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고가 명료하지 않기에 명료한 글을 쓸 수가 없다. 현대 사회를 '잘' 살아가기에 나는 너무나 비겁하다. 나의 비겁함은 스스로를 향한다. 난 세상과 마주하여 직면하기보다는 적당히 회피하며 나를 보호하는데 급급했다. 나의 이 비겁함은 나 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좋은 사람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해결 방법을 찾지는 못하겠다. 한 때는 기독교에서 위안을 찾았고 자기계발에서 해법을 찾으려 했고 워커홀릭하며 중심을 비껴가는 삶을 선택했었다. 난 스스로와 다투며 내가 가진 문제점들을 깨달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과제인 해결 방법은 찾지 못하고 있다. 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내게 주어지는 하루하루의 과제들을, 혹은 재앙들을 우걱우걱 씹어 삼킬 뿐이다. 씹어 삼키는 내 눈빛에는 희망이 부재하다. 내가 찾는 것은 희망이다. 내게 주어지는 과제들이 무서운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시간을 낭비하며 인생을 망치게 되는 나의 잘못된 결정들이 무서울 뿐이다. 이미 저지른 수 많은 결정들은 언 땅을 파는 고통스런 삽질이였다. 삽질 끝에는 피로한 몸뚱이와 후회 뿐이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희망은 어떻게 찾을 수 있나? 고아와 다름없는 나는 한 번의 잘못된 결정에도 비빌 언덕이 없다. 서울역에서 언 몸을 누이는 삶을 살게될 수도 있다. 서울역의 그들에게는 희망이 부재하고 나도 희망이 부재하니 그들과 나의 내면의 상태는 동일하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평일에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주말에도 콜밴을 운전하며 스스로 돈을 벌고자 하는 의지 정도는 있다. 그 말인즉 나는 그들보다는 덜 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지금의 나란 결국 유전적 기질과 상황들이 만들어 낸 결정론적 자아일 뿐이다. 내 삶이 그들보다는 조금 더 나았나 보다.
슬프다 인생. 고통스럽다 삶.
터널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고 말했던 이들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속아 넘어갔던 자기 위안의 끝은 결국 고통이다. 어떤 터널에는 끝이 없을 수도 있으며 터널 끝에 다다르기도 전에 숨을 거둘 수도 있다. 혹은 아둥바둥 터널 끝에 도달했지만 그 끝에는 그저 시컴한 돌덩어리들도 막힌 벽일 수도 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결국 희망이 있을거라며 달콤한 말을 뱉는 나쁜 새끼들은 스스로의 벌을 받을지어다.
아, 명료한 글을 쓰고 싶다. 내 머리 속에 락스를 한 통 들이붓고 솔로 박박 부비고 싶다. 그리고는 깨끗한 물로 시원하게 헹구고는 뜨거운 드라이기로 바싹 건조하고 싶다. 그리고 깨끗해진 머리로 명료한 사고가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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