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진리(Total Truth)
현대 사상에 유행하는 몇몇 어휘를 모른다고 토론시간에 기독교적 입장을 적극적으로 변호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세상의 언어"로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이야기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믿음의 언어"로 말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그렇게 형성된 자신의 신념과 믿음, 자신의 지식을 그 언어를 쓰지 않는 대학의 강의실에서 지식인들에게 통용되는 "세상의 언어"로 번역해 이야기할 수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자연밖에 없으므로 하니님이나 계시나 초자연적인 일은 없다고 보는 이른바 "자연주의(naturalisim)와 참과 거짓과 옳고 그름은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이 아니라 우리의 약속이나 관습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는 "반실재론"(anti-realism), 그리고 모든 것을 인간 경험과 판단을 중심으로 보고자 하는 "인간주의(humanism)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들의 언어로 이들과 논쟁하고 답변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추천의글, 서강대 철학과교수 강영안)
기독교는 일련의 복수 형태의 진리들(truths)이 아니라 대문자 "T"로 시작하는 진리(Truth)다. 종교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 총체적 실재(total reality)에 관한 진리다.
성경적 기독교는 총체적 실재와 관련된 진리이며, 그 총체적 진리를 지적으로 붙들고 그 진리의 빛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
"복음은 우리에 갇힌 사자와 같다"고 윋한 침례고 설교자 찰스 스펄전이 말했다. "그것은 변호할 필요가 없다. 다만 우리에서 풀어 주기만 하면 된다"
"우리에게는 삶의 기준이 되는 어떤 신조나 삶의 여정을 안내할 어떤 지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감지한다. 먼저 우리에게 그런 "지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인간 본성에 대한 성경적 견해에서 나온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인간의 행위가 궁극적으로 경제적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고 주장한다. 프로이트주의자는 모든 것들을 억압된 성적 본능의 탓으로 돌린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는 인간을 자극-반응의 매커니즘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는 최우선적 요인은, 우리의 궁극적 신념이나 종교적 헌신이라고 가르친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예배하는 "신"-성경의 하나님이든 그 밖의 다른 신이든-에 의해 그 모양이 결정된다.
성화의 모든 측면이 그렇듯, 지성을 새롭게 하는 것도 고통스럽고 힘든 작업일 수 있다. 이 일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희생적 사랑과 그 분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불타는 열정에 바탕을 둔 고된 작업과 훈련이 요구된다. 그리스도의 마음(지성)을 품기 위해서는 기꺼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힐 뿐 아니라 그분이 인도하시는 곳이면 어디든,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따라가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 우리가 고난의 불 속에서 정련의 과정을 거칠 때에야, 우리의 욕망이 순화되고 정신력을 포함한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이 오직 주님의 기도-"(하나님의)나라가 임하옵시며"-를 이루는 데 굴복하도록 소원하게 된다. 그때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도록 그분의 발앞에 우리의 재능과 은사를 모두 내려놓고 싶어진다. 기독교 세계관을 개발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섬김의 행위다. 우리의 자아 전체를 그분께 굴복시키는 것이다.
사라 역시 오늘날 대부분의 캠퍼스에서 가르치는 자유주의적 상대주의에 빠졌다. 사회학, 인류학, 철학 등의 과목에서 진리는 문화적으로 상대성을 지닌다는 가정이 당연시되었다. 진리란, 사상과 신념이란 문화적 세력에 의해 역사적으로 형성되었으므로 궁극적 의미에서 참이나 거짓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덕적 존재로서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윤리를 따른다. 영적 존재로서 신자는 기도를 하고 예배에 참석한다. '하지만 사고하는 존재로서,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세속주의에 굴복해 세속적 지성이 만든 준거 틀과 세속적 판단을 반영하는 일련의 평가기준을 받아들였다."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의 전문 분야에 관해 대화할 때 우리의 사적인 신념이 무엇이든, 정신적으로는 비그리스도인처럼 현재 통용되는 개념과 범주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데카르트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논박 불가능한 코기토의 논리를 계시했다고 확신한 나머지 이탈리아에 있는 로레토 성지로 순례의 길을 가겠다고 서약했다. 그리고 수년 뒤에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도 결코 기독교적이지 않은 철학을 유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 본보기인 셈이다.
우리의 정신은 백지 상태가 아니라 우리의 영적 입장에 의해 채색되어 있다. 즉 하나님을 긍정하는 입장이거나 반대하는 입장이거나 둘 중 하나다. 로마서 1장에서 언급하듯이, 우리는 참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든지 아니면 피조물(우상)을 예배하고 섬기게 되어 있다.
