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세상 속에서 상처만 받아온 나의 고통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놀라운 치유의 스토리, 벅차오르는 감동, 어둠 속에 밝히 보이는 빛과 같은 형태의 깨달음이나 회심은 아니였다. 사실 나의 회심의 경주는 아직도 치열하게 진행중이다.
나는 나의 '죄'를 깨달았다.
2012년 말부터 교회를 다니며 듣게 된 '죄', '회개', '원죄' 같은 단어들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둥둥 떠다니는 연기 같았다. 나는 나를 단련하여 어서 빨리 정금으로 만들어 줄 신앙을 원했지 둥둥 떠다니는 단어들이 가득한 신앙을 원하지는 않았다. 난 갈급했다. 하나님이 갈급한 것이 아니라 내 상황을 변화시켜 줄 실체가 갈급했다. 내 갈급함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여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난 이제야 깨닫는다. 조급함, 두려움, 잘못된 기대, 갈망.
내가 지나온 신앙의 방황, 그 여정은 치열하고 버겨웠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은 아직도 나를 자유하게는 못하지만 몇 개의 점(dot)은 찍었다. 그 점이란 나의 죄를 깨달은 것이다. 연기같이 허공에서 둥둥 떠다니던 단어들이 실체로 다가왔다. 난 죄인 중의 죄인이였고, 괴수 중의 괴수였다. 무거운 죄가 어깨에 실체로 메어졌다. 놀랍게도 난 그 죄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또 다른 점(dot)은 자기 도취였다. 나는 내가 인격적으로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타인을 보며 나만의 왜곡된 잣대를 들고 이리저리 재보고는 바로 결정을 내리곤 했다. '넌 쓰레기' '넌 평민 '넌 그냥 부자' '넌 인간 말종 ' 넌 교인 코스프레' '넌 그나마 나은 놈'. 이러한 왜곡된 생각은 나의 자기 도취를 유지시켜 주는 도구였다. 나의 자기 도취는 상대적으로 남들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는 '나'란 인간의 자존심을 유지시켜 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비록 나란 인간은 너보다 나은 것 하나 없지만 인격적으로는 너보다 우위에 있다.' '네가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하지만 난 너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다. 내가 너보다 똑똑하다.'
결국 나의 유일한 취미였던 독서 또한 나의 자기 도취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독서였다. 난 뛰어난 사람들의 흠집을 찾는 하이에나와 같았다. 타인의 흠집은 나의 자기 도취를 유지시켜 주는 생명줄과도 같았다.
내가 하나님께 기대하고 바란 건 결국 타인보다 우월해지고 싶다는 열망이였다. 그 열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난 차라리 삶을 끝내고 싶었다. 세상의 기준으로 남들보다 뛰어날 수 없다면 '정신 승리'라도 해야했다. 이러한 나의 왜곡된 마음들이 결국은 역기능 가정에서 자란 탓이라고 생각하며 한동안 주어진 과거의 상황들만 원망하던 날들이 계속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원망은 창조주에게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나의 모든 고통과 고난의 이유,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난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원망이라는 표현은 나의 실제 행동에 비해 굉장히 신사적이다. 난 세상의 모든 더러운 욕설을 하나님께 쏟아부었다. 이런 허상을 믿어온 내 바보같음에 한스러워했다. 그리고 이런 허상을 내게 알려준 전도자와 목사들과 모든 크리스천들을 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노의 단계는 나를 다음 단계로 이어지게 하였다.
