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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기독교인

예정론 해설 - 박영선 목사님

박영선 목사의 예정론 해설

박영선 목사(남포교회)

1. 예정론

우리는 예정론에 대하여 ''''미리 정해 놓았다''''는 논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했다고 할 때, 즉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면 택한 자와 택하지 않은 자는 이미 계획되어 있는 것이므로 택함 받은 자는 구원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고 택함 받지 못한 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 얻지 못하는 고정된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인가라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나의 활동은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인가, 아니면 내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인가라는 어려움에도 빠지게 됩니다. 또한 예정론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상충되는 부분의 문제로 제기되는데 하나님께서 일을 다 하신다면 우리는 할 일이 없을 것이고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예정이 어느 부분인가에서는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정론만큼 우리들에게 어려운 대목은 없으며 또한 예정론만큼 오해되어 있는 부분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예정에 대하여 얘기할 때 우리의 운명과 전 생애의 코스가 고정되어 있다는 뜻에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지성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지성을 가지셨다는 그 뜻은 우리 인간의 운명을 출생부터 사망 그 이후까지 전 생애를 하나의 도표로 그려놓고 인간의 모든 발걸음도 미리 작성해 놓고 우리를 출생시킨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태엽을 감아서 레일 위에 올려놓은 장난감 기차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정론을 ''''하나님께서 사람의 인생코스를 설정해 놓은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하나님을 극히 평가절하하고 인간의 수준을 무시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지성을 가진 사람은 그가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할 때 계획과 목표를 설정하고 일을 하는 법입니다. 하나님도 그와 같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다는 것은, 어떤 일을 하실 때 그 일에 대한 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일하신다는 말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한 인간을 출생시킬 때에 그를 어느 지점, 어느 수준까지 도달시키겠다는 목표를 정한 계획 아래에서 출발시키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각자의 생애의 곳곳에서 ''''예'''' 또는 ''''아니오''''라고도 할 수 있으며 ''''보류하겠습니다''''라고도 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운명은 결정적이나 그 인생과정은 그때 그때 다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도착시키고자 하는 그 지점은 장소적인 곳이 아니라 수준에 초점을 맞춘 목표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멩이를 옮겨 놓듯이 갖다 올려놓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우리의 [수준]을 목표한 지점에까지 올려놓으려고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수준에 가야 할 사람은 바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우리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 수준에 도달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곳까지 도달시키기 위해서는 말로 할 수도 있고, 때릴 수도 있고, 그 외에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자세를 통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30대 맞고 또 어떤 사람은 300대 맞고 그 지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제기되는데 자유의지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목표지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면 ''예'' ''아니오''라고 하는 우리의 결정은 무가치한 것으로 무슨 의미가 있으며 이것을 가리켜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 이 생길 것입니다.


자유의지란 결정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간의 존재가치, 즉 인간의 인간됨을 논할 때 지, 정, 의로 나누어서 말합니다. 지, 정, 의, 세요소 중에서 인간의 존재는 궁극적으로 어느 곳에 위치한다고 생각합니까? [의지]에 나의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지와 정은 생각에 불과합니다. 생각하는 그 자체만으로는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의지란 내가 나의 두 발을 내려놓는다는 뜻입니다. 존재의 현주소가 [의지]에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동쪽으로도 가고 싶고 서쪽으로도 가고 싶을 때 동쪽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하는 것, 그 자체가 의지가 아니고 결국 두 다리를 그 곳으로 옮겨놓는 것이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는 길로 갈 때는 처음에는 말로 합니다만 결국 우리 앞에 가시덤불을 놓거나 불을 놓아서 돌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 길로 내가 나의 다리로 걸어간다는 것이 자유의지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길로만 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일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지 마십시오. 단지 자기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선택하는 길은 옳은 길이 아닙니다. 편한 길일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후 믿지 않는 자들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 막힌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지을 수 있는 기회들이 막혀서 죄를 안 짓게 되는 것이지 우리가 선해서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정론입니다.


운명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얘기는 자유의지에 관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권위에 대한 문제로 하나님과 내가 동등한 위치에 서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늘 이러한 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부분에서도 종종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의 권위를 동등하게 해놓고 이해하려고 하나 이것은 큰 오류입니다. 예정론을 얘기할 때마다 나오는 이 자유의지에 대하여 혼동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로마서 8장 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리 아신다"는 말을 예지, "미리 정했다"는 말을 예정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계획하시고 자신이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와 관계된 모든 것을 다 아시며 다 할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내가 이런 사람을 만들겠다''고 하시면 그러한 사람을 만들어 내시고야 만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정한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일을 하십니까?