우상이라는 것은 흔히 재정적 안정이나 직업상의 성공과 같이 구체적인 성격을 지닌다. 또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나 어떤 신념체계처럼 종교를 대체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상이 어떤 형태를 띠든지, 로마서 1:18에 의하면 우상을 예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적극적으로 억누른다. 대신 다른 신들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은 소명은, 우리의 사고 속에 남아 있는 "우상들"의 찌꺼기를 점진적으로 완전히 청소함으로써 삶의 모든 측면에 걸쳐 하나님 도시의 시민답게 사는 것이다.
유물론자에게는 궁극적 실재가 물질이므로, 모든 것이 물질적 구성요소로 환원된다. 범신론자의 경우 궁극적 실재가 영적인 힘이나 토대이므로, 명상의 목표는 영적 하나됨과 재결합하는 것이다. 교조적 다윈주의자에게는 생물학이 궁극적이므로, 종교와 도덕까지 포함한 모든것이 진화의 산물로 환원된다. 경험주의자의 경우 모든 지식이 궁극적으로 감각의 자료로 추적될 수 있으므로, 감각에 의해 인식될 수 없는 것은 비실재적인 것이다.....
믿음은 인간의 보편적 작용이므로, 하나님을 향하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을 향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의 직업이나 전문직은 단순히 밥벌이를 위한 이류활동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창조된 본래 목적이자 고상한 소명이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길은 그분에게 받은 재능과 은사를 사용하여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계속하도록 부름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처럼 무에서 차아조한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차아조세계 속에 심어 놓으신 힘과 잠재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문화 명령이 주는 교훈은 우리의 성취감이 얼마나 차아조적이고 건설적인 일을 하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상적 존재상태는 영구적인 여가나 끝없는 휴가-기도와 묵상을 위해 수도원으로 피정 가는 것까지 포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의 유익을 위해 창조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속세계를 피해 복음주의 하부문화의 장막 뒤로 숨을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인간의 창조물인 예술작품과 문화를 하나님 형상의 표현으로, 긍정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신자는 신문을 집어들거나 영화를 감상할 때 또는 책을 읽을 때마다 분명하게 성경적 관점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나쁜 세계관을 몰아내는 최선의 방법은 좋은 세계관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문화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문화를 창조하는 일을 해야 한다.
어느 미국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할 때는 저 ㅇ통 기독교 세계의 전통을 학습한 결과 그렇게 말하는 것이고...모든 길이 하나님께로 이르고 모두 똑같이 타당하다고 주장할 때는 18세기 '계몽주의'관점의 예속자로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세계관을 비교하는 데 가장 간단하고 효과적인 수단은 다시금 창조, 타락, 구속의 틀을 적용하는 것이다.
1. 창조 : 세계관 용어로 번역하면, 창조란 궁극적인 기원을 지칭한다. 모든 세계관 혹은 이데올로기는 기원에 관한 이론에서 시작해야 한다. 모든 것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이며,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2. 타락 : 또한 모든 세계관은 타락에 상응하는 것을 제공하는 데, 곧 악과 고통의 근원에 대한 설명이 그것이다. 이 세계는 어떤 면에서 잘못되었는가? 전쟁과 갈등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3. 구속 :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 위해서 구속에 대한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희망을 불어넣지 않으면 안된다. "타락"을 역전시키고 세상을 다시 바로잡기 위한 의제를 제공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1. 창조 : 마르크스주의에서 창조, 곧 만물의 궁극적 기원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 스스로 창조하고 발생하는 물질
2. 타락 : 마르크스주의에서 타락, 곧 고통과 억압의 근원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 사유재산의 발생
3.구속 : 마르크스주의는 어떻게 세상을 다시 바로잡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가?
--> 혁명! 압제자를 전복하고 본래의 원시 공산주의 낙원을 재창조함으로써
루소와 혁명
- 마르크스 사상의 원조격 : 장자크 루소
(프랑스 대혁명의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해, 마르크스, 레닌, 무솔리니, 히틀러, 모탱동에 영향, 심지어 캄보디아 인구의 25%를 살육한 폴 포트(Pol Pot)도 파리에서 교육을 받았고 루소를 읽었다.
