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철 목사 신앙과 인생2] “이 길 외에 어떤 길을 가겠습니까?”
“이 길 외에 어떤 길을 가겠습니까?”
신학생 컨퍼런스에서 이재철 목사와 참석자들이 눈물 쏟은 사연
“목사님,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합니까?” 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 둘째 날인 8월 9일, 스무 명 남짓한 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해 목회하고 있다는 한 참가자는 질문과 함께 눈물을 쏟았다. 이재철 목사의 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었다는 그는 책을 대할 때마다 행복했지만, 정작 그렇게 살 자신이 없었기에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십자가가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겠나”는 물음과 함께.
이재철 목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허랑방탕한 알코올중독자에 도박 중독자였습니다. 마리화나에도 손을 대었습니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저는 도저히 목사가 될 수 없는 무자격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보혈로 저를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저를 당신의 종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살수밖에 없고, 죽도록 그분께 충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석자의 질문에 대답하던 이재철 목사의 목소리도 떨리기 시작했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이재철 목사는 눈물을 닦으며 질문을 한 참가자에게 “우리 목회의 동기와 출발점이 내가 아니고 그분이 된다고 하면 이렇게 까지라도 해야 하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이 길 외에 어떤 길을 가겠습니까 하고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참된 목회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목회 초년생의 절규에 이재철 목사는 쉽게 꺼내놓기 쉽지 않은 지나온 삶의 질곡을 조심스럽게 공개했다. 자신의 고백을 통해 한 젊은 목회자가 평생 참된 목회자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기를 위한 마음에서였다.
강의 형식이 아닌 질의응답이 오고가는 현장의 분위기를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한 일이기도 하다. 내용보다 더 중요한 정황을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내용을 옮긴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학생 멘토링 컨퍼런스의 현장은 멘티들의 영적인 고뇌와 멘토들의 따뜻한 위무가 함께하는 자리였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다음은 이재철 목사의 두 번째 강의 때 오고갔던 내용들이다.
참가자 / 예전에 스님과 신부를 모셔서 강의를 열었다고 들었다. 아이들에게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뉴에이지 사상과 다원주의가 강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를 뛰어넘는 감염이 들어오면 안 된다는 우려가 있는데 이런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이재철 목사 / 스님과 신부가 독신으로 산다. 그렇다고 개신교 목사가 스님과 신부가 추구하는 구도의 정신보다 엷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님도 사귀어보고 신부님도 사귀어보라고 진심으로 당부한다. 구도자가 어떤 중심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도'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일종의 '도'를 쫓는 구도자다. 한국의 유명한 사찰의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을 담 너머로 들여다보면 고무신들이 자로 잰 듯 가지런하게 놓여있고, 아무개 신부의 책상 위에는 비뚤어진 것이 없다.
내가 도를 추구하면 내 주위가 저절로 정돈된다. 목사들이 식당에 가면 구두를 꼭 남이 정리해줘야 한다. 우리 교역자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 교인들은 목사가 하는 말에 감동 받지 않는다. 목사가 떠난 책상을 보고 감동 받는다. 밥알을 지저분하게 남기지 마라. 책상을 깨끗하게 정리해라.
우리 구도의 정신은 신부, 스님 이상으로 철저해야 한다. 독신이 아닌 이상 가족이 함께 결단해야 한다. 아이들 키우면서 목사의 아들이 아니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도록 노력하고 있다. 내가 목사로 살기로 결단했기 때문에 내 아내와 아이들도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면 권위는 저절로 생겨난다. 함께 목회하고 살아가는 교인들에 의해서 권위는 생겨난다. 사람들이 목사를 신뢰한다.
목회자는 경제적인 자립이 되어야한다. 그것은 자기가 필요한 만큼의 돈을 스스로 벌어들일 수 있는 능력이 아니고 자기에게 주어진 경제적 상황에 자기를 맞출 수 있는 능력이다. 그 상황에 나를 맞출 줄 아는 것, 물질로부터 초월하는 것 그 이후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고 바울은 말한다. 100주년기념교회에서 415만 원 봉급을 받는다. 세금을 떼고 나면 약 370만 원 정도를 받는다. 내 아내가 홍성사를 경영하면서 약 300만 원 받는다. 거기에서 십일조한다. 판공비는 따로 없다. 내가 쓴 책이 상당히 많이 나갔다. 그 인세가 1 억이 모였을 때, 홍성사가 조그마한 창고를 지어야 해서 그 돈을 다 줬다. 또 인세가 5,000만 원 모였을 때 홍성사 직원들이 다 같이 홍성사 문을 닫고 터키 성지 순례를 다녀왔다.
