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그레이 수트, 낡은 검은색 서류 가방, 잘 닦여 광이 나는 검은색 구두, 그리고 듬성듬성 비어 있는 머리숱을 가진
50대의 샐러리맨(님)이였다.
그 분은 버스의 하차문 바로 앞에 위치한 좌석에 앉아 계셨다.
난 버스를 내리기 위해 하차문의 봉에 몸을 반쯤 기대어 있었다. 반짝거리는 커다란 스마트폰의 화면에 반사적으로 눈이 갔고,
그렇게 그 50대의 샐러리맨(님)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그 분은 엄청 야한(?) 사진들을 감상 중이셨다.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좌측으로 움직이며 엄청나게 많은 사진들을 휙휙 거리며 감상하고 계셨다.
물론 그럴 수 있다. 난 그 분이 그 사진을 보는 것을 정죄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가 인상적이였던 것은 그 사진을 보는 그 분의 태도였다.
그 분은 왼 손으로 스마트폰 케이스를 잡으며 화면을 가리고 계셨다.
서있던 나 외에는 그 분이 어떤 것을 보는 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분의 이성은 공공 장소에서 이 사진들을 보는 것이 부끄럽고 옳지 않다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의 본능은 이성보다 가까웠을 것이고 자신도 모르게 (아마 우연히 그런 사진들이 모여 있는 곳에 접속하셨겠지만)
이성의 통제에서 벗어나서 그런 사진들을 보게 되셨을 것이다.
사랑스럽고 귀한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어떤 고객분께 업무 관련 안내를 드리기 위하여 고객분의 스마트폰으로
안드로이드 플레이스토어(앱스토어)에 접속을 했다고 한다.
플레이스토어(앱스토어)에는 기본적으로 '최근 검색어 저장'이 세팅 되어 있다.
점잖아 보이던 그 분의 검색어는 차마 말로 담을 수가 없을 정도로 야시시 했나 보다.
나도 같은 경험이 있다. 전 직장에서 어떤 분의 스마트폰 세팅을 도와드렸는데, 그 분의 구글 검색어는 점잖아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엄청나게 저돌적이고 야시시하고 차마 말로 담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나도, 사랑스럽고 귀한 친구도 그 분들께 모른척 할 수 밖에 없었다.
"뭐 이런걸 검색하고 그러세요?"
라고 말하기에는 덜 친했다.
(진짜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 그 사람의 인터넷 검색어를 확인하라!)
인터넷이 생활이 된 이후로 우리의 검색어와 우리가 머무르는 인터넷 사이트는 우리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패턴과 비밀번호로 잠겨 있는 스마트폰의 검색 기록과 앱은 우리의 '관점'을 말해준다.
자극적인 신문 기사 제목을 클릭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자제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어려울 정도이다.
(참고로 크롬사용자는 Adblock같은 앱을 이용하여 불편한 광고들을 차단할 수 있다-)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이라는 좋은 책이 있다. 금연만큼 어려운 것이 '미디어 차단' 이라고 한다.
니콜라스 카는 실제로 홀로 별장에 들어가 모든 미디어를 차단하는 생활을 실험했는데 '금단 증상' 까지 느꼈다고 한다.
난 광고를 전공했고, 광고 관련 일을 오랫동안 했고 영화와 책과 음악을 좋아한다. 즉, 미디어에 관심이 많았다.
미디어와 문화의 영향력이란 우리의 생각보다 더 우리의 자유의지를 억압한다.
누구나 어릴 때 봤던 공포영화중에 잊혀지지 않는 장면들이 있을 것이고,
아직도 부를 수 있는 오래된 만화영화 주제곡들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트라우마라고 말할 수도 있는 몇 몇 끔찍한 영상들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에 공포가 몰려 온다.
(물론, 내가 특별히 예민?해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스마트폰은 양날의 검이다.
Evernote를 통한 폰-데스크탑의 문서 공유, 각종 클라우드 서비스, 모바일뱅킹, 스케줄 관리, 설교 듣기, 성경검색, 영어사전,
음악듣기 등등등은 내 생활을 굉장히 편리하게 바꿔주었다.
하지만 그만큼 좋지 않은 문화들도 쉽게 접할 수 있다. 마음 먹고 검색만 몇 번 하면 별의별 나쁜 정보들도 쉽게 즐길 수 있다.
내가 이렇게나 보수적인 사람이였나?
아마 요즘 사람들이 보면 '이건 무슨 꼰대야~'란 말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상관없어.
기본은 기본이잖아.
크리스천이라면 스마트폰과 인터넷 검색어에 떳떳해야 한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당신을 보고 있다는 그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부끄러울 짓은 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해야한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자리는 양보하고, 길 가다 사람을 치면 사과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뒷 사람을 위해 잠시 잡아 주고, 누가 날 위해 잡아주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운전 중에 깜빡이 없이 끼어 들어도 창문 열고 욕하지 않고, 주일 예배를 위해 불법 주차를 하지 않고.
컨닝을 하지 않고, 아는 얼굴을 만나면 인사하고, 길거리에 침을 뱉지 않고,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나쁜 문화를 즐기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늘 지킨다는 말은 아니다.
치열하게 가슴 속에 십자가 목걸이를 만지작 거리며 참는 전쟁, 온유함을 위한 전쟁을 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기본을 지키는 것을 바보라고도 표현한다.
"다 그래, 다 이렇게 하는 거야, 이게 빨라, 이게 편해, 아무도 몰라" 라면서.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맑은 물을 한 방울씩 내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구정물을 한 방울씩 즐기며 "다 그래"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속이 터진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늘 시험에 빠지는 나부터가 속이 터진다.
하나님이 보시면 얼마나 속이 터질까?
세상에서 구별되지 않는 선데이 크리스천들이란.
세상 속에서 기본을 지키는 어렵지만 당연한 영적 전쟁 (기본을 전쟁이라 표현하는 내 처지가 슬프다.ㅠㅠ)이 필요하다!
마지막은 위에 언급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이라는 책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예수회 사제이자 언론학자인 존 컬킨은 1967년 "우리는 도구를 만들고, 그 후에는 도구들이 우리를 만든다"고 말했다.
컬킨의 지적인 멘토였던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우리의 도구는 이 도구가 그 기능을 증폭시키는 우리 신체의 어떤 부분이라도 결국 마비시키게 된다"고 말했다.
맥루한의 용어를 빌리자면 농부들은 기계식 써리와 쟁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토양에 대한 감각을 일부 잃어버렸다.
맥루한이 인정했듯이 기술이 초래하는 마비효과를 관찰한 최초의 인물은 그가 아니다.
이 점을 경계하면서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아마도 구약성서의 시편 115:4-8일 것이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