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세퍼]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 프란시스 쉐퍼-
<서문>
본서는 모든 질문들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것 하나를 다루고 있다. 즉 "우리는 어떻게 알며, 그리고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를 다룬다. 우리의 인식론epistemology이 바르게 되어 있지 않으면 모든 것이 잘못된다.
...무한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그러나 또한 그는 침묵하시지 않는다. 이것은 전세계를 바꾸어 놓는다.
<제1장> 형이상학적 필요성
철학적 사고의 세 가지 기본적인 영역
1) 형이상학의 영역인 존재의 영역, 소위 실존의 문제에 대한 영역.
2) 인간와 인간의 딜레마의 문제.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이지만 유한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 자신은 충분한 통합점이 되지 못한다.
사라트르의 또 하나의 심오한 말 "유한점finite point은 무한한 준거점reference point를 가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3) 인식론, 즉 아는 것의 문제.
-인간은 고결할 뿐만 아니라 잔인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딜레마에 빠진다. 첫째 딜레마는 인간은 유한하지만 인격적 존재라는 것이며, 둘째 딜레마는 인간의 고결성과 잔인성의 대치이다.
- 철학과 종교(그리스도교를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의 종교) 이 양자의 기본 질문은 존재, 인간과 그의 딜레마(도덕) 및 인식론(어떻게 아느냐 하는 것)의 문제이다.
- 철학은 하나의 학문 분야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철학, 즉 소수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고도의 전문적인 학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말한다면, 철학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20세기 세계에서 복음 전파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두번째 의미가 있다. 그것은 철학도 역시 한 개인의 세계관world-view을 의미한다는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철학자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철학적 사고의 세 가지 기본적 영역에 대해 할 수 있는 두 부류의 대답
1)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해답이 없다는 것. 최근에 지배적인 견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혼돈 상태이고 비합리적이며 부조리하다. 이 견해는 실존주의적 사고 세계와 부조리 연극에서는 교묘하게 표현되었다. 해답이란 없으며, 만물은 비합리적이며 부조리한 것이라고 하는 오늘날 사고 방식의 기본 요소 중 한 부분이다.
이 비합리적인 주장이 논리적 일관성을 가질 수 없는 첫째 이유는 외부 세계가 존재하고 이 세계는 형태와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세계는 결코 혼돈의 세계가 아니다. 만물이 혼돈 상태이며, 연관이 없고 부조리하다면 과학은 물론 전반적인 생활도 종말에 이르고 말 것이다. 존재하는 우주 - 외부 우주 -는 특정 형태와 특정 질서를 지니고 있고, 인간은 그 질서에 순응해야 살 수 있다는 이해 밖에서 산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2) 둘째 부류의 대답은 합리적이며 논리적으로 고려될 수 있으며 또한 객관적으로 다른 사람들과도 의사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해답이 있다는 것이다. 본장에서는 논의될 수 있는 답변의 영역 안에서 형이상학을 다룰 것이다. 그 다음 논의될 수 있는 답변과 도덕의 영역, 즉 딜레마에 빠진 인간을 연관지어 다룰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존재 및 실존의 영역에 대한 이렇나 답변을 고찰해 보자.
나는 이미 답변들 안에서 세부 사항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기본적인 답변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이제 매우 신기한 일이지만 이 질문에 대해 합리적 고찰이 가능한 기본적인 답변은 세 가지밖에 없다,. 기본적 답변이란 실로 극히 드문 것이다.
1) 첫번째 기본적 답변은 모든 것은 절대적인 무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당신은 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제 이 견해가 성립하려면, 그것은 절대적인 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소위 무의 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유의 무도, 혹은 무의 유도 안 된다. 이 답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것은 에너지, 질량, 운동, 및 인격도 없는 무의 무가 되어야 한다.
2) 실존적 영역에서 가능한 두번째 답변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비인격적인 기원에서 출발을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인격은 질량, 에너지 혹은 운동이 될 수 있으며, 이것들은 모두 비인격적이므로 모든 것은 똑같이 비인격적인 것이 된다.
