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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636페이지의 이 책을 거의 다 읽어갈 때 쯤 저자가 속삭이는 문장이 하루종일 가슴에 맴돈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각종 혁명들이 개별 사피엔스들의 행복이나 복지를 크게 바꾸지 못했듯이, 길가메시 프로젝트를 향해 달려가는 이 시대의 혁명적이고 뛰어난 기술들도 

나의 행복이나 복지를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렵다.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평균 수명은 비약적으로 증가했지만, 단순한 생명 연장이 개별 인간들에게 행복이라는 가치를 줄 수 있을까? 

인간들은 기술 발전이라는 분야에서는 고수이지만 행복이라는 분야에서는 초보다. 






사피엔스

미국 사람들이 해마다 다이어트를 위해 소비하는 돈은 나머지 세상의 배고픈 사람 모두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액수다. 비만은 소비지상주의의 이중 승리다.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고(적게 먹으면 경제가 위축될 테니) 다이어트 제품을 산다. 경제성장에 이중으로 기여하는 것이다.


중세 유럽의 귀족들은 값비싼 사치품에 돈을 흥청망청 썼지만, 농부들은 한 푼 한푼을 아끼면서 검소하게 살았다. 오늘날은 상황이 역전되었다. 부자는 자산과 투자물을 극히 조심스럽게 관리하는 데 반해, 그만큼 잘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빛을 내서 정말로 필요하지도 않은 자동차와 TV를 산다. 자본주의 윤리와 소비지상주의 윤리는 동전의 양면이다. 이 동전에는 두 계율이 새겨져 있다. 부자의 지상 계율은 '투자하라!' 이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의 계율은 '구매하라!' 다.

18. 끝없는 혁명

- 산업혁명 이래 세계 인구는 사상 유례없이 급증했다. 1700년 세계 인구는 약 7억 명이었다. 1800년에는 9억 5천만 명이 었다. 1900년이 되자 거의 두 배로 늘어 16억 명이 되었다. 2000년에는 네 배로 늘어 60억 명이 되었다. 오늘날 사피엔스의 숫자는 70억 명을 약간 넘는다.

- 1800년 영국 정부는 영국의 모든 시간표는 그리니치를 따라야 한다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한 나라가 국가 시간을 채택하고 국민들에게 현지 시각이나 해가 뜨고 지는 주기 대신에 시계에 맞춰 살기를 강요한 것이다. 이처럼 대수롭지 않았던 시작은 결국 몇십 분의 일 초까지 똑같이 맞추는 세계적 시간표 네트워크를 낳았다.

- 우리가 아는 한, 인류는 가장 초기부터, 그러니까 1백만여 년 전부터 대부분 친척들로 구성된 작고 친밀한 공동체에서 살았다. 인지혁명과 농업혁명이 일어난 뒤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혁명 덕분에 가족과 공동체가 뭉쳐서 부족, 도시, 왕국, 제국이 만들어졌지만, 모든 인류사회의 기본 단위가 가족과 공동체라는 점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산업혁명은 불과 2세기 남짓만에 이 단위들을 산산히 깨부쉈다. 가족과 공동체가 수행하던 전통적 기능은 대부분 국가와 시장에게 넘어갔다.

- 멀리 떨어진 곳의 공동체 일에 개입하기에는 수송과 통신이 너무나 불편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많은 왕국이 왕의 가장 기본 특권인 과세와 폭력행사를 공동체에 양도하는 쪽을 선호했다. 에컨대 오토만 제국은 대규모의 제국 경찰력을 운영하느니 피해자 가족이 피의 복수를 통해 정의를 실현하도록 허용했다. 만일 내 사촌이 누군가를 살해하면 희생자의 형제가 그 보복으로 나를 살해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스탄불의 술탄이나 지방의 파샤조차도 폭력이 허용할만한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한 이런 충돌에 개입하지 않았다.

- 중국의 명제국(1368-1644)의 보갑제  
 : 열 개의 가족이 하나의 '보', 열 개의 보가 하나의 '값'을 이룸. 보의 구성원 한 명이 범죄를 저지르면 보의 다른 구성원, 특히 연장자들이 그를 처벌할 수 있음. 세금도 보에 부과 / 제국은 수천 수만명의 세무 공무원과 세금 징수원을 유지해서 개별 집안의 소득과 지출을 조사하는 대신, 이런 업무를 공동체의 연장자에게 맡기는 쪽을 택했음. 많은 왕국과 제국이 사실상 (상인 등에게) 보호비를 뜯는 대규모 폭력단에 지나지 않았다.