질투.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한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순전하게 믿는 자들의 표정과 말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없는 평안이 가득했다. 부러움과 질투가 가슴을 휘감았다. 난 세상에서도 실패자요, 믿음에서도 실패자가 된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 부러움과 질투의 단계에서 난 극심한 우울증에 사로잡혔다. 하나님이란 존재는 내 인생의 시작부터 현실적인 고통을 들이붓고는, 믿게 해달라는 나의 기도에도 등을 돌렸다. 그가 모두에게 등을 돌렸다면 난 차라리 괜찮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가 사랑하는 존재들에게는 여전히 따스함과 믿음과 평안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제외되었다. 난 그 어떤 크리스천보다 열심을 기울였는데 나만 제외된 것이다. 당신 하나 만나고자 기도원에, 스페인 순례길에, 성경에, 말씀에, 기도에 혼신을 다했는데 그저 일요일만 교회 나가는 신자들에게는 따스함을, 나에게는 절망을 준 것이다. 난 하나님의 존재는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믿게 되었다.
믿음.
하나님을 저버리고, 성경을 불태우고, 내 멋대로 살려고 마음을 먹었다. 하나님에 대한 저주는 끝이 없었다. 그가 존재하심을 믿었기에 나의 저주와 욕설은 공허하지는 않았다. 그의 불공평함과 이해할 수 없는 방치와 무관용과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그는 나를 진실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랬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나는 나의 죄성을 깨닫게 되었다. 원죄란 개념이 이해 되었다. 내가 끊임없이 지어온 모든 죄들과 자기중심성과 이기적인 품성과 교만함과 그 모든 것들을 교묘히 감추고 세상 속에서 아주 바르고 옳은 사람이라 인정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역겨워졌다. 나는 나를 조건없이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도 저울질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단지 하나님을 믿기를 원한다며 나의 신앙적 방황과 반항을 합리화 했지만 사실 나는 하나님을 믿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나의 인생을 한방에 역전 시켜 줄 수단만을 원했을 뿐이였다. 그 수단이 날 도와주지 않았기에 단지 분노하고 원망하고 저주했던 것이다.
이 더러움. 이 역겨움. 나의 끊임 없는 죄를 말하자면 하루도 모자랄 것이다.
맞았다. 나는 신자가 아니였다. 스스로 열심있는 척 했지만 내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의 열심은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성숙되어 가는 여정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나의 열심은 그저 내가 높여지길 원한 것 뿐이였다. 난 스스로를 완벽히 속인 최고의 사기꾼이었다.
2012년부터 시작된 신앙 여정에서 한 일년 간은 내가 진짜로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고 생각했었다. 실상 나는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만큼의 자리에 올라서지 못했기에 다른 방면에서라도 정신 승리를 해야 겠다고 생각한 쓰레기 같은 존재였다.
회심.
십자가의 사랑이란 개념이 왜 나에게 공허했는지 알게 되었다.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시고 피흘리신 예수의 죽음은 나와 하등 상관이 없는 역사적 사건이였다. 그의 부활은 단지 기적적인 사건을 통하여 예수의 신성함을 내보이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였다. 스스로 죄인이라는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의 나에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의 기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다.
하지만 난 이제 깨달았다. 예수의 대속은 날 위함이였다. 이미 수많은 죄를 저지르고도 버릇 없이 창조주에게 대들고 있는 나같은 어리석은 인간을 용서하시기 위해 필요한 신의 사랑이였다. 내가 약할 때나, 강할 때나, 내가 부요할 때나, 가난할 때나 그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나를 바라보셨다. 나의 분노와 저항 앞에서도 그 사랑은 묵묵히 나를 기다리셨다.
두려움.
하지만 나는 모른다. 내가 이 사랑을 깨달았다고 해서 내가 지금 당장 성인이 되거나 진짜 크리스천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안에 가득한 죄성과 잘못 된 자아가 한 번에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난 항상 기적같은 회심의 순간을 기대했었지만 그런 기적같은 일들이 일상적인 기준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난 단지 변화되어 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내 삶을 온전히 내어드린다는 일이 하루 아침에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노력 할 것이다.
하지만 난 두렵다.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고, 욕하고, 하나님은 나랑 상관 없다 할까봐 두렵다. 큰 두려움이다. 하지만 두려움 앞에 자포자기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 주어진 깨달음만큼 앞으로 나갈 것이고, 내게 주어진 능력만큼 난 예수를 위해 살 것이다.
난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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