만물의 비인격적인 기원을 받아들이는 순간 당신은 일종의 환원주의에 직면하게 된다. 환원주의reductionism는 별들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에 이르기까지,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 만물은 궁극적으로 원래의 비인격적인 요소 혹은 요소들로 환원하여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인격적인 기원에 따르는 커다란 문제는 개별자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이다. 개별자는 전체에서 분리된 부분인 어떤 개체의 요소, 혹은 어떤 개체 사물이다. 한 방울의 물은 하나의 개별자이며 개인 한 사람도 역시 그러하다. 만일 우리가 비인격적인 것에서 출발했다면 인간을 포함하여 현재 존재하고 있는 개별자들이 어떻게 어떤 의미나 의의를 가질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우리에게 해답을 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동양이나 서양을 막론하고 철학 사상의 전 역사를 통틀어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사람은 없다.
비인격적인 것에서 출발한다면,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비인격적인 것+시간+우연과 연관지어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비인격적인 기원과 시간+우연이, 인간의 인격은 말할 것도 없고, 불기피한 우주의 복합성을 어떻게 생겨나게 할 수 있는지를 실증해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흔히 비인격적인 것에서 시작했다는 답변을 범신론pantheism이라 부른다. 새로운 신비 사상은 거의 언제나 일종의 범신론이며 현대의 거의 모든 자유주의 신학도 마찬가지로 범신론적이다. 흔히 이 비인격적인 기원을 범신론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의미론적 기만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정의로는 비인격을 뜻하지만 인격을 내포하기 위해 신론theism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토론할 때 범신론에 대하여 생각없이 함부로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범신론이 아니라 인격에 대한 의미론적 환상이며 범만물주의paneverythingism라는 점을 설명하곤 한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에서 나는 현대의 해결책들이 통상적으로 의미론적 신비주의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으며 이것도 의미론적 신비주의의 하나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문제 - 통일의 필요와 다양성의 필요 - 가 항상 존재한다. 범만물주의는 통일의 필요에 대한 답변은 주지만, 다양성의 필요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변도 주지 못한다. 비인격적인 것에서 시작하면 다양성의 의미 혹은 의의가 없다.
범신론자들이 주장하듯이 비인격적인 기원을 주장하면, 다양성을 가진 실존, 혹은 인간의 인격, 즉 "인간됨"에 대한 진정한 답변은 존재하지 않는다.
3) 세번째 답변은 하나의 인격적인 기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답변으로 실존에 대한 가능한 기본적 답변을 다 이야기한 셈이다.
우리가 인격적인 기원에서 출발하고 또 이것이 그 밖의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이 인격적인 것은 의미를 가지며, 그리고 인간과 그의 갈망은 무의미하지 않다.
만일 우리가 인격보다 못한 것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결국 인격을 비인격적인 것으로 환원시키지 않을 수 없다. 현대의 과학 세계는 환원주의 속에서 이 일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인격이라는 낱말이 다만 비인격 더하기 복합성에 지나지 않는다.
일단 인격적인 기원을 고려하면 또 하나의 선택을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답변을 택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신들의 답변을 택하려 하는가? 하는 것이 다음 단계의 문제다.
인격적인 기원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얻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을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는 인격적이며 무한한 하나님이 필요하고 또한 하나님 안에서 인격적 통일과 다양성이 필요하다.
-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의 인격적 통일과 다양성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통일과 다양성에 대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격적 통일과 다양성을 필요로 하고, 이것 없이는 해답을 얻을 수 없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존재와 실존의 영역인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철학적 필연성이다. 이것은 이른바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 만일 삼위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직도 불가지론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답변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안에 있는 높은 차원의 인격적 통일성과 다양성 없이는 답변이 존재하지 않는다.