가족과 공동체 품 안에서 사는 삶은 이상적이진 않았다. 가족과 공동체의 억압은 오늘날 국가와 시장의 그것보다 덜하지 않았다. 그 내적 역학은 긴장과 폭력으로 가득하기 일쑤였지만, 사람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1750년경 가족과 공동체를 잃은 여성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직업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했으며, 병들고 곤궁할 때 도와줄 곳이 없었다. 돈을 빌려줄 사람도, 분란이 생겼을 때 옹호해줄 사람도 없었다. 경찰이나 사회복지사, 의무교육은 없었다. 살아남으려면 새로이 소속될 가족이나 공동체를 즉시 찾아야 했다. 집에서 도망친 소년 소녀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다른 집안의 하인이 되는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 군대나 매춘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 세월이 흐르면서 국가와 시장은 점점 커지는 권력을 이용해 가족과 공동체의 전통적 결속력을 약화시켰다.
.....국가와 시장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말했다. "개인이 되어라. 누가 되었든 네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라.. 부모의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다. 네게 맞는 직업을 택하라. 그 때문에 공동체의 연장자가 눈살을 찌푸리더라도. 어디가 되었든 네가 원하는 곳에서 살아라. 그 때문에 가족 만찬에 매주 참석할 수 없게 되더라도. 당신은 더 이상 가족이나 공동체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우리, 즉 국가와 시장이 당신을 돌볼 것이다. 식량과 주거, 교육과 의료, 복지와 직업을 제공할 것이다. 연금과 보험을 제공하고 당신을 보호해 줄 것이다."

-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 우리는 스스로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생각하면서 살아가도록 설계되었지만, 불과 2세기 만에 우리는 소외된 개인이 되었다. 문화의 무시무시한 힘을 이보다 더 잘 증언하는 사례는 없다.

- 지난 2세기 동안 친밀한 공동체는 말라죽었고, 그에 따른 감정적 공백을 채우는 역할은 상상의 공동체가 맡게 되었다.
상상의 공동체가 부상한 사례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국민과 소비 공동체이다. 국민은 국가가 만든 상상의 공동체이다. 소비 공동체는 시장이 만든 상상의 공동체다. 둘 다 상상의 공동체임에 분명한 까닭은 시장의 모든 고객이나 한 국가의 모든 구성원이 과거 한 마을 사람들이 서로 알던 것만큼 실제로 잘 아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독일 사람 누구도 자신이 속한 국가의 다른 국민 8천만 명과 친하게 알고 지낼 수는 없다.
소비지상주의와 민족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수백만 명의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모두가 공통의 과거, 공통의 관심사, 공통의 미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게끔 만들려고 무진장 애를 쓴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상상일 뿐이다. 돈이나 유한회사, 인권과 마찬가지로, 국민과 소비 공동체는 상호 주관적 실체다. 이것들은 오로지 우리 집단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지만, 그 힘은 막강하다. 독일인 수천만 명이 독일이란 국가의 존재를 믿고, 독일의 국가 상징을 보면 흥분하고, 국가의 신화를 거듭 이야기 하고, 국가를 위해 돈과 시간과 팔다리를 기꺼이 희생하려 하는 한, 독일은 언제까지나 세계의 강대국으로 남을 것이다.
국가는 상상ㅇ의 존재라는 자신의 속성을 숨기려 최선을 다한다. 대부분의 국가는 자신이 자연적이며 영원한 실체라고, 어떤 시원적 시기에 모국의 흙과 사람들의 피가 섞여서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최근 몇십 년간 국가 공동체는 소비자 집단에 의해 점점 더 빛을 잃어왔다. 소비자 집단은 서로 직접 잘 알지는 못하지만 소비 습관과 관심이 동일하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동일한 공동체의 일부라고 느끼며 자신을 그렇게 규정한다...가령 마돈나의 팬들도 그런 소비자 공동체를 구성한다. 그들은 주로 구매 패턴으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마돈나의 공연 티켓, CD, 포스터, 셔츠, 휴대전화 벨소리 음악을 구매하며 이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규정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들, 채식주의자들, 환경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무엇보다 자신들이 소비하는 것에 의해 규정된다. 소비가 그들 정체성의 중추를 이룬다. 독일인 채식주의자는 독일인 육식주의자보다는 프랑스 채식주의자와 결혼하는 쪽을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