성경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순서로써 택한 자를 부르시고, 칭의하시고, 성화시키고,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인 동시에 우리가 가야하는 완성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의 자리에 이르도록 그렇게 계획해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인간이 만들어지는 코스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에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을 때 그들은 죄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타락했습니다.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회복시켜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 대목이 예정론의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목적지까지 과는 과정에서 인간이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켰으나 하나님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그 목적지까지 인간을 도달시키고야 만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시면서까지 그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고집]이 이보다 더 잘 나타난 대목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정이 뜻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을 예정하셨습니까? 타락은 인간이 결정한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을 결정할 수 있었으나 운명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 이 부분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이 갖는 자유의지가 타락할 수 있었으나 그것으로 끝장나게 하지 않으려 했던 하나님의 계획은 결국 완성되었음이 예정론에서 보여지는 놀라운 부분입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제2타락, 제3타락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도달시키고자 했던 [운명]의 지점에까지 반드시 도달케 하고야 말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매 맞는 일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예정론입니다.

예정론에 대하여 우리의 운명이 하나님 앞에 있으니 우리는 놀아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까지 도달시키려고 계획하고 계시며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가를 잘 살펴서 매를 대시기 전에 말로 할 때에 알아듣는 자가 복있는 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예정을 이루시는 과정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이 말씀은 구원의 과정으로서 우리 신자들이 가야하는 것이며 인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예정은 우리 인생길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진행된다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그의 생애동안 그와 더불어 씨름하신다는 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 진흙을 손으로 빚어서 만든 후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외형적 작품이라면 내면적 완성의 부분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 내면적 완성부분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수준과 경지에 이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율법에 나타난 바 그 가장 높은 경지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참으로 깊은 뜻을 지니는 말입니다. 사랑의 깊은 의미로 파악해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한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동등한 입장으로 대우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권위적인 차원에서는 동등할 수 없으나 교제의 차원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동등하게 대접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동등한 입장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마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의 반대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은 증오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14세 미만일 때 나오는 대답입니다. 어떤 분은 사랑의 반대말이 ''무관심''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40세 때까지 나오는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장 큰 반대말은 동정이라고 봅니다. 동정은 무관심보다 훨씬 더 끔찍한 사랑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남녀에게 있어서 상대방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데, 이쪽에서는 ''저렇게까지 쫓아오는데 안 봐줄 수도 없고''라는 동정으로 대한다면 그 사랑은 곧 증오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사랑에 대하여 동정으로 답하는 것만큼 화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최대의 모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할 때에도 이 사랑의 개념이 적용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제로 눌러서 무릎을 꿇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동등한 입장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서 하나님께 항복하게 되는 그러한 사랑을 받아내시겠다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봅시다. A라는 여자와 B라는 남자가 연애를 하고 있었는데, C라는 남자가 나타나 삼각관계를 이루어졌습니다. 이 때 C라는 연적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참으로 약한 자입니다. 혼자 뛰어서 일등하는 마라톤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자존심에 관한 싸움입니다. ''얼마든지 올테면 오라''는 자세로 동등한 입장에서 여자의 선택을 받아내야 값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깊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멸망할 자리까지도 도달하지 않도록 간섭하여 강제로 막으시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죄를 좇는 것과 하나님을 좇는 것을 동등하게 놓고 선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불신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신자가 불신자보다 죄를 덜 짓는 것이 아니라 지은 죄의 결과를 볼 수 있어서 그 죄를 돌이킬 기한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동일한 죄를 범해도 돌이킬 기회가 없어 죽은 후에야 그 결과를 알게 되므로 지옥에 갑니다. 죽어보고야 알게 됨으로 돌이킬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은 죄의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께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신자의 커다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를 짓는 부분에서 신자들을 딱 차단하시지 않고, 우리의 자발적인 항복, 즉 하나님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사랑을 받아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지을 기회가 없어서 안 짓기보다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므로 하나님 편에 서기를 원해서 죄를 멀리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사랑을 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동정하시지 않으시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차원도 있습니다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속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이나 죽은 다음이 아니라 현존하는 현실의 순간 속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결단할 수 있고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나의 사랑을 받아내시고 나를 항복시키시기 위해서 나를 출생시키시고 출생 후 사망하기까지 인생이라는 시간을 두셔서 이 동안에 우리에게 이루실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칭의하시고, 성화의 과정을 거쳐 영화에 이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귀에 대고 말씀하시고, 수없이 그의 종들을 보내시고, 말씀을 듣고 보게 하시고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8)"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과 제가 지금 이자리에 한 형제로 있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을 일일이 부르시고 의롭게 만드시고 성화시키시고 영화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간섭하시며 오래 참으시며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목표를 설정하셨기에 각각의 인생들을 일일이 인도하셔서 도달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같은 섬세한 사랑과 크신 열심으로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우리 인생들을 배후에서 붙잡고 인도하시는 것이 예정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3. 신자의 적용문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니라(롬8:12~14)"