- 아인슈타인은 모든 물질 세계는 전자기와 중려긍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말년에 가서 아인슈타인은 이 두 가지를 초월한 하나의 통일, 즉 전자기와 중력을 결합시킬 어떤 것을 찾고 있었지만, 결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것을 발견하였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만 물질 세계에 관계되는 다양성 안의 통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단지 어린 아이의 장난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 다시 명심할 것은 이것이 최상의 답변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유일한 답변이다. 그 밖의 누구도, 어떤 철학도 우리에게 통일성과 다양성에 대한 해답을 준 바 없다. 따라서 사람들이 삼위일체로 말미암아 지적으로 우리가 난처한 입장에 처하지 않는지 물어올 때, 나는 언제나 그것을 그들 자신의 용어인 통일성과 다양성이라는 말로 바꾸어 버린다. 모든 철학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으나 어떤 철학도 해답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삼위일체의 실존에서 해답을 가지고 있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유일한 답변은 삼위의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성경의 완전 영감에 대하여는 나도 그 누구 못지 않게 지지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성경이 성경 자체를 제시하고 있듯이 제시되어진 그대로의 기독교가 곧 진리의 목표는 아니다. 기독교의 진리란 존재하고 있는 것에 충실한 것이다.
- 우리가 존재하는 것의 실존에 관한 철학의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는 충분히 성경적인 입장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에 관한 충분히 성경적인 내용, 즉 그는 무한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이며, 또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 하나님은 침묵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해답을 갖는 이유는 무한하고 인격적인 하나님, 완전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침묵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자기가 누구임을 말씀하셨다. 영감과 계씨에 대한 당신의 개념을 이런 말로 나타내 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것이 어떻게 현대 사고 방식의 기본 요소를 잘라버리는지를 알것이다......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일들에 대해서만 말씀하셨는가?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자신에 대한 진리, 즉 그는 무한하고 인격적이며, 삼위일체의 하나님임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실존에 대한 해답을 갖는다.
- 결론적으로 말해서, 자기 자신에게서 출발하는 인간은 실존에 대한 철학적 문제를 정의할 수는 있지만,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출할 수는 없다. 실존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무한하고 인격적인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그리고 무한하고 인격적인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침묵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 2 장> 도덕적 필요성
* 철학적 사고의 둘때 영역인 인간과 인간의 딜레마.
- 나는 사람들이 항상 어떤 일들은 옳고 어떤 일들은 그르다고 느껴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도덕적 동기에 대한 이 의식을 지니고 있다. 고대의 그 어느 곳으로 소급해 가더라도 이 도덕적 동기를 가지지 않은 인간은 찾을 수 없다. 거리의 어린 창녀라 할지라도 도덕적 동기에 대한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만일 도덕으로서의 도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할지라도, 도덕적 동기에 대한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심리학의 행동주의자나, 결정론자는 없다. 이와 같이 완전한 우주적 소외로 이끌어 가는, 도덕적 동기에 대한 느낌을 가진 인간을 보게 되는 것은, 비인격적인 기원에서 시작할 경우 현상 그대로의 우주에는 도덕으로서의 도덕이 있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과 같은 말들에 대해 최종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기준이 우주 안에는 없다. 만일 당신이 비인격적인 것에서 출발한다면 이 우주는 그러한 낱말에 대해서는 어느 것에나 전적으로 침묵을 지킬 뿐이다.
- 비록 종교 용어나 더 나아가서 기독교 용어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비인격적인 것에서 출발하는 한, 궁극적 절대 기준과 옳고 그름에 대한 종국적인 구분이 없다. 여기서 남는 것은 다양한 방법과 다양한 문화양식으로는 표현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사회학적, 통계학적, 상황적인 것과 같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며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상황적, 통계학적 윤리 - 평균의 표준- 는 가지고 있지만 도덕성은 가질 수 없다.
- 민주주의는 끝났다는 맥루안의 개념을 생각해 보라. 민주주의나 혹은 도덕 대신에 무엇을 갖게 되겠는가? 그는 거대한 컴퓨터에 모든 사람이 연결되고, 주어진 순간에 그 컴퓨터가 뽑아내는 그 평균치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이 될 지구촌 시대가 온다고 말한다. 당신은 그것은 억설이며 세계적인 컴퓨터 시스템은 결코 출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주어진 순간에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의 평균치가 도덕이라는 개념이 오늘의 현실이다.
