 내용의 요점은, 오늘날 우리가 지적인 사상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이해하려면, 세 가지 흐름, 즉 철학적 흐름과 과학적 흐름과 종교적 흐름을 추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앞 장부터 계속해서 이런 탐구를 해왔고, 이제 현대인의 시대에 도달했다. 이제 내가 "붕괴the Breakdown라고 부르는 것에 도달하였으므로, 우리는 여기서 철학적 측면과 과학적 측면 그리고 그것들의 상호관계를 살펴야 할 것이다.
-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는....그의 이해로는, 만일 어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준거점이 없다면 부조리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개념은 도덕의 영역에서 가장 쉽게 이해된다. 만일 절대적인 도덕 기준이 없다면, 사람들은 최종적으로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여기서 "절대자"는 언제나 적용되는 것, 최종적이거나 궁극적인 기준을 제공하는 것을 뜻한다. 만일 도덕이 존재할 수 있으려면 절대자가 있어야 하고, 진정한 가치가 존재할 수 있으려면 역시 절대자가 있어야 한다. 만일 인간을 넘어서는 절대자가 없다면, 개인과 사회의 도덕적 판단이 충돌할 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최종적인 권위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상충하는 견해들 속에 다만 방치되고 있을 뿐이다.
- 비기독교 철학자들은 희랍 시대부터 현대 직전까지 세 가지점을 공유했다.
첫째, 그들은 합리주의자였다. 즉 그들은, 사람이 자신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고 자신의 보편자를 만들기에 충분하게 개별자들을 모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합리주의는 인간 자신의 외부에서 오는 지식, 특히 신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거부한다.
두번쨰로 그들이 공유했던 점은, 그들은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성의 타당성을 받아들였다....
셋째, 합리주의자들이 이성의 타당성을 신뢰했던 것에 덧붙여, 18세기 이전의 비기독교적 철학자들은 또한 낙관론적이었다. 그들은 오직 이성으로 실재의 통일되고 참된 지식을 수립하려는 자신들의 노력이 성공할 수 있으며, 성공할 것이라도 생각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이 우주에서 직면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그리고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설명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모든 지식과 모든 삶을 통일시킬 무엇을 희망했다.
-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자, 하나님과 인간다운 인간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졌다. 물리학, 천문학, 그리고 화학을 따라 심리학과 사회 과학이 닫힌 인과율의 체계의 일부가 되었을 때, 하나님만 죽은 것이 아니었다. 인간도 역시 죽어 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틀 속에서는 사랑도 죽었다. 전적으로 닫힌 인과융ㄹ 첵계 속에서는 사랑,도덕, 인간들의 자유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인간은 무zero가 된다. 사람들과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이 그 기계의 부품이 되어간다.
절정기 르네상스의 인본주의가 계몽주의를 거쳐서 완숙기로 가고 있었는데, 르네상스 인본주의에서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자율적인 존재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 흐름이 계속되었는데, 현대적 근대 과학에 이르게 되면서 사람은 잠식되고 말았다. 본래의 인간은 죽었다.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무의미하게 되었다.
- 히틀러는 수없이 여러 번 기독교와 그 자비 개념은 :약자를 지배하는 강자의 윤리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공표했다. 독일에서 나치 사회당이 등장하는 데에는 확실히 많은 요인이 작용했다. 예를 들면, 기독교적 합의가 세속적인 합리주의적 철학과 낭만적 범신론 그리고 (합리주의를 신학 용어로 수용한) 대학과 많은 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상실되었다.
나치 운동은 이런 사고방식의 마지막 결과가 아니었다. 좀더 조용한 방법으로, 그렇지만 아주 의미심장하게 오늘날 유전공학의 옹호자들 가운데 일부가 같은 논증을 사용하여, 의학적 진보를 통해서 약자가 살아남아서 더 약한 차세대를 낳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나아가 그들은 적자를 번식시키는 데에 유전공학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본주의는 인간을 자율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나타난 결과는 인본주의의 주창자들이 이상적으로 그렸던 것이 아니었따.
- 이성의 영역에서는 사람들이 심지어 사람까지 모든 것을 기계로 보는 위치로 점차 다가가게 될 것임을 의식한 사람들이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생애 말년에, 인본주의적으로 수학에서 출발하면 개별자들만 가지게 되고 결코 보편자나 의미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했다.