내가 주님의교회를 퇴임했을 때, 교회에서 나에게 예우를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고 물어왔다. 주님의교회에서 몇 억 받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정말 타락했던 나를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나를 구하셔서 내가 주님의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내가 월급을 받는 고용인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교인들과 더불어 사는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퇴직금을 준다고 해서 사양했다. 재정 장로가 목사님이 퇴직금을 받지 않으면 후임자들이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문제 제기를 했는데,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그래서 법적 퇴직금만 달라고 했다. 퇴임할 때 한 달 봉급이 220만 원이었는데 열 달치인 2,000만 원을 퇴직금으로 받았고, 그 돈은 정신여고 건축 기금으로 다 냈다.
내 처와 나는 돈을 모으는 통장을 가지지 않고 우리 명의 집을 가지지 않기로 하나님께 서원하고 살고 있다. 늙어서 어떻게 살겠는가라는 질문에 어제 셰퍼 박사와 대천덕 신부 이야기를 하면서 나왔었는데, 두 분이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한 분은 알프스 산 속에서 한 분은 강원도 황지 산 속에서 계시는데 그분들이 살아생전에 단 한 번도 굶은 적이 없다고 했다.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 셰퍼 박사의 경우 어느 날은 살림 사는 집사가 와서 내일 먹을 것 없다고 했다. 새벽이 되니 사람들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청년들이 들어오는데 청년들 어깨에 빵, 버터, 과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평소 아침 식사 시간에 도착했다고 한다.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영국 런던에서 왔다고 했다. 몇 달 전부터 준비해서 어제 영국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셰퍼 박사에게는 그것이 그냥 빵이 아니었다. 주님께서 셰퍼 박사에게 빵을 주기 위해서 몇 달 전부터 영국 청년들을 감동시키고 비행기를 태워서 모든 것을 시간을 맞춰 오지 않았나.
나도 그런 리듬으로 살려고 애쓰고 있다. 목회자가 큰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노후 걱정을 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교인들에게 퇴직금으로 몇 억 내라고 하며 한국에서 요즘 싸움이 자주 벌어지지 않나. 우리가 정말 물질에서부터 자유하는 이 믿음, 내가 내 기득권을 포기하고도 걸어갈 수 있는 리듬으로 간다면 내게 예금 통장이 하나 없어도 하나님께서 내 노후 대책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참가자 / 내가 칭찬하면 하나님 칭찬을 가로채는 것은 아닌가, 칭찬은 어디까지 해야하는가?
이재철 목사 / 내가 주님의교회에서 목회할 때, 어떤 여집사가 새벽 기도가 끝나면 아무도 모르게 타월을 갈았다. 아무도 모르게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자리에 주님의 터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목회자의 칭찬과 사람의 칭찬이 얼마나 공허한지 알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하시는데 저 분만이 즐기는 하나님의 교류를 방해하지 말자며 새벽 기도 끝나고 바로 화장실을 가지 않았다.
헌금 봉투에 이름 안 쓰는 것도 그래서 시작한 일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일 원이든 만 원이든 내가 내서 하나님께 오는 위로를 내가 받으면 세상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가 아무 소용없게 된다.
우리가 아이를 키우는 데 단계가 있다. 교인들 중에는 어깨를 쓰다듬어야 할 교인도 있고 내가 말로 칭찬해야 할 교인도 있고 한 번 툭 쳐야 할 교인도 있다. 그러나 평생을 교인이 목회자의 칭찬의 틀 속에 갇혀 있게 하면 안 된다. 주님의 손길을 바로 느낄 수 있도록 통로가 되어주는 것이 목회자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참가자 / 100주년기념교회의 직분 호칭, 제도 문제에 대해 직접 들어보고 싶다.
호칭 제도는 잘 아시리라 생각한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제네바에서 칼뱅이 개혁을 했다. 칼뱅이 개혁을 할 때 칼뱅은 장로교회라는 이름으로 만들지 않았다. 칼뱅은 개혁 교회(reformed church)를 시작했다. 교황 일인 치하의 교회를 개혁(reform)하는 교회를 만든 것이었다. 교인들의 뜻을 대의하는 장로들을 뽑아서 대의정치를 하게 한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개혁하는데 내가 제네바에서 하는 시스템을 따를 필요가 없다. 현지의 시스템에 맞추라고 칼뱅이 말했다. 그 모든 교회의 이름은 개혁 교회(reformed church)다. 칼뱅의 개혁 정신을 살리는 교회다.