- 비인격적인 것에서 출발한다면 우주의 복합성이나 인간의 인격에 대한 설명이 있을 수 없다. 내가 앞장에서 말하였지만 기독교가 보다 좋은 답변이라는 것이 아니라, 만일 비인격적인 것에서 출발한다면 사실항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는 전혀 아무런 답변도 가질 수가 없다. 그리고 도덕의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당신이 비인격적인 것에서 출발한다면 당신이 그 비인격적인 것을 어떤 말로 추켜 표현하든지 도덕에 대한 의미가 없다.
- 하나님에 의하여 인격적으로 창조된 인간이 스스로 변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변헀기 때문에 연속성이 아닌 비연속성 가운데 서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본래의 인간에서 변질되었다. 이 경우에, 우리는 인간은 지금 잔인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악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유대-기독교의 입장이다.
- 당신이 기독교의 해답에 이르게 될 때, 즉 인간은 시공간적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스스로 변했기 때문에 (인식론적으로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지금 비정상적이라고 할 때는 즉시 다음과 같은 네 가지가 등장한다.
1) 이제 우리는 하나님은 악한 하나님이 되지 않고도 인간은 현재 잔인하다고 설명할 수 있다.
2) 인간의 '인간됨'에 대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이 도덕적 문제를 해결할 희망이 있다. 만약 이 잔인성이 인간의 '인간됨'에 본질적인 것이라면 -만일 이것이 항상 존재해 온 것이라면- 해결할 희망이 없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비정상적이라고 한다면 해결될 희망이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이며 화해적인 죽음이 불가해한 개념에서 끝나는 것이 바로 이 상황에서이다.
3) 이런 기초에 입각하면 우리는 사회악과 사회적 불의를 포함한 악과 투쟁할 적절한 근거를 가질 수 있다.
현 상태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 자신이 자신을 잔인하게 만들었다...그러한 것들은 비정상적인 것이며, 하나님이 만드신 바와는 역행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싸우지 않고도 악과 싸울 수 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에 오셨다.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그분이 무덤 앞에 서 있었으며 희랍어는 그가 그 때 두 가지 감정을 가졌던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 첫째 감정은 나사로를 위한 눈물이었으며, 둘째 감정은 분노였다. 그는 격노하였다. 그는 하나님인 자신에 대하여 노발하지 않고도 죽음이라는 비정상 상태에 대해 노할 수 있었다. 이것은 20세기 상황에 있어서는 엄청난 일이다. 내가 하나님이 만드신 그대로의 것이 아닌 비정상적인 잔인성, 즉 악을 볼 때 나의 반응도 그와 똑같았을 것이다.........나는 하나님이 원래 만드신 것에 어긋나는 비정상적인 것과 싸울 근거를 가지고 있다.
4) 우리는 진정한 도덕과 도덕적 절대 기준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시기 때문이다. 악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된다. 하나님의 인격이 우주의 도덕적 절대 기준이다. 절대 기준이 없는 한 도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플라톤은 전적으로 옳았다. 플라톤의 딜레마에 대한 완전한 답변이 여기에 있다. 플라톤은 그의 절대 기준이 근거할 자리를 찾기 위하여 그의 생애를 들였지만 그는 결코 찾지 못하였다. 그가 신봉하는 신들이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악이 배제되는 인격을 가진 무한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있으며, 그의 인격은 곧 우주의 도덕적 절대 기준이다.
- 형이상학의 영역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이것이 최상의 답변이 아니라 도덕상의 유일한 답변이라는 사실이다. 사회악의 문제를 포함하여 진정한 도덕으로서의 도덕의 영역에 있어서 유일한 해답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귀착한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악과 도덕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며, 그의 인격은 어떠한지를 알 필요가 있다. 그의 인격은 바로 우주의 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인격이 어떠한지를 말씀하셨으며,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도덕률, 우리의 도덕적 표준이 되고 있다. 그 인격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시 그러했고, 하나님 자신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대론적인 것과는 정반대가 된다.