이 말씀에서 [죽는다] [산다]는 얘기는 [멸망받는다] [구원얻는다]는 내용이 이미 아닙니다. 1절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말씀처럼 이미 구원 얻은 자들에 관한 얘기인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성경이 [육신]이나 [세상]이라고 말할 때는 죄의 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죽는다]는 의미는 여기서는 하나님이 싫어하는 열매를 맺으면서 하나님 뜻에 어긋난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죄의 원리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들로 너희의 방향을 잡고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이 요구는 이렇게 살아야 신분이 결정된다는 얘기가 아니라 구원 얻은 자의 고귀한 신분을 이미 가졌기 때문에 그 신분에 맞는 수준이 되라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이 일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말하는 로마서 8장의 후반부로 넘어가서 살펴봅시다. 33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이 왜 나오겠습니까? 신자들이 송사 당할 일을 많이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뭐 저래''의 경우를 당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납득시키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범죄를 보고 비난하거나 당황해서는 안될 뿐 아니라 또한 내 자신의 범죄를 인해서도 자학하거나 좌절해서도 안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우리가 죽을 자리에서 떨어져 있었을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의 대가로 치르고라도 목적지에 도달시키는 하나님의 열심이라면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그것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게 할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나오는 얘기가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4~39)"


외부에서 오는 환난이나 내부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갈등으로도 나와 하나님의 사이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교만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구원을 이룬 것도 아니므로 교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절망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 이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데 우리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교만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이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결론으로 12장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이 말씀은 우리들의 삶에 대한 실제적인 요구사항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이나 자격이 없는 우리들을 어떠한 자비하심과 열심으로 자녀를 삼으시고 이 자리까지 오게 하셨는가를 기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제물이라, 그 제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생애를 살라는 것이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고통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온 인류가 기쁨과 생명을 얻은 것과 같이 신자는 자신이 제물이 되어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이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성경은 우리 신자를 "왕 같은 제사장(벧전2:9)"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권위와 권세와 신분을 소유하였으나 자신을 희생하여 이웃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임무를 지닌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안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이 기독교의 기독교 됨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들은 논리성이나 진리의 진리 됨을 보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같은 생활 영역에서 살면서도 자신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을 보고 복음이 갖는 엄청난 비밀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며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그들에게 ''자기 욕심을 위해 살지 않는다'' ''희생하면서 산다'' ''지면서 산다'' ''당하면서 산다''라는 생활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생활은 경우나 법이나 상식을 갖다 놓고 따지면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식과 법의 기준에 의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의 요구에 응하여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곧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지구상에서 가장 처절하고 경멸스러운 죽음인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가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와 봐라"고 조롱하는 자들에 대하여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답변하신 예수님의 자세를 우리의 삶의 목표로 갖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사느냐''는 것은 훨씬 힘든 문제이나 그럴지라도 그렇게 살도록 요청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신자는 복 받기 위해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복은 이미 받은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줄 것이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증거 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는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살고 계십니까?


혹시 예수님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자기들끼리 위로하면서,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는 자는 그분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선언하는 자이고 그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가르치고 명하는 대로 다 실행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늘 마음속에 머리에 넣어 가지고 다니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목표지점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인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못살지만, 알고서 못살면 죄스러움이라도 있는 것입니다. 모르고 못살면 떳떳하게 생각하는데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처사에서입니다.



[자료출처: 박영선著 [하나님의 설복]中에서]-캘거리개혁신앙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