교인들이 선출한 장로가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장로를 하는 것이 미국의 정서에 맞지 않아 미국의 장로교회는 직능의 의미로 장로를 삼았다. 20대 장로는 20대를 대표하는 직능 대표로 뽑히는 것이었다.
이 장로교가 한국의 유교적 가부장 제도와 결합하면서 변형됐다. 지난 1~20년 동안 장로 제도에서 그치지 않고 장로에 필적하는 직분을 주기 위해 세계 유일의 권사 제도를 만들었다. 이 직분 제도가 한국의 교회를 부흥하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100년을 지나오면서 장로, 권사가 계급화되고 서열화되면서 교회의 문제점이 된 것이 실상이다.
그래서 봉사자인 장로, 권사 투표를 하는 데 돈을 쓰지 않나. 교회에 따라서 차량 안내를 해라, 성가대 대장을 해라하는 식의 장로 잘 뽑히는 부서가 있다. 오늘날 한인 교회는 어떤가? 장로, 권사 안 주면 교회를 떠나지 않나. 장로, 권사라고 하는 제도가 변질된 것이다.
한국 교회의 장로, 권사 제도가 큰 기여는 했지만 지금은 부작용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바꿔 입어야 할 백년 된 옷을 바꾸지는 않는다. 장로를 뽑아야 임직예배할 때 헌금을 할 것이고, 그게 교회 재정이 도움이 되니, 이런 악순환이 반복된다. 감리교는 본래 장로가 없지만 한국에는 있지 않나. 침례교도 마찬가진데, 호칭 장로가 재작년 통과됐다고 들었다. 다른 교단과 일할 때 다른 교단은 다 장로가 나오는데 자기들만 집사가 나오면 차이가 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걸 보면 장로 제도가 철저한 계급제가 되었다고 봐야한다.
처음 주님의교회에 가면서 나는 10년, 장로는 13년으로 임기를 정했다. 내가 퇴임하고 나서 장로들이 인수인계해야하니 3년을 보탠 것이다. 장로, 권사, 집사는 임기 끝나면 백의종군하는 것으로 법을 바꿨다. 이러한 결정 이후에 다른 교회에도 임기 정하고 신임 투표하는 무브먼트가 있었다.
2005년부터 목회한 100주년기념교회는 20개 교회와 26개 교회 기관이 연관돼 있는 초교파 교회였다. 교회는 모든 교파를 어우르는 연합교회지만 제도적으로 어느 한 교회의 헌법을 따르는 일은 없는 독립교회로 존재했다. 이런 초교파적인 교회라면 한국 교회에선 언젠간 고쳐져야 하는 장로, 권사의 폐습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해 제도를 바꾸자고 했다. 장로, 권사가 서열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호칭제로 하자고 제안했다. 아무리 믿음이 뛰어나더라도 돈이 없으면 장로가 될 수 없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기 때문에 일정한 기준을 두고 호칭제 장로를 두자고 했다.
막상 시행되자 우리 교인이 늘어나다 보니 우리 교회가 마구 장로, 권사를 세우기 때문에 교인이 늘어난다는 이야기가 도는 등 여러 가지로 역풍을 맞았다.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바뀌어져야 할 것이라고 본다. 20~30년 후가 되면 현재와 같은 장로, 권사 제도는 바뀌어 질 것이라고 본다. 첫 번째 발판을 까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다.
참가자 /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영어 성경에 맨 앞에 사도신경에 보면 descended into hell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글 사도신경에는 이것이 없다. 모든 교회가 이것을 신앙으로 고백한다. 그 구절을 임의로 삭제하고 신앙고백하는 나라는 유일하게 우리나라밖에 없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구설수에 오르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다.
이 구절이 빠지게 된 정황은 아무도 모르지만 추정할 수 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와서 번역했던 초기 사도신경에는 이 구절이 들어있다. 천주교, 성공회에는 들어있다. 그런데 1905년인가 언제인가 각 교단 선교사들이 각 교단별로 찬송가를 가지고 있다가 통합 버전을 만들기로 했는데 한 교단의 선교사가 그 부분에 반대 의견을 냈다. 한 찬송가를 만드는 조건으로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시고' 이 부분을 빼자고 주장했다. 그 찬송가에서부터 빠져있는 것을 보고 추정할 수 있다.