<제3장> 인식론적 필요성: 문제
- 인식론은 지식의 방법 혹은 근거 - 지식의 이론, 혹은 우리는 어떻게 알며, 혹은 우리가 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 에 대한 이론이다.
- 플라톤은 기본적인 문제를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지식의 영역에 있어서는, 도덕의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만일 의미가 존재한다면 개별자particulars 이상의 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식의 영역에 있어서 개별자라 함은 우리가 세상에서 보는 개체 "사물"을 뜻한다. 어떤 주어진 순간에, 나는 한 눈에 수천 개 아니 문자 그대로 수백만의 개별자와 직면한다. 이러한 개별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통일시키는 보편자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인식론의 문제, 인식의 문제의 핵심이다.
(예를 들어 사과를 생각 할때, 다른 품종의 사과를 열거 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이 삼백 가지 종류의 사과 이름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우리는 사과라는 말 아래 이 모두를 넣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가 보고 있고,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한 보다 더 큰 이해를 갖는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개별자에서 보편자로 옮겨가고 있다.)
- 과학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과학은 개별자를 보고 많은 개별자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법칙을 만들어 우리가 그 연관 관계를 보고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하려고 한다.
- 나는 도덕의 영역에서 우리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결정짓기 위해서는 보편자(절대 기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루었다. 보편자를 갖지 않는 한 현대의 개념은 종국적으로 사회학적이다. 즉 옳고 그름에 대한 여론의 통계를 사정하여 다수가 도덕 문제들을 결정짓는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말해 줄 엘리트(선택된 사람)의 출현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 일부 희랍인들은 폴리스, 즉 사회가 보편자를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희랍 철학자들은 이것은 불충분하다는 것을 곧 알아차릴 만큼 현명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폴리스에 속한 사람은 곧 51퍼센트의 찬성표나 혹은 소수의 엘리트 개념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플라톤의 철인 통치자들로 끝을 맺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너무나 한정되어 있다. 만일 한 사람이 그 폴리스의 철인 통치자들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결국 철인 통치자들이 모든 개별자를 망라할 수 있을 하나의 보편자를 줄 수는 없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신들이 폴리스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줄 수 있다는 근거에서 신들에게로 되돌아 왔다. 그러나 희랍신들은 인격적이긴 하지만 충분히 크지는 못하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만일 합리주의의 기초에서 출발한다면, 즉 인간이 다만 자기 자신에서부터 출발하고, 어떤 외부 지식도 가지지 않는다면 오직 수학과 개별자만을 갖게 될 것이며,오직 기계로 끝나고 말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그는 우리가 보편자를 그리려고 힘써야 한다고 했다.....마치 플라톤이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의자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려면 모든 종류의 의자를 망라하는 하나의 이상적인 의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처럼 보편자를 그리려고 노력했다. 레오나르도는 이 사실을 이해했으므로 그는 "인간이여, 보편자를 산출하라!"고 말했다.
- 합리주의는 여기에서 실증론이라는 인식론적 개념을 전개한다. 실증론은 우리가 완전한 객관성을 가지고 사실과 객체를 안다고 가정하는 지식에 대한 학설이다. 현대의 "과학주의"는 이 실증론에 입각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낭만적인 개념이며, 그리고 이것이 주장하는 한 합리주의적 인간은 자신의 자만속에서 뽐낼 수 있다. 이것은 어떠한 보편자에서 시작하지 않아도 유한한 인간이 개별자로부터 보편자를 만들기에 충분한 참된 지식을 유한한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견해에 기초하고 있다.
- 고갱은 모든 속박, 즉 하나님의 속박뿐만 아니라 폴리스의 속박까지 제거했다. 고갱에게는 폴리스가 고도로 발전된 프랑스 문화의 축소판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문화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프랑스를 떠나 타히티로 갔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미 루소가 천명한 바 있는, 고귀한 야만인의 개념을 실행하였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이 일은 그가 기대하던 대로 되지 않았다.