-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는 길은, 만일 우리가 모든 사회적 관계, 도덕, 법, 관습, 전통 등 일체의 문명을 벗어 버린다면 어떤 모습이 될지 가정해 보는 것이라고 루소는 말햇했다. ("자연상태")
-만일 우리의 참 본성이 자율적 개개인이 되는 것이라면 사회는 본선상 거슬리는 것(사회; 인위적,제약적,억압적 성격)
- 루소의 대표작 '사회계약론'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나, 어디에서든 사슬에 매인다" 그에게 참으로 억압적인 관계는 결혼, 가정, 교회, 일터와 같은 개인적인 것이었다.
-개개인이야말로 유일한 궁극적 실재라는 루소의 주장이 왜 그토록 혁명적인지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문명을 그 사회적 관습과 함께 인위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비난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이런 압제로부터 해방해 줄 것인가?
국가다, 국가는 모든 사회적 연줄을 파괴하고 개인이 오직 국가에게만 충성하도록 풀어 줄 것이다.루소는 자신의 비전을 놀라울 정도로 명료하게 서술했다. "그렇게 되면 각 시민이 자신의 동료 인간 모두로부터 완전히 독립될 것이고 국가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의 철학이 그토록 많은 전체주의 체제에 영감을 준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1. 창조 : 루소 철학의 출발점, 곧 에덴 동산의 대체물은 무엇인가?
--> 자연 상태
2. 타락 : 루소의 경우, 억압과 고난의 근원, 곧 타락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 사회 또는 문명
3. 구속 : 루소에게 있어 구속의 근원은 무엇인가?
--> 국가
많은 학생들은 결혼서약에 "서약합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 지나치게 위험 부담이 크다고 생각한다. 즉 자신의 자율성을 포기할 만큼의 가치가 없는 거래관계로 보는 것이다. 럿거즈 대학 내 국립결혼연구소가 행한 연구에 따르면, 현대의 젊은이들은 결혼을 "만연된 이혼으로 인한 경제적 노출과 위험 부담의 한 형태"로 본다고 한다. 이것은 원자론적 사회관의 치명적 열매다. 결혼이 사회적 선으로 숭상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일종의 경제적 위험 부담으로 우려되고 있는 실정이다......"부대조건 없는 섹스, 반지 없는 관계"를 특징으로 삼는 낮은 헌신의 문화로 가장 잘 묘사된다. 분명한 사실은, 홉스와 로크와 루소의 존재론적 개인주의가 계속해서 미국의 사회적, 정치적 위기의 핵심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불교도의 경우
불교도와 힌두교 같은 동양종교에는 인격적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적 존재란 인격과 인지 능력이 없는 영적인 세력의 장이다. 이런 종교들의 궁극적 목표는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열반은 개별적 영이 만물의 토대를 이루는 보편적 영적 근원과 합쳐지는 것이며, 이는 범신론적 초월자 속에서 자신의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1. 창조 : 뉴에이지 범신론에서 궁극적 실재, 만물의 기원은 무엇인가?
-->절대자, 초월자, 보편적인 영적 본질
2. 타락 : 범신론에서 악과 고통의 근원은 무엇인가?
--> 우리의 개별성에 대한 인식
3. 구속 : 범신론은 악과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가?
--> 우리 모두의 근원인 보편적인 영적 본질과 재결합함으로
동양 종교의 훈련 목표는 내면의 신과 재결합하는 것이며 우리모두가 신이라는 의식을 되찾는 것이다.
다윈과 베렌스타인 곰의 만남
- 하버드에서는 종교를 원시문화가 발명한 인조물로서 혹독한 생존의 과정에서 하나의 방어기제로 만든 것으로 본다고 글린은 말했다. 그가 대학원을 졸업할 즈음에 내린 결론은, 하나님도 없고 영혼도 없고 내세도 없으며, 우주에 어떤 고유한 정의도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 세계관이 현실적이라고, 아니 마키아벨리만큼이나 현실적이라고 우쭐했다."
약 20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개인적인 위기를 겪은 후에야 글린은 그때까지 확신하고 있던 이성주의와 자연주의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 그 증거'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존재를 되찾아 준 여러 갈래의 논증을 열거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물리적 우주에 나타난 설계를 가르키는 놀라운 증거도 포함되어 있다.