한기총에서 2년 전에 NCC 와 같이 주님의 기도와 사도신경을 재번역했는데 거기에 보면 각주를 달았다. '대부분의 사본에 없었다'는 말이 첨가됐다. 한국의 대부분 사본에 없다는 말이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가르칠 때, 누군가가 젊은 선교사가 의도적으로 뺀 불완전한 사도신경을 그대로 가르치겠는가? 원문을 가르쳐야한다고 생각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지옥에 내려가서 그 곳에서부터 천국에 가셨다고 나와 있다. 그래서 천상, 지상, 음부가 예수님의 힘이 모두 미치게 되는 것이다. 나도 신학교에 가서 사도신경 원문에 그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우리는 라틴어 원문으로 교인들에게 사도신경 강해를 했다.
예수 안 믿고 지옥에 간 사람 예배를 드려줄 수 없다는 목사의 이야기를 봤다. 지금 내 남편이 예수 믿지 않고 교통사고로 죽은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그 장례식을 집전하지도 않고 기도도 안 해준다면 예수님의 은혜는 무엇인가 생각해봐야 한다.
모 기관지에 어떤 사람의 질문에 대해서 상담한 글을 읽었다. 자매가 교수에게 질문했는데 동생이 예수 안 믿고 죽었다. 눈만 감으면 동생을 위해 뭔가 기도를 해주고 싶었다. 내가 죽은 동생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냐는 질문이었다. 이에 안성모 교수는 목회적 차원에서 대답했다. 초대 교회, 가톨릭의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이야기하면서 신학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 목회적 차원에서 기도한다고 답변한 것이다. 그 글을 읽고 나는 안 교수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딱 한 줄 썼다. 단서를 달았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의 몫이니 구원의 여부는 우리가 이야기는 할 수 없다고 했다.
그 구절을 가지고 이재철 목사가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결국 그분들이 역풍을 맞고 그들이 그런 비방을 중단했다.
김영봉 목사 / 이번 주 설교 준비하면서 똑같은 이야기가 나와 말씀드리는데, 미국 사람이 새 도시로 이사 가서 교회를 찾는데 마땅한 곳이 없었다. 장례식에 참여를 했는데 그런데 집례하는 목사님이 이 사람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지옥에 갔습니다. 여러분들도 지옥에 가지 않도록 예수님 영접하라고 이야기 했다고 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가면서 남편이 아내에게 이야기 했다. "이렇게 용기 있는 목사라면 이 교회에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을 용기있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분별력이 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나는 코마상태에 빠져있는 사람조차 영혼으로는 하나님과 교통한다고 믿기 때문에 입으로 고백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분과 하나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우리로서는 그분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사람이 예수를 영접 못하고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관계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런데 교리적 판단, 잣대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참석자 / 오늘 날 시대가 말씀의 시대다. 그런 말씀이 소비되는 시대. 클릭 한 번이면 대한민국 명 설교가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데, 나 역시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걸 나누기도 한다. 스무 명의 성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는 나는 어떤 자리 매김으로 해야 하는지, 그렇게 좋은 설교를 다 들을 수 있는데, 내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들에게 담임 목사로서 이 말씀의 홍수에 시대에 무엇을 전해야하는지 알고 싶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는가. 목사님의 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을 때 마다 참 좋고 행복했다. 항상 그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며 눈물이 난다. 나는 그렇게 살 자신이 없다. 십자가가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겠나.
이재철 목사 / 참가자께서 말씀하신 “왜 그렇게까지 해서 사는가” 하고 물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분께서 살려주셨기 때문이다. 난 대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인 회사에 있다가 사업을 시작해서 큰 돈을 벌었다. 20대에 큰돈을 벌었으니 내 주위에 얼마나 많은 중매쟁이들이 있었겠는가. 50번도 넘게 중매를 봤다. 그러던 중 한 번 파혼의 아픔을 겪은 여성분을 만나게 됐는데 이 분과 결혼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내가 스물일곱 살 되던 삼월 하순에 결혼했다. 결혼하고 2주 만에 아내가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가진 돈으로 2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썼다. 심지어는 외국에서 사람을 불러오기도 했고, 전국의 기도원도 다 돌아다녔다. 하지만 결국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홀아비가 되어서 장례식에서 뼈를 뿌리면서내 마음속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나 이제 당신을 안 믿겠다. 당신 말씀을 통해 뭐라고 했는가. 이 세상의 어떤 부모가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나. 내가 당신에게 떡 달라고 했나, 내가 생선 달라고 했나, 당신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생명, 결혼한 지 2주 만에 암 환자 판명난 이 생명 구해달라고 했는데 생명 거두어갔다. 나도 당신 안 믿겠다”라고 결심하고 집에 갔다.