- 실로 고갱과 같은 사람들로부터 1960년대에 모든 히피 문화 및 모든 현대 문화까지는 오직 한 걸음에 불과하다. 어떤 의미에서 루소로부터 히피 문화 즉 전 현대 문화, 즉 보편자는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고 인간은 전적으로 쾌락주의적으로 자유로우며, 개인도 전적으로 도덕적으로만이 아니라 지식의 영역에 있어서도 쾌락주의적으로 자유롭다고 하는 견해에 입각하고 있는 히피 문화와 모든 현대 문화의 탄생에 이르기까지는 한 단계이다.
- 화이트헤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에서 뉴턴과 패러데이에 이르는, 초기의 근대 과학자들이 근대 과학을 공식화활 용기를 가졌던 이유는 우주가 합리적인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므로 이성으로 이 우주에 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따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것들, 즉 가치,윤리 및의미의 영역에 있어서는 다만 침묵만이 있을 따름이라고 한다. 인간은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자기는 그런 것들에 대하여 말을 하거나, 혹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신비주의자로서 "침묵"을 크게 여겼다. 가치,윤리,의미가 아무리 필요하다 해도 오직 침묵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제4장> 인식론적 필요성 : 답변
- 기독교는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지은 무한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는 인간이 다른 인간과 수평적 의사소통을 하는 명제의 영역에서 언어 구사자가 되도록 창조하였다.......다른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삼위일체 안에서는 늘 의사소통이 이루어져 왔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셧으며, 인간을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만든 일부분이 곧 인간이 언어 구사자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기독교 구조의 통일성에 해당된다.
-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언어 구사를 기초로 하는 의사소통자가 되도록 만드시고, 상호간에 명제적이며 사실적인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주었다면, 그가 언어 구사 및 명제를 기초로 하여 우리들과 의사소통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 하나님은 우주를 만들고, 인간을 만들어 우주 안에 살도록 하셨으며,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언어로 표현되고 명제적이며 사실적인 계시인, 성경을 주신다. 성경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순하 사회학적 평균치 대신에 가능한 진정한 도덕이 되는 도덕에 대하여 말씀할 뿐 아니라, 우리의 지식과 관련되는 이해력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리스도인에게 인식론이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정확하게 그리스도인에게 자연과 은총의 문제가 없는 이유와 똑같다. 이같이 이성적인 하나님이 두 가지 것, 즉 아는 것과 아는 자, 주체와 객체를 만들고 이 둘을 결합시키셨다. 따라서 이것들 사이에 상호관계가 있다 해도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당연히 기대하는 바가 아닌가?
- 나는 폐 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이 폐 조직은 내가 살고 있는 지구 환경에 적합하다. 그것은 금성이나 화성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며 달에서도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내 자신의 환경에는 적합하다. 왜 그것이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적합한가? 나의 폐 조직이 이 세상의 환경과 상호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하등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이성적인 하나님이 나의 폐 조직과 그 환경을 모두 만들었으며 또한 그가 나를 이 세상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폐 조직과 내가 살고 있는 환경간의 상관관계를 기대한다. 인식론의 영역으로 가도 하나님이 나에게 나의 정신의 범주와 내가 살고 있는 세상 사이의 상관관계를 주셨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인식 문제에 있어서, 만일 이성적인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나도 만드셨다면 그가 인간 정신의 범주를 외부 세계의 범주에 맞도록 만들었다고 해서 하등 놀랄 것이 없다. 이 양자는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다. 외부 세계에도 범주가 있고 나의 정신에도 범주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서로 일치한다고 내가 놀라야만 하겠는가?