- 루소와 그 추종자들은 이성을 깔보고 문명의 제약들을 악으로 보았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도처에서 그는 쇠사슬에 얽매여 있다!" 루소는 원시적인 것을 순전한 것으로, 자율적 자유를 궁극적 선으로 보았다. 우리는 그가 옹호한 자유가 신이나 성경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온갖 제약으로부터의 자유, 즉 문화로부터의 자유, 모든 권위로부터의 자유, 개인의 절대적 자유, 개인이 우주의 중심이 되는 자유였음을 이해해야 한다.
- 루소의 자율적 개념은 그가 개인에게서 사회로 옮아 갔을 때, 그의 제시 내용과 충돌하게 되었다.
'사회계약론' 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사회의 협약이 공허한 구호에 끝나지 않으려면, 그 협약은 홀로 나머지 사람들에게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보장을 받아, 일반 의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누구나 전체에 의하여 거기에 복종하게 강제되도록 해야 한다. 이는 다름 아니라 그가 자유롭도록 강요당한다는 것을 뜻한다"
루소의 글에서건, 루소의 입장을 결론까지 이끌어간 공포 정치에서이건 상관없이 다시 한 번 인본주의적 유토피아즘은 독재로 끝난다.
- 루소의 고백록에서 그는 최상의 교육은 사실상 교육의 부재라고 주장했다. 이 사살은 오늘날 '자기 표현'에 대한 후대의 교육이론에 영향을 끼쳤다.
- 사람은 누구나 모순을 가지고 있지만, 루소가 교육에 대하여 많은 글을 쓰는 동안, 정부에게서 난 다섯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내 버렸던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 루소의 추종자인 고갱이 직면했던 딜레마 - 완전한 자유를 찾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타히티 섬으로 가서 고귀한 야만인 속에서 자유를 찾으려고 함, 잠시 타히티에서 살고 나서 고갱은 고귀한 야만인의 이상은 허구에 지나지 않음을 발견함,
그의 마지막 위대한 그림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서 그는 인간은 자신 안에서는 궁극적인 해답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타히티 섬에서 고갱이 발견한 것은 죽음과 잔인함이었다. 그는 이 그림을 끝내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 사람들은 자신만한 인본주의에서 출발하여 자신을 자율적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더 위대해지기는 커녕 자신이 분자의 덩어리로 끝나고 말았음을 발견할 뿐이었고, 그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 프랑스 화학자인 루이 파스퇴르(1822-1895)가 당시에 공인되었던 생명의 자연적 발생이라는 개념, 즉 생명체가 언제나 비생명체에서 생성한다는 개념이 불가능하다고 증명했기 때문이다. 1864년 파스퇴르는, 만일 비생명체가 저온 살균 처리가 된다면, 거기서는 생명체가 나올 수 없음을 보였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전에 비생명체에서의 생명의 자연적 발생이라고 받아들였던 사실은 잘못이었고, 생명은 언제나 생명체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저온 살균법으로 생명의 모든 요소를 없앴을 때, 그 죽어 있는 것에서는 어떤 생명체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사람들은 새로운 요소, 즉 긴 시간 범위를 추가하여 생명의 자연적 발생의 개념으로 되돌아갔다.
우주의 전체 윤곽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어 낸, 비인격체+시간+우연이라는 방정식을 현대인들은 신앙으로 붙잡고 있다.
제9장 현대 철학과 현대 신학
- 중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갔을 때 우리는 어떤 인본주의적 요소가 교회에 들어왔던 사실을 발견했다. 종교개혁의 본질은 이들 요소를 교회의 가르침에서 제거하는 일이었다. 반면,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은 르네상스에서 발전하여 다시금 계몽주의에서 더 진보하였다. 계몽주의의 가르침은 독일 대학의 여러 학과에 널리 퍼졌고, 신학적 합리주의가 18세기에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 사상은 점차로 독일 신학과를 통하여 19세기에 절정에 달하였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중세 때 교회에 들어온 인본주의적 요소를 교회에서 제거했지만, 더욱 전체적인 형태의 인본주의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침투되었고 점차로 로마 카톨릭을 포함한 온갖 종파의 교회들에 전파되었다.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이제 신학과 신학 용어에서도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는 이들 신학자들이 합리주의의 전제들을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다. 르네상스가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를, 그 후에는 플라톤과 기독교를 종합하려고 시도했듯이, 이 사람들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와 기독교를 종합하려고 했다. 사람들은 이런 시도를 종종 "종교적 자유주의religious liberalism"라고 부른다.
