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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제럴드 L 싯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 (오늘 여기서 그분을 위해) (증보판 연구문제수록)

저자
제럴드 L 싯처 지음
출판사
성서유니온선교회 | 2004-08-16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이 책의 저자 제럴드 싯처의 삶은 어느 날 저녁 그를 덮친 끔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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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견하여 따라야 하는 미래의 길'로 언급한 하나님의 뜻에 관한 말이 성경에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신 성경은 우리에게 미래를 넘겨짚어 염려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확인해주며, 현재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것을 명령한다.


대학 시절 나는 의학과 신학 중 택일해야 하는 힘든 시기가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우습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다. 나는 수개월간 그 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기도했고 조언을 구했고 양쪽의 장단점을 심사숙고했다. 어느 쪽이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찾아도 일말의 의심 없이 내 선택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정표 없는 큰 갈림길에 다다른 나그네처럼, 나는 바른 길로 들어선다는 분명한 지식 없이 선택을 내려야 했다. 마음이 어지럽고 착찹했다. 한편 나는 두 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그 시련이 내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까맣게 몰랐다. 나는 거울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자기 속으로 빠져들었고, 곁에 두기 싫은 신경질 난 고양이처럼 심사가 사나워졌다. 보다못해 아내 린다가 이런 말로 나를 자기 도취 상태에서 끄집어내 주었다. "당신이 어떻게 결정하든 진짜 신경 쓸 사람이 있나요? 내 남편이나 돌려받았으면 좋겠어요!" 아이러니이지만 그 결정을 두고 고민에 빠져 지내느라 코앞에 있는 아내의 얼굴을 무시해왔던것이다.


마침내 나는 의학이냐 신학이냐를 택일하는 것이 문제의 요지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날마다 내리는 작은 선택-부지런학 학생, 자상한 남편, 훈련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충실하지 않는 한 어느길을 택하든 내가 내 삶에 진정 이루기 원하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에는 이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미래에 관해 큰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우리는 전혀 안달할 필요가 없다.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가능성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다. 단순히 현재 이미 알고 있는 일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 반드시 분명히 밝혀야 할 부분에 관한 한 하나님은 이미 분명히 밝혀 놓으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날마다 내리는 선택으로 결정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품고 계신 구체적인 비밀 계획계획인가? 그분은 우리가 몇 날, 몇 주, 몇 년이고 소비해가며 그 뜻을 찾아내기를 원하실까?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뜻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선령의 능력 안에 살아가는 근실한 삶이다.


내 불확실한 미래와 힘겨운 고난과 성경의 심층 연구에 비추어 하나님의 뜻을 찾는 문제로 씨름하는 동안 나는 놀라운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의 뜻은 미래보다 현재와 관련된 것이다. 그분의 뜻은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동기를 살핀다. 미래에 대한 중대한 결정보다 날마다 내리는 작은 결정을 중시한다.


하나남은 우리의 삶에서 반드시 첫째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며 삶 전체를 그분께 내어드리기만 하면 갑자기 세상은 온통 가능성의 천지로 변한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불확실한 데는 두 번째 이유가 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밀쳐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현 순간을 하나님을 다르고 섬길 최적의 시간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말씀과 같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의 불확실성은 우리에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와 확신과 안전을 가져다준다. 진실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구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길을 선택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내가 어떻게 결정하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내 결정이 곧 하나님의 뜻이 됨을 알기에 안전을 누릴 수 있다.



소명이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단 두 사람도 세상을 정확히 똑같이 보지는 않는다. (교통사고 현장에 도착한 10명의 다른 반응 방식 사례)  내가 주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내 소명의 방향이 들어있다. 어디를 가나 운영상의 문제가 있는 단체만 보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그 기관에 들어가 더욱 효율적인 운영 체제로 바꿔놓는다. 몸이든 마음이든 영혼이든 건강치 못한 사람들만 보이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신체적, 정신적, 영적 치유를 베푸는 직업을 택한다. 주택 문제가 보이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국제 해비타트 운동 같은 비영리 기관에 몸담아 문제를 줄여 나간다.