- 19세기와 20세기의 정치사는 끔직한 전쟁과 대량학살, 혁명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흔히 한다. (1,2차 세계대전, 냉전, 아르메니아 대학살, 유대인 대학살, 르완다 대학살....로베스피에르에서 레닌을 거쳐 히틀러로...) 현대사는 전에 없던 수준의 폭력과 공포의 시기만이 아니라 그와 같은 수준의 평화와 평온의 시기였다. 찰스 디킨스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 썼던 표현대로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 이 말은 비단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뿐 아니라 그것이 불러온 시대 전체에 대해서도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지에 대해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는다.
브라질 사람과 인도 사람이 누리는 평화를 떠올리는 사람보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집단 전체보다 개인의 고통에 더욱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거시적 역사 과정을 이해하려면, 개인의 이야기보다 대중의 통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 2000년에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 31만명 /  폭력 범죄로 인한 사망자 : 52만명
이 83만명은 2000년의 총 사망자 5,600만 명에서 1.5퍼센트를 차지할 뿐이다.
그 해에 자동차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126만명 (총 사망자의 2.25퍼센트), 자살로 인한 사망자는 81만 5천 명(1.45퍼센트)이었다.

2002년의 수치는 더욱 놀랍다.
총 사망자 5,700만 명 중에서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17만 2천 명, 폭력 범죄로 인한 사망자는 56만 9천 명에 불과했다. (인간의 폭력에 의한 전체 사망자는 74만 1천 명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살자는 87만 3천 명에 이르렀다. 9.11 테러가 일어난 다음 해라 테러와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을 죽이는 것은 테러리스트나 군인, 마약상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일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 폭력이 감소한 것은 대체로 국가의 등장 덕분이다.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폭력은 가족과 공동체가 서로 일으키는 국지적 반목이 원인이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위의 숫자가 가르키듯이 지역 범죄로 인한 희생자가 국가 간의 전쟁 희생자보다 훨씬 더 많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지역 공동체보다 큰 정치 조직을 알지 못했던 초기 농부들은 만연하는 폭력으로 고통받았다.

- 평화가 널리 퍼져 있어서 사람들이 전쟁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대는 과거에는 달리 없었다..
이 현상에 기여하는 요인
1) 전쟁의 대가가 극적으로 커졌다. 핵무기는 초강대국 사이의 전쟁을 집단 자살로 바꾸어놓았으며, 군대의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시도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2) 전쟁의 비용이 치솟은 반면 그 이익은 작아졌다. 정치조직체들은 적의 영토를 약탈하거나 병합함으로써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부는 들판과 가축, 노예와 금 같은 물질적인 것들이었기 때문에 약탈이나 점령이 쉬웟다. 오늘날 부는 주로 인적 자본과 조직의 노하우로 구성된다. 그 결과 이것을 가져가거나 무력으로 정복하기가 어려워졌다. 캘리포니아의 부의 원천은 금광이었지만 오늘날은 실리콘과 셀룰로이드(영화 필름의 재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만일 중국이 캘리포니아를 침공해 샌프란시스코 해변에 1백만 명의 병사를 상륙시키고 내륙으로 돌격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들이 얻을 것은 별로 없다. 부는 구글의 엔지니어들과 할리우드의 대본가, 감독, 특수효과 전문가의 마음속에 있다. 이들은 중국의 탱크카 선셋대로에 진입하기 전에 인도의 방갈로르나 뭄바이로 향하는 첫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을 것이다.

- 전쟁의 이익이 전만 못해진 데 비해, 평화는 과거 어느 떄보다도 수익성이 좋아졌다. 전통 농업 경제체제에서 장거리 교역과 해외 투자는 부차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전쟁 비용을 피하는 것을 차치하면, 평화는 그다지 수익을 낳지 못했다.