제10장 현대의 미술, 음악, 문학 그리고 영화
- 루소, 칸트. 헤겔 그리고 키에르케고르 이래로 철학자들은 지식의 통일성과 삶의 통일성에 대한 희망을 상실하고서 실재에 대한 파편화된 개념을 제시했다. 그러자 미술가들은 그 방식대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이 견해의 결말이 모든 사물의 부조리라는 사실을 먼저 이해했던 사람은 바로 미술가들이었다. 일시적으로 이들 미술가들은, 르네상스의 화가들이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랏듯이 철학자들을 뒤따랐다. 르네상스에서도 역시 철학(토마스 아퀴나스)이 먼저였고, 그 뒤를 화가(치마부에와 지오토)가 따랐고, 저술가(단테)가 또 그 뒤를 따랐다. 이 사실은 20세기에 파편화된 실재의 개념이 번저갔던 것과 같은 순서였다. 철학자들이 먼저 지적으로 표현한 것을 후에 미술가들이 미술적으로 표현했다.
잭슨 폴록의 경우가 아마도 미국에서,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신중하게 그림을 그린 가장 분명한 예일 것이다. 그는 캔버스를 마루에 깔고 그 위에 흔들리는 페인트 통을 매달아 거기에서 물감이 떨어지게 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우연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잠깐만 기다리라. 그의 캔버스 위에 그려진 물감의 선에는 질서가 없는가? 물론 질서가 있는데 왜냐하면 사실상 그의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린 것은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주는 제멋대로 된 우주가 아니다. 즉 우주에는 질서가 있다. 그러므로 흔들거리는 깡통에서 떨어지는 물감이 캔버스 위에서 움직일 때, 물감의 선은 우주의 질서 그 자체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우주는 이들 화가들이 말하는 그런 우주가 아니다.
- 아치볼드 러셀 경은 콩코드 여객기를 설계한 영국인 설계가였다. 뉴스위크지의 유럽판의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많은 사람이 콩코드의 설계는 에술 작품이라고 느낍니다. 당신은 콩코드를 설계하실 때 미적인 겉모습을 고려하셨습니까?" 그의 대답을 이렇다. "사람이 비행기를 설계하려면, 반드시 자연의 법칙에 가능한 한 근접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자연 법칙 속에서 활동하며 그것을 침범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의 미적 관념은 자연의 미적 관념과 일치하게 되어 있습니다. 콩코드의 모든 모양과 곡선은 마치 자연 법칙에 의해 정해진 것처럼 자연의 흐름에 따르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점 때문에 나는 소련의 슈퍼소닉 비행기가 우리 비행기의 도용이라는 주장을 의심합니다. 러시아인들도 우리들처럼 자연에 의하여 자신들에게 부과된 똑같은 기본적 현상을 경험하고 잇습니다."
제11장 우리의 사회
- 대법원의 판결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인격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는 분명히 흑인 노예를 비인격으로 보았던 우리 조상들의 잔인한 점에 대하여 한탄과 외침이 있었다.
- 법원들은 자의적으로 태아에 대하여 "살아 있음"을 "인격"에서 분리시켰다. (태아는 혼자 내버려두면 살 수 없다는 이유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뜻)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노인들에게도 자의적으로 같은 식으로 하지 않으란 법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렇게 계속 나아간다면 안락사가 점차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투표 결과 대다수가 원할 때, 소위 식물 인가의 몸을 살려서 그들의 사지와 피를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 더 기독교적인 문화의 시대에는 판단할 절대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다수의 투표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성경을 가지고 사회를 판단하고 경고할 수 있었다. 도덕과 법률에 대한 절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합의가 사라진 만큼 이 절대는 사회적 세력으로는 사라졌다 51퍼센트 투표의 절대성에 기초를 두고서, 히틀러가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면 그가 원하는 대로 완전하게 행할 권한을 가질 수 있었음을 기억하자. 이런 기반 위에서는, 도덕과 법률이 일반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런 기반 위에서는 만일 다수 투표가 그것을 지지한다면, 노인이나 난치병 걸린 사람, 정신이상자를 죽이는 것이 "정당한"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집단에 있는 사람들을 비인격이라고 선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목소리도 거기에 대항하여 소리를 높일 수 없을 것이다.
- 우리가 1장에서 살펴본 대로, 희랍인들은 사회(폴리스)가 그 위에 무엇을 세우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한 최종 권위가 아님을 알았고, 오늘날에도 그것은 여전히 충분히 강력한 것이 아니다. 만일 절대가 없다면 그리고 우리가 쾌락주의의 혼란이나 51퍼센트의 절대성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단 한가지 대안이 남아 있다. 즉 권위주의적 자의적 절대를 주는 한 사람 혹은 어느 엘리트가 그것이다.