- 성경은 두 가지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다. 첫째로, 성경은 어떤 일들을 교훈적 진술, 언어 표현, 명제로서 가르친다. 둘째로, 성경은 하나님이 몸소 만드신 세상 안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여주으로써 가르친다.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에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은 사실들을 위하여 읽혀져야 하며, 그것은 또한 경건을 위해 읽혀져야 한다. 그러나 그가 자기 자신의 생활을 위해 매일 성경을 읽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이것은 그 사람에게 다른 정신을 준다. 현대 세계에서 우리는 닫힌 체계 안에 있는 자연 원인의 제일성이라는 정신에 포위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정신을 준다. 성경을 읽음으로 우리는, 사방-교육,문학,예술 및 대중매체-으로부터 우리에게 육박해 오고 있는 이 다른 정신의 커다란 장벽에 반대되는 올바른 정신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경시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무한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역사와 우주 안에서 역사하실 때, 자신이 외부 세계에 대하여 말씀하신 바와 일치되는 방법으로 역사하심을 발견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창조의 언약이다. 그가 행하시는 바는 결코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깨뜨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역사하실 때, 자신이 외부 세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방법과 일치되게 역사 하신다. 개별자에 대한 보편자의 역사는 개별자가 어떤 것이라고 그가 말씀하신 바를 정의하고 확인한다.
- 기독교 체계의 강점은 모든 것이 존재하시며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정점으로 하여 그 아래에서 서로 조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이 세상에서 유일한 체계이다. 다른 어떤 체계도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정점을 가지지 못한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며, 불가지론자가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른 모든 체계에서는 어떤 것이 "튀어나오며", 어떤 것은 포함될 수가 없다.
- 성경은 속사람과 겉사람 모두를 위한 규범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명제적이며 사실적인 계시를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에 의하면 속사람은 자율적이 아니며, 겉사람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속사람이 자율적으로 될 때마다 그것은 꼭 겉사람이 자율적으로 될 때만큼 혁명적인 것이다. 전에 낸 책 '이성에서의 도피'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모든 인간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자율적으로 되려고 할 때에 일어나며, 그리고 내가 강조해 온 바처럼, 어떤 것이든 하나님으로부터 자율적으로 되는 그 순간 "자연은 은총을 삼킨다."
- 사람이 어떤 말을 하든지 상관할 것 없이 우리는 그가 진정 누구인가를 알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밑바닥의 어느 곳, 즉 외부로는 그가 아무리 목석 같거나 죽어 있는 사람이든 상관 없이, 또는 자기는 단지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다고 믿을지라도 표면의 이면에는 언어구사자이며 사랑을 하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인격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아무리 자주 자기는 무도덕자라고 말하더라도, 실제로는 그도 도덕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
- 인간은 하나님께 거역하였으며 자율적인 입장에 서려고 하였으므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영역에는 커다란 소외가 있다. 이 일이 일어나면 그 밖의 모든 것도 그렇게 된다. 이 자율은 인식론과 지식이라는 매우 기본적 영역에까지 파고들어 갔으며, 따라서 인간은 인식의 영역에서 타인과 분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분리되었다. 내부의 환상과 외부 세계 사이에 보편적 범주가 없으며,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분리되고 소외됨을 느끼게 된다. 그는 자신의 생활 안에 있는 개별자를 감당할 보편자를 가지지 못한다. 그는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다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절규하기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오늘날 기독교 사역에 종사하는 여러분들 중의 누구에게 이 소리가 익숙하게 들리는가? 라브리에는 지구의 끝에서 와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같이 심리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인식론적인 것이다. 인간이 시도한 자율은 인간으로부터 실재를 빼앗고 말았다. 그의 상상의 날개가 별의 세계 너머로 갔을 때, 만일 실재와 환상을 구별짓는 것이 없다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기독교 인식론에 기초하면 이러한 혼란도 끝나며, 소외는 치유된다.
이것이 바로 인식의 문제의 핵심이다. 이것은 존재하시며 말씀하시는 무한하고 인격적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정점 아래에서 우리 지식이 조화될 때까지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될 때, 그리고 오직 이렇게 될 때만, 인식론의 영역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게 된다.