우리는 여정에 오름으로 소명을 발견한다. 소명에 이르는 여정은 소명 자체의 필수 부분이다. 많은 경우 어렸을 때는 자신의 소명을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소명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소명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소명을 발견한다는 것은 여정을 가는 것과 같다. 길가며 만나는 경험들의 효과가 누적되어 우리를 장래 일에 준비시켜 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내가 미래에 하게 될 일에 대한 정보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있다가 다음 근무지로 명령을 받는 군인이 아니다. 우리가 삶의 소명으로서 하나님의 뜨을 알게 되는 것은 경험 자체를 통해서다. 소명을 발견하는 것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거나 연인이 사랑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 시도와 실험과 실행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소명이란 여정과 불가분의 관계다. 어떤 의미에서 소명 자체가 하나의 여정이다.


내가 만일 처음부터 내 상상이나 확신에 따라 - 또는 내가 생각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앞날을 알아맞히려 했다면,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절대 분명히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도착한 지점은 내가 가려고 계획했던 곳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러나 지금 되돌아보면 그 과정에서 드러난 유형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당시에는 보지 못했을지라도 어떤 단계에서 한 일이 그 다음 단계의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가장 깊은 동기

그 과정에서 살펴야 할 여섯 가지 신호가 있다.

1. 첫째, 자신의 내면을 살펴 어떤 일에 동기를 느끼는지 알아야 한다. 내 흥미를 글고 내게 힘이 나게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유야 어찌됐든 사람에 다라 내면의 강한 열망이나 충동이 그를 소명으로 몰아가는 듯한 경우가 있다. 내면 깊은 곳에서 뭔가가 그들을 움직여  새 사업을 시작하거나 교향곡을 작곡하거나 도심 학교의 교사가 되게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재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모든 소명에는 재능이 필요하다- 거기에 흥미와 에너지와 열정까지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들 안에 이미 그 길이 들어있다.


2.재능


3.인생경험 

남편을 암으로 잃은 젊은 과부가 호스피스로 일하게 된다. 중ㅈ학교를 죽도록 싫어했던 대학생이 중학교에서 훌륭하고 인기있는 상담자가 된다. 

때로 적시에 찾아오는 사소한 경험이 도화선이 되는 경우도 있다.


4. 열린 문 닫힌 문 (기회)

엘라자베스 엘리엇은 기회를 '환경' 이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하나님이 환경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신다고 믿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나 자신이 기도로 구하던 기회를 가리켜 열린 문이라고 표현했다....감옥 같은 엉뚱하고 불쾌한 곳도 그에게는 사도의 소명을 다할 수 있는 열린 문이 되었다.

...그러나 바울의 열린 문들 중에는 사상 초유의 기회가 된 것도 있었다. 바울은 회심 후 한동안 대중의 시선에서 사라진 적이 있었다. 소위 침묵의 시절이었다. 길리기아에 있을 때 바울은 바나바로부터 수리아 안디옥에서 함께 사역하자는 초청을 받았다. 그곳은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였다. 바울은 안디옥에 가서 그 교회 지도자로 열심히 일했다. 그와 바나바가 결국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한 교회 개척의 소명을 받은 것도 바로 그곳이었다.


내 친구 하나는 1980년대 중반에 목회 사역을 그만두고 신약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하나님이 자신을 기독교 대학이나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는 일로 부르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시기에 늘어가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그는 어느 큰 기독교 출판사에서 시간제로 일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마칠 때가 되어 여러 기독교 대학과 신학대학원에 이력서를 보냈다. 그러나 열려고 다가가는 문마다 꼭꼭 닫혀 있었다. 반면에 그 출판사에서 전임으로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열렸다. 자신의 전문 지식과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지금도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5. 사람의 목소리 

소명의 발견에 도움이 되는 다섯째 요인은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6. 일의 기쁨

하나님은 우리가 기쁘게 살기 원하신다. 그분은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섬기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을 통해서도 소명을 발견하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기쁨을 발견할 때 소명을 알게 된다. 바울은 하나님이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했다. 그분은 또한 즐겨 일하는 종을 사랑하신다.