- 다윈주의를 보편적 산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산이 부식성이 너무 강해 모든 것, 심지어 산을 담은 병까지 갉아먹는 현상을 보며 어린이들이 신기해 하는 모습을 상기시킨다. 다윈주의도 그처럼 부식성이 강해서 도무지 담아 둘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연구 분야에 퍼져서 초월적인 목적이나 도덕의 흔적을 모조리 부식시켜 버린다. 데넷이 표현하듯이, 다윈주의는 꺼의 모든 전통적 개념을 갉아먹고 그 뒤에 하나의 혁명적 세계관을 남긴다"
-다윈의 위대한 업적은 우주의 설계를 "목적 없고 무의미하게 운동하는 물질"의 산물로 환원시킨 것이라고 시청자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런 진술을 과학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나 한지 한번 생각해 보자. 우주가 "무의미하게 운동하는 물질"에서 생겨났음을 확증할 수 있는 실험실 실험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결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전혀 과학적 이론이 아니라 데넷의 개인적 철학에 불과한 것이다.
범브란트(리처드 범브란트, 루마니아 공산주의 강제수용소에서 14년간 수감되고 고문당한 루터교 목사)의 사례.
- 이런 기억을 더듬어 볼 때, 범브란트의 간증이 왜 그토록 토니의 마음에 강하게 와 닿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루마니아 목사의 메시지가 청중의 가슴에 진정으로 와 닿고 확신을 심어 준 것은, 그가 직접 고난을 당했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영을 덧입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성품은, 고난이야말로 신앙의 질을 시험하는 용광로 라는 성경의 원리를 증언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는다"고 바울은 기록하고 있다.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의 전반부, 곧 우리가 그분의 영광에 동참할 것이라는 확신에 속히 이르고 싶어한다. 그러나 영적 성장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 진정한 성화는 고난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시작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순서를 다시 한 번 유의하자. 우리가 너무나 가혹한 시련을 겪어 이 세상에 대해 영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만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그 부활의 생명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다.
- 우리의 지성을 하나님의 진리에 복종시키는 첫 걸음이 우리의 허영심과 자만심, 그리고 동료와 대중으로부터 존경을 얻으려는 욕망에 대해 죽는 거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를 움직이는 세상적인 동기를 떨쳐버리고, 순전히 우리의 지성을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시키려는 진정한 동기를 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또한 그 지식을 타인을 섬기는 데 사용하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할 것이다.
- 우리가 심지어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 궁극적 목적은 다른 이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우리를 구비시키기 위함이다.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서 죄와 상처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순간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런 시련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에 연합시켜 달라고 구해야 한다.
- 마르틴 루터가 말하듯이, 그리스도인은 영광의 신학이 아니라 십자가 신학을 포용한다.....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참 지식에 도달하려면,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으려는 꿈을 기꺼이 포기하고 십자가에 달린 그분과 동일시되고자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 (암으로 고통을 받은 저자의 친구 사례) 나는 그녀에게 그처럼 처절한 체험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물어보았다. "내가 기꺼이 죽고 싶어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어" 친구는 눈동자를 흐리며 답했다. "그동안 나는 생명과 내 가족을 결사적으로 붙들고 있었지. 그것들을 놓아 버리고 하나님이 내게서 모든 것을 취하시도록 기꺼이 내버려 두어야 했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데리고 가야 할 지점이 바로 그곳이다. 그것이 신체적 고통이든 심리적 고통이든, 우리가 진정 무엇을 우리 인생의 토대로 삼고 있는지를 보게 하는 방법은, 그것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우리가 건강이나 가족, 일이나 평판을 잃을 경우, 우리의 삶은 무너지고 극도의 상실감과 공허감을 느끼게 된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목적의식과 정체감이 얼마나 깊이 그런 것과 연관되어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그것들을 앗아가시도록 기꺼이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꺼이 죽고 싶어해야" 한다는 말이다.
- 삶의 전 영역에 걸쳐, 비록 고통이나 값비싼 대가가 따르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배신이나 억압으로 우리의 마음이 찢어질 때 그분께 울부짖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거나 원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품게 하거나 혹은 타인을 공격하게 한다면, 꽉 움켜진 손을 펴서 내놓는 것이다. 불가항력의 악을 직면해서도 순전히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다.