집에 가서 오후 3시에 침대에 누웠다. 왼쪽 창문에서 햇볕이 들어오는데, 처음 보는 빛이었다. 그때 마치 타자기가 활자를 칠 때 나는 소리와 함께한 글자씩 보이는 듯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죽어도 영혼이 죽지아니하리니.” 성경도 제대로 읽지 않을 때였기에 그런 구절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나는 버리지만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를 잃은 아픔은 가시지 않았고, 마리화나에 손을 댈 만큼 정말 형편없이 살았다. 하지만 그런 만큼 주일에는 더 열심히 봉사했다. 그게 면죄부였던 셈이다. 주일날 봉사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중략>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몇 번 만나고 나서 아내에게 “나는 당신의 결혼 상대가 될 수 없다, 나는 결혼해서는 안 될 7가지 이유가 있다. 결혼도 해본 사람이고, 나는 술꾼이고, 나는 당신만큼 세상의 학력도 좋지 않고, 지금 하고 있는 사업도 부도가 났다”는 등의 이유를 댔다. 당신 같이 훌륭한 사람은 정말 좋은 남편 만나라고 했다. 만약에 그저 내가 그 사람을 보고 이 사람 괜찮으니까 내 사람 만들어야지 했으면 깨졌을 것이다.
이 사람이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눈물을 흘리고 한 마디를 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래서 나와 결혼했다. 그런데 내 삶의 습관이 어디 가겠나. 결혼하고 늘 술 먹고 새벽 2시에 들어갔는데 아내가 나를 기다리다 엎드려 잠이 들어있는데 머리맡에 일기장이 있었다. 지금도 내 아내의 서랍을 열어보지 않는다. 그런데 그 때 이상하게 그 일기장을 한 번 봐야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일기장에 눈물 자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난 오늘도 하염없이 논길을 걸었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했다. 손목을 그을까, 약을 먹을까”는 내용의 고민을 쓰다가 “아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남편인데. 내가 믿어야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내 처는 술독에 빠져 있는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한 번도 안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방탕한 삶을 살아도 이 사람은 뭘 모르는구나 하고 여겼다. 그런데 그 일기장을 보면서 나 때문에 죽음까지 생각하면서도 예수 때문에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예수님의 사랑을 그렇게 수없이 들었는데, 그 사랑은 단지 책 속의 사랑이요, 전설 속의 사랑이었을 뿐 그런 사랑을 누구도 보여준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사랑을 내 아내의 일기장을 통해 확인했던 것이다.
그 순간에 난 술이 머리끝까지 취해 있었지만 성령을 만났다. 그 날 내 인생이 바뀌었다. 내가 밤새도록 지나온 과거를 보면서 잘못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고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내 인생길을 바꾸어야겠다. 그냥 있으면 또 이 인생을 답습할 것이기 때문에 인생길을 바꿔야겠다’라고 다짐했다. 내 인생길을 바꿔야겠다고 아내에게 이야기했더니 아내가 “고맙다. 이런 날을 기다렸다”고 했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사람들이 나에게 교회(주님의교회)를 개척하자고 제안해서 그 교인들에게도 나의 지나온 삶을 다 이야기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주님의교회를 시작했다.
나는 허랑방탕한 알코올중독자에 도박중독자였다. 마리화나에도 손을 대었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나는 도저히 목사가 될 수 없는 무자격자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보혈로 나를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나를 당신의 종으로 세워주셨다. 주님께서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고, 죽도록 그분께 충성할 수밖에 없다. (눈물)
그렇기 때문에 내 의지나 내 노력이나 내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하지 않는다. 그 분이 나를 살려주셨고, 내가 그 분에게 내 삶을 드릴 때, 그 분이 내 아이들, 내 삶을 책임져 주시는 것을 매일 매일 확인하기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이 이상 최선의 길이 없다.
질문한 분은 나와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정말 예수님의 보혈이 죽음에서 나를 살렸다고 생각한다면 그 은혜의 무게는 당신이나 나나 똑같지 않겠나. 우리 목회의 동기와 출발점이 내가 아니고 그 분이 된다고 하면 이렇게까지라도 해야합니까가 아니라 이 길 외에 어떤 길을 가겠습니까 하고 물어야 한다.
초대 교부 폴리캅이 예수를 부인하지 않으면 화형 시키겠다고 협박당했을 때, ‘그 분이 내 평생에 예수가 나를 배신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예수를 배신하겠느냐’고 화형길로 가지 않았나. 내 평생에 배신하지 않았던 그분이었기 때문에 그분이 내가 불타 죽은 이후를 책임져주지 않겠냐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출처] 주님의 교회 이재철 목사의 신앙과 인생-2 | 작성자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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