듣는 법을 배운다

하늘에서 나는 음성을 듣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사도 바울은 들었지만 디모데는 듣지 못했다. 바울의 신앙 동료들도 대부분 듣지 못했다. 나는 사람이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하는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을 아직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우리들에게 대부분 소명이란 세월의 흐


름과 경험을 통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우리는 단순히 살면서 배움으로, 성공뿐 아니라 실패를 통해, 실험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들음을 통해 소명을 발견한다.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이 아니라, 내면의 동기, 재능, 삶의 경험, 기회, 공동체, 마음의 기쁨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소명의 관리(단순성, 균형, 유연성의 원리)




단순성 

인생에 정말 중요한 것은 많지 않다. 우리의 많은 선택들이 그 순간에는 중대해 보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덜 중요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 선택-예컨대 직업이나 일자리의 선택-은 궁극적 중요성을 띤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은 우리의 생각처럼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닌 하나님이 정말 우리가 공립학교에 가든지 사립학교에 가든지, 목수가 되든지 교사가 되든지, 수잔과 결혼하든지 독신으로 남든지.....그렇게 노심초사 신경 쓰실 것 같지 않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며 어디에 살든 그분의 더 큰 관심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균형


유연성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삶을 홀가분한 자세로 살려고 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꿈을 추구하고 경로를 구상하고 계획을 세우고 일정을 따라야 하며,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믿는 일을 행해야 한다. 그러나 항상 홀가분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기 원하시는 일을 어렸을 때부터 분별하여 나중에 정확히 그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삶의 완벽한 질서와 믿을 수 없는 창의성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의대에 낙방할 수도 있고, 시즌 최다 연속 패배 기록을 세울 수도 있고, 딸 아이가 나를 묻기 전에 내가 먼저 딸을 묻을 수도 있다.......

영영 자신이 계획했던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충실한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향한 그분의 뜻이다. 아무리 인생의 경로가 자주 바뀌어도 우리는 늘 하나님께 진실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한 경로를 다르려 하다가 불가항력적으로 다른 길로 바꿔야 할 수도 있다. 배우자나 자녀를 잃고 ,직업을 바꾸고, 사업에 실패하고, 휠체어를 타게 될 수도 있다....그렇게 우리는 통제를 잃을 것이다. 그러나 유연성을 잃지 않고 인생을 홀가분한 자세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가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뜻을 행하도록 부르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나라를 먼저 구하며 온전히 그분의 소유가 되기로 결단하면 세상은 온통 가능성의 장으로 변한다. 우리는 결혼을 택할 수도 있고 독신을 택할 수도 있다. 평생 작은 시골에서 살 수도 있고 로스앤젤레스로 이사갈 수도 있다. 의사가 될 수도 있고 교사로 일할 수도 있따. 하버드에 들어갈 수도 있고 직업에 뛰어들 수도 있다.


그 비운의 교통사고로 시작된 내 영적 추구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우리 가족을 치유의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내가 취해야 할 반응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 고난은 끔찍한 것이었고, 나는 그런 고난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소중한 우리 가족 세 사람이 목숨을 잃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마침 재수 없이 길을 건너가던 개미 세 마리를 아무 생각 없이 눌러 죽인 어린아이라도 되는 양 그것은 내게 낭비요 무의미한 사건처럼 보인다. 그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아니 일어나야 했는지 아직도 나는 설득력 있는 이유를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결국 나는 내 시야가 자신의 유한성 때문에 흐려져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 사건이 내게 아무리 불가해하고 신비로워 보였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셨다고 믿기로 천천히 조심스레 결단햇다. 성경의 다른 많은 기사들과 아울러 요셉의 이야기가 도움이 됐다. 나는 내 사연이 더 큰 이야기의 한 부분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시각에 비추면 내 시각은 눈을 한번 깜빡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내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신 많은 것이 진행되고 있음을 비로소 믿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호한 것을 알아내려 하지 않고 명확한 것을 행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