여기에 단순하지만 심오한 규칙이 있다. 만일 사회를 판단할 절대가 없다면, 사회가 절대라는 것이다.
- 침묵하는 다수 가운데 다수가 젊거나 늙었거나 상관없이 자신들의 생활 양식이 위협받지 않는 한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자유의 손실을 계속 당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그리고 대체로 개인적 평안과 풍요가 다수가 갖는 유일한 가치이므로, 정치가들은 당선되려면 이런 것들을 약속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정치는 주로 이상의 문제가 아닌 것이 되어-점차로 사람들은 자유와 진리라는 가치에 감동하지 않게 되었다-개인적 평안과 풍요라는 사탕 발림을 선거 구민에게 제공하는 문제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한, 적어도 이런 것들의 환상만이라도 가지고 있는 한,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 에드워드 기본은 로마 제국의 쇠퇴와 멸망에서 다음의 5가지 특징들이 로마 말기에 나타난 특징이라고 말했다.
1. 쇼와 사치 (즉 풍요)에 대한 고조되는 애호
2. 아주 부유한 자와 아주 가난한 자 사이에 넓어져 가는 간격
3. 성에 대한 집착
4. 예술에서 독창성으로 가장된 기형성, 창조성인양하는 열정주의
5. 국가를 떠나려는 욕구의 증대
우리는 1장에서부터 긴 여정을 거쳐왔지만 ,다시 로마로 가고 있는 것이다.
제12장 조작과 새로운 엘리트
- 만일 사람이 프란시스 크릭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인간은 비인격적인것 +시간+우연의 총합에 불과하다. 그는 확장되어 더 복잡한 엥너지 소립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바로 우리 시대는 인간의 삶을 무시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으로 우리는 태아를 낙태시켜 죽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인에게 안락사를 소개할 것이다. 전자는 이미 실행되고 있는 것이고 후자에 대한 문도 열렸다.
그래서 프란시스 크릭은 모든 범위의 "유전 공학"을 즉각 활용하자고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이에 따르면 누가 다음 세대에 부모가 되어야 하며, 누구를 낳아야 하며, 그리고 누가 아이를 가져야 하는지를 어떤 집단이 결정하게 된다.
제13장 대안
아무런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개인적 평안과 풍요라는 빈곤한 가치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압도적인 압박이 덮치고 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점점 조작적인 권위주의 정치를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미 여러 종류의 압력이 지금 우리에게 가해지고 있다.
경제적 붕괴 : 나는 독일인들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인플레이션 때문에 히틀러 바로 전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신뢰감을 잃었던 사실을 잊어버릴 수 없다. 역사는 경제적 붕괴의 시점에서는 사람들이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지고 오히려 통제를 받아들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중요한 가치가 개인적 평안과 풍요일때는 위험이 분명히 훨씬 더 크다.
팽창주의 국가, 제국주의 국가, 공산주의 국가와 서구 사이의 전쟁이나 전쟁의 심각한 위협
폭력의 혼돈-특히 개별 국가나 세계에서 일어나는 임의적 폭력이나 정치적인 폭력과 무차별 테러 행위
세계의 부의 급진적인 재분배
세계의 식량과 다른 자연 자원의 계속되는 부족
만일 이러한 압박이 계속하여 커지면, 실상 그렇게 될 것 같은데, 여러분은 사람들이 젊은이나 늙은이나 할 것 없이, 자신이 손해를 크게 보고 혹은 현재 가지고 있는 개인적 평안과 풍요를 희생하면서까지 자유나 개인을 위하여 일어설 것 같은가? -기독교적인 종교개혁의 기반을 가져 본 적이 없는 나라들은 먼저 권위주의에 굴복할 것이다.
- 옳고 그름에 대한 기반이 없이 오직 종합의 개념, 실용주의 그리고 공리주의만으로는 국내 문제나 국제 문제에서 당장 시급한 평안과 풍요를 위해 포기하지 않을 것이 무엇인가? 연약한 인본주의적 이상은 우리 시대에나 미래에도 충분하지 않고 또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만일 경제적 경기 후퇴가 더해진다면, 만일 개인적 평안과 번영이 없어지리라는 두려움이 커진다면, 만일 전쟁과 전쟁의 위협이 증가된다면, 만일 폭력과 테러 행위가 만연해진다면, 만일 세계에 있는 식량과 다른 자원이 점차 고갈된다면, 그 경향은 감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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