-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 무엇이든, 바로 그것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죽임을 당하게 해야 한다. 그럴 경우에만 우리는 내적인 강박감에서 풀려나,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는 참 자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고후 5:14)
- 참으로 끔찍한 사실은, 우리가 교회에 정규적으로 참석하고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심지어 기독교 사역에 종사할지라도, 쉐퍼가 "죽음을 낳는 기계"라고 말한 상태가 될 소지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 자신을 사탄에거 굴복시킨 채 우리 소명에 거슬러 삶으로써 이 가련한 세상에서 죽음을 낳는 기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명이나 죽음 가운데 어느 것을 낳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 삶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드러내고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무기를 사용한다면-우리의 재능을 그분의 발 앞에 내려놓고, 우리의 자만심과 야망에 대해 죽고, 성경의 도덕적 원칙에 순종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을 따른다면- 설령 외적인 표준으로는 우리가 패배한 듯이 보일지라도 사실은 승리한 것이다. 바깥에서 관찰하는 외부인은 우리가 실패했다고 결론을 내릴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 친구와 지도자들까지도 고개를 흔들며 우리가 실패했다고 충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삶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드렸고 현재 그분의 인도를 받고 있다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가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 15:5)는 말씀을 어렵게 체험적으로 깨달았을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고 한다. 이 구절은 우리가 익히 암송하는 것이요 금세 인용할 수 있는 말씀이다. 하지만 우리가 대단한 위기에 처하여 우리의 자원이 바닥나기 전에는 그 의미를 생생하게 절감하기 어렵다. 많은 자원을 가진 자들에게는 그 시점이 중년 혹은 그 이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 이르면, 인생이 우리가 희망했던 그런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갑자기 몰려들고, 스스로 '이것이 전부란 말인가' 자문하게 된다....우리가 기독교 사역에 열심을 품을 때조차 그 동기가 하나님의 영보다는 개인적 열망과 야망에 의해 유발될 때가 적지 않다. 우리의 자연적 열정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은 우리를 벼랑 긑으로 데려가기 위해 더 큰 위기를 허락하실 수밖에 없다.
교획가 당면한 일차적 위협은 "주님의 일을 성령이 아닌 육체의 능력 안에서 하려는 경향"이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 싶어 못 견뎌 한다. 그들은 자기 제자들의 발을 씻었던 그 주인의 겸손을 본받기보다는 히과 영향력과 평판을 얻기 위해 "다른 이들을 짓밝고 서 있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돈을 더 내도록 유도하기 위해 그들의 감정을 조작하는 등 홍보와 마케팅 기법에 있어서"세상을 흉내내고" 있다. 따라서 바깥 사람들이 교회를 볼 때, 일반적인 사회학으로 설명되는 힘ㅁ과 기업경영의 원칙으로 대부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랄 일이 안디ㅏ.
- 기독교 단체에서 임원으로 일했던 한 사람은 조직 내부의 "거짓의 문화"를 발견하고는 사임했다고 내게 말했다. 더 멋있게 보이고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진실을 가리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일삼는 관행 때문이었는데, 물론 그 모두가 사역을 위한다는 명목에서였다. 그것은 "주님의 이름을 팔아서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슥 13:1) 사고의 현대적인 변형이다.
당신이 내일 아침에 일어났는데 어떤 마법에 의해 기도와 성령의 능력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고, 쉐퍼는 말 한다. 그럴 경우, 우리가 교회와 단체를 운영하는 방식에 어떤 차이가 발생할까? 비극적인 사실은, 많은 기독교 기관의 관행에 "어떤 차이도 없을 것" 이라는 점이라고 쉐퍼는 말한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것이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연주의자의 의자에 앉아 하루하루 활동하고 있다.
- 섬기는 리더십이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라 완전히 실천 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일반 기업들도 이런 원리를 인정하기 시작했다....'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의 저자 짐 콜린스는 "천편일률적인 예상과는 반대로 성공적인 지도자들은 "카리스마적이지도 않고 유명인사도 아니다"라고 한다....스태프들과 함께 정책을 결정하는, 겸손하고 소박하며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들이다>
- "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잠 16:8)
우리는 "사업하는 방법 속에 죄를 조립해 넣고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축복해 주시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잘못함"으로써 바로잡다
쉐퍼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라브리를 시작했을 때 보여준 용기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과거에 쉐퍼를 알던 이들은, 그가 미국에서 대규모 청중을 상대로 강연하고 대규모 기관을 세울 기회를 포기한 것을 두고 미친 짓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일부는 그가 자기 은사를 낭비했다고 비난하며 성을 내고 비판하기도 했다.....확실히 그의 통찰은, 때로 악의에 찬 비난까지 감내하면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용기의 열매였다. 그것은 결코 추상적인 생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 나는 쉐퍼가 어느 강연회에서 만일 언젠가 돈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간단하게 답했다. "글쎄요, 그러면 우리는 더 작아지겠지요" 강연장은 그처럼 자만하지 않는 참신한 반응에 온통 박수갈채를 보냈다. 하나님께서 라브리에 정한 때와 뜻이 있기에, 그 뜻이 이뤄지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 쉐퍼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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