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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안티 크리스찬

안녕, 크리스찬!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서의 나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의 자기 파괴적 행동의 가장 큰 요인은 실존의 하나님을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처지에 대한 미성숙한 방어 기제일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투정이기도 한데, 실상 나의 삶은 실존의 하나님외에는 어떠한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사방이 막힌 벽에서 울부짖는 초라한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구원자를 찾기 마련이다. 구원자의 구원의 행위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나름의 최선의 노력을 하기도 한다. 구원자가 좋아하는 행동을 한다던가, 구원자의 눈에 띄기 위하여 애처로운 기도를 한다던가 하는 식의 노력들 말이다.
 
그 모든 노력들이 좌절되고 구원자의 존재 마저도 의심스러워지는 상황이 닥치면 초라한 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많지가 않다. 나의 경우는 자기 파괴적 행동을 취함으로써 구원자에게 마지막 발악을 하게 된 것이다. 어차피 사방이 막힌 벽에서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가 없다면 마지막까지 구원자에게 희망을 요구하는 것이다. 다만, 젠틀한방법으로 통하지 않았으니 조금 더 파괴적인 방법을 통하여 요구하는 것이다. 어차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아들로 생각하시는데 더 이상의 자기 파괴를 용납하시거나 기다리시지는 않을 거라는 아주 순진한 기대이다.
여기서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모순의 종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분노하는 하나님이기도 하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속성을 내가 택했다 하더라도, 분노하고 처벌하는 하나님의 속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결국 모순의 종교이며, 하나님은 사랑과 처벌을 동시에 하실 수 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자식의 훈육을 위해 처벌 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처벌을 이해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 없이 처벌만 이어지는 상황이라면 그 부모는 자식을 학대하는 것이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나에게 실존의 하나님이란 처벌하는 하나님이며 그 큰 능력과 전지전능함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며 나에게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신이다. 그러한 신이라면 믿지 않는 편이 훨씬 나에게 득일 것이다. 죽음 이후의 지옥은 손에 닿지 않지만 그와 다를 바 없는 현실의 지옥은 눈을 뜸과 눈을 감는 모든 순간 순간에 깃들어 있다. 
 
몇 년을 이어온 나의 유일한 기도 제목은 ‘재물’ 이나 ‘권력'이나 ‘행복'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내 삶에 부단히 이어온 고통과 앞으로 다가올 고난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쉽게 행복해 질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에게 행복이란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 같았다. 이런 나에게 행복이나 권력이나 재물을 원하는 기도는 가당치도 않았다.
난 단지 하나님의 실존을 느끼고 싶었다. 고통과 고난으로 점철 된 인생이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실존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단지 바울처럼 내 자신의 선한 싸움을 마치고 믿음을 지킴으로써 현실의 내 삶을 마무리하고,죽음 이후에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벅찬 감동으로 받으면 성공한 인생이요,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난 끊임없이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나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현실의 내 삶은 비참 하더라도 날 위한 의의 면류관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이 성경에 계시한 뜻대로 살려고 부단하게 노력했다. 세상의 지식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성경의 말씀을 생각하며 세상 사람들의 충고나 조언보다는 성경의 말을 푯대로 삼았다. 쓰레기를 길에 버리지 않았고,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고, 욕설을 뱉지 않았다. 희생하려고 했으며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나는 아주 훌륭한 크리스천의 정석으로 몇 년을 살게 되었다.
훌륭한 크리스천이라는 삶의 형태가 단단해 질수록 역설적으로 세상에서의 나의 위치는 떠돌기 시작했다. 난 좋은 크리스천, 좋은 아들, 좋은 친구, 좋은 선배, 좋은 동료 였지만 훌륭한 사회인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30여년을 비크리스천으로서 열심히 이뤄왔던 사회적 정체성과 입지를 희생하고 좋은 호구가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이라는 허상을 내 삶에서 미뤄내야 할 때이다. 하나님 외에 어떠한 구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막막하기는 하다. 하지만 더 이상 허상을 기다릴 수는 없다. 난 나의 삶을 처절하게 살아내야 한다. 때로는 사람들을 이용하기도 하고, 나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희생을 강요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이 삶이라는 진실을 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난 영원히 소년만화에 갇혀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성경을 내려 놓은 손에 니체를 잡아 들어 읽어야 한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에서 하루 종일 고도를 기다리던 에스트라공은 친구인 블라디미르에게 말한다. 
"이런 식으로 살 순 없어."
그러자 블라디미르가 대답한다.
"잘 생각했어."
 
나도 오늘 나에게 말한다.
"잘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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