- 핵무기에 의한 대량 학살 위협은 평화주의를 육성한다. 평화주의가 퍼지면 전쟁이 물러가고 무역이 번창한다. 무역은 평화의 수익과 전쟁의 비용을 모두 늘린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되먹임 고리는 전쟁에 또 다른 장애물을 만들어내는데,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모든 장애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점점 치밀해지는 국제적 연결망은 국가들의 독립성을 서서히 약화시켜, 어느 한 나라가 일방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줄인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더 이상 전면전을 벌이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이제 독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우리는 지구 제국의 형성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19.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 인간의 생화학 시스템을 극심한 더위가 다가오든 눈보라가 몰아치든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는 공조 시스템으로 비교하는 학자도 잇다. 사고가 생겨 온도가 일시적으로 바뀔 수는 있지만, 공조 시스템은 언제나 온도를 설정된 값으로 되돌려놓는다. 어떤 시스템은 섭씨 25도에 맞춰져 있고, 어떤 시스템은 20도에 맞춰져 있다. 인간의 행복 조절 시스템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1에서 10까지의 척도로 볼 때 어떤 사람들은 즐거운 생화학 시스템을 갖고  태어난다. 그런 사람은 기분이 6에서 10 사이에서 움직이다가 시간이 지나면 8에서 안정된다. 그런 사람은 매우 행복하다. 설령 그가 대도시 변두리에 살며 주식시장 붕괴로 돈을 모두 날리고, 당뇨병이 있다는 진단을 받더라도 말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우울한 생화학 시스템을 가지고 태어난다. 기분은 3에서 7 사이로 움직이고, 5에서 안정된다. 그런 사람은 항상 우울하다. 설사 그가 잘 짜여진 공동체의 지원을 받고, 수백만 달러짜리 복권에 당첨되며, 국가대표 운동 선수 같은 건강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의 우울한 친구는 심지어 아침에 5천만 달러 복권에 당첨되고, 정오에는 에이즈와 암을 동시에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고, 오후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평화를 이룩하고, 저녁에는 여러 해 전에 실종되었던 딸을 찾는다고 해도 행복지수 7 이상을 경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외 뇌는 애초에 유쾌한 기분과는 거리가 멀게 생겨먹은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똑같다.

- 결혼한 사람은 독신자들보다 행복한 것이 사실 아닌가? 답은 이렇다. 이런 연구 결과들은 상관관계를 밝힌 것 뿐이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는 일부 연구자들이 가정한 것과 반대일 수도 있다.....
즐거운 생화학 시스템을 지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행복하며, 삶의 만족도도 크다. 그런 사람들은 배우자로서 더욱 매력적이며, 결과적으로 결혼할 가능성도 더 많고, 이혼할 가능성은 더 적다. 우울하고 불만스러워하는 배우자보다 행복하고 만족해하는 배우자와 함께 사는 것이 훨씬 더 쉽지 않은가. 결혼한 사람들이 독신인 사람보다 평균적으로 더 행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생화학적으로 우울한 경향이 있는 여성은 남편과 함께 지낸다고 해서 반드시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

- 우리가 행복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법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곧 역사는 별로 중요치 않다는 의미가 된다.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은 우리의 생화학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세로토닌 분비를 유발하는 외부자극을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그 결과로 나타나는 세로토닌 수준을 바꾸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 중세 프랑스의 농부와 현대 파리의 은행가를 비교해보자. 농부는 돼지우리가 내려다보이는 진흙 오두막에서 난방도 없이 살았다. 하지만 은행가는 샹젤리제가 내려다보이는 호화로운 펜트하우스에서 각종 최신 장치를 완비해놓은 채 살고 있다. 당신은 기업가가 중세 농부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진흙 오두막이나 펜트하우스, 샹젤리제가 우리의 기분을 결정짓지 않는다. 세로토닌이 그렇게 한다. 중세의 농부가 자신의 진흙 오두막을 완성했을 때, 뇌의 뉴런은 세로토닌을 분비해 행복 수치를 10으로 올렸다. 2014년 이 기업가가 멋진 펜트하우스의 대금을 모두 치렀을 때, 그의 뇌에 있는 뉴런은 농부와 비슷한 양의 세로토닌을 분비해 역시 10으로 수치를 올렸다. 펜트하우스 최상층이 진흙 오두막보다 훨씬 더 안락하다는 사실은 뇌에 아무런 차이를 일으키지 않는다. 뇌가 오로지 아는 것은 현재 세로토닌 수치가 10이라는 사실뿐이다. 따라서 기업가는 자신의 태고조의 태고조 할아버지인 중세의 가난한 농부보다 조금도 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

- 과거 뉴에이지 세대의 유명한 구호만큼 생물학자들의 주장을 핵심적으로 대표하는 것은 또 없다. "행복은 내부에서 시작된다." 돈이나 사회적 지위, 성형수술, 아름다운 집, 높은 자리는 우리에게 전혀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지속적 행복은 오로지 세로토닌, 도파민, 옥시토신에서만 온다.

- 대니얼 카너먼은 사람들에게 하루의 일상적인 활동을 재평가하라고 요구해보았다....카너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역설처럼 보이는 현상을 발견했다. 아이를 양육하는 일을 예로 들면, 즐거운 순간과 지겨운 순간을 평가하게 한 결과 양육은 상대적으로 불쾌한 일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기저귀를 갈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의 짜증을 달래는 일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가 행복의 주된 원천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아기 독재자의 비참한 노예' 로 볼 수도 있고, '사랑을 다해 새 생명을 키우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 큰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체계다. 니체가 표현한 대로, 만일 당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일이든 견뎌낼 수 있다. 의미 있는 삶은 한창 고난을 겪는 와중이라도 지극히 행복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의미 없는 삶은 아무리 안락할지라도 끔찍한 시련이다.

-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책들은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짜이고 풀어지느냐에 대해서, 제국의 흥망에 대해서, 기술의 발견과 확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20.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 현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시대이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역사상 유례없는 불평등을 창조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이제 새로운 의학적 능력의 도움을 받는다면 상류계층의 허세가 머지않아 객관적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과학소설이 아니다. 대부분의 과학소설 줄거리는 우리와 똑같은 사피엔스가 빛의 속도로 달리는 우주선이나 레이저 총 같은 우월한 기술을 지닌 세상을 그리고 있다. 거기서 핵심이 되는 윤리적, 지적 딜레마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가져간 것들이다. 이런 소설은 미래를 배경으로 현재 우리의 정서적, 사회적 긴장관계를 재생산하는 데 불과하다.
 하지만 미래 기술의 진정한 잠재력은 호모 사피엔스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단순한 수송 수단과 무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과 욕망까지 말이다. 영원히 젊은 사이보그에 비하면 우주선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사이보그가 번식도 하지 않고, 성별도 없으며, 다른 존재들과 생각을 직접 공유할 수 있다면 더욱 그렇다. 집중하고 기억하는 능력은 인간의 수천 배에 이르며,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 않는 대신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감정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과학 소설이 이런 미래를 그리는 경우는 드문데, 왜냐하면 정의상 정확한 묘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과학자들이 신체뿐 아니라 정신도 조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힘든 시간을 거쳐야 할 것이다. 미래의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우리보다 진실로 우월한 존재를, 우리가 네안데르탄인을 바라보듯이 우리를 무시하면서 바라볼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 역사는 우리에게 한 모퉁이만 돌면 금방 일어날 것 같아 보이는 일도 미처 예상치 못한 장애로 실현 불가능해 질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 결과 예상 밖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1940년대에 원자력의 시대가 갑자기 도래했을 때, 2000년쯤에는 원자력을 활용하는 다양한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는 예상이 만발했었다.
스푸트니크 위성과 아폴로 11호 우주선이 세계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을 당시, 사람들은 앞다투어 20세기 말이 되면 우리가 화성과 명왕성에 건설한 우주 식민지에 살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이런 예측 중에서 실현된 것은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한편 인터넷의 존재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길가메시 프로젝트가 과학의 주력상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길가메시 프로젝트는 과학이 하는 모든 일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길가메시의 어깨에 목발을 타고 있다. 길가메시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을 막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이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후기 - 신이 된 동물

- 7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의 한 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만 신경을 쓰는 별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다. 이후 몇만 년에 걸쳐, 이 종은 지구 전체의 주인이자 생태계  파괴자가 되었다. 오늘날 이들은 신이 되려는 참이다. 영원한 젊음을 얻고 창조와 파괴라는 신의 권능을 가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잇다. 불행히도 지구상에 지속되어온 사피엔스 체제가 이룩한 것 중에서 자랑스러운 업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주위 환경을 굴복시키고, 식량생산을 늘리고, 도시를 세우고, 제국을 건설하고, 널리 퍼진 교역망을 구축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의 고통의 총량을 줄였을까? 인간의 역량은 크게 늘어났지만, 개별 사피엔스의 복지를 개선시키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다른 동물들에게는 큰 불행을 야기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지난 몇십 년간 우리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는 마침내 약간의 실질적인 진보를 이룩했다. 기근과 전염병과 전쟁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다른 동물들의 상황은 과거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악화되고 있다. 대다수 인간의 상황이 개선되고 있지만, 이는 극히 최근의 일이며 확신하기에는 상황이 지나치게 불안정하다.
 더구나 인간의 능력이 놀라운 정도로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의 목표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며 예나 지금이나 불만족스러워하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우리의 기술은 카누에서 갤리선과 증기선을 거쳐 우주왕복선으로 발전해왔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떨치고 있지만,이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생각이 거의 없다.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인류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무책임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친구라고는 물리법칙밖에 없는 상태로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면서 아무에게도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의 친구인 동물들과 주위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든다. 오로지 자신의 안락함과 즐거움 이